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자세

  • 잡초 잡초
  • 505
  • 0

첨부 1


- 설교 : 문기태 목사 (창원침례교회)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어린 소년 하나가 거드름을 피우며 동네 운동장에서 야구 방망이와 공을 가지고 혼자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하고 외친 뒤 공을 위로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었는데 헛치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혼자서 "스트라이크 원, 노 볼"하고 소리쳤습니다. 소년은 기세가 꺽이지 않은채 공을 주워 들며 다시 소리쳤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 그리고는 다시 공을 위로 던지고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습니다. 이번에도 헛치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스스로 심판이 되어 "스트라이크 투, 노 볼"하고 외쳤습니다. 소년은 야구 방망이와 공을 잘 살핀 후에 손바닥에 침을 뱉고 손을 비비며 모자를 고쳐 쓰고 외쳤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 그리고 공을 위로 던지고 공이 내려올 때 방망이를 힘차게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헛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가 되었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꺽이지 않는 자세는 대단한 모습입니다만 아무도 그를 훌륭한 야구 선수로는 인정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년처럼 우리도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속으로 인정하고 자신만만할지 모르나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큰 일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읽은 말씀에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스스로는 의롭다고 확신에 차 있었지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왔는데 모두 의로운 예배자라고 인정받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 매번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가 은혜의 보좌에 상달되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봉사가,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헌금이, 우리의 구제가 모두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복된 결과가 따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여야 합니다.(9)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 말씀에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성전에 올라갔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종말적이고 절대적이고 직선적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하겠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 보면은 오늘 본문에 이 두 사람은 극단적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대조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라고해서 그냥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느날 바리세인과 세리 두 사람이 실제적으로 함께 올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신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은 아주 교만합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 이것은 당시 세리들이 범하는 일반적인 죄예요. 그걸 꼬집는 거예요. 따라서 저기 있는 세리도 토색, 불의, 간음을 저지른 죄인임이 틀림없다는 논리입니다. "자 이제 이런 죄를 나는 범치 않고 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바리세인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냄으로 자신이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으나 그것이 하나님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듣는 세리가 상처받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마구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더러운 많은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교만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교만이란 지적 교만이 있고 민족적 교만이 있고 사회학적 교만이 있고 그리고 영적 교만이 있는데 그 중에 영적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잘 믿는다" "나는 저보다 더 경건하다" "나는 저보다 더 의롭고 깨끗하다" 이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종교 의식을 액세서리처럼 생각해요.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금식을 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큰 소리로 떠벌리고 있어요. "그리고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얼핏보면 감사가 풍성한 사람같지만 실제는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갈 수 있다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 남하고 비교하고 남을 왜 정죄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자신을 의롭게 과시하고자하는 악한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떤 돈 많은 부자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어떤 계약을 따내야 되겠는데, 이 계약을 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합니다. "이 계약이 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아 뒤에서 누가 기도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와요. 안 들을려고 해도 조용조용히 자기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소리가 들려와서 부득불 듣게 됐어요. 들어보니까 이 분은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하나님 내게 오만원을 주십시오. 오늘 내가 저 용역 시장에 나가서 좀 일을 맡아서 일을 해서 오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 오만원을 벌게 해주십시오." 그 기도가 얼마나 거슬리고 방해가 되는지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이 부자가 홱 돌아서서 만원짜리 다섯장을 주면서 "이보게 여기 오만원 있으니 빨리 가지고 가게. 그리고 하나님이 제발 다른데 신경을 쓰지 아니하도록 헷갈리지 않게 조용히 해주길 바라네." 그 바람에 오만원은 쉽게 응답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기준에서는 오만원을 부르짖는 기도보다 오억원짜리 계약성사가 더 크고 중요한 기도같지만 하나님앞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여러분의 기준으로 정죄합니까?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기 관점으로 비교해서 내 경건이 더 위에 있다고, 내가 더 의롭다고, 내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많이 틀렸고 엉터리신자같아도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경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허물이 드러나고 크게 보이고 우습게 보여도 멸시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품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2.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자세여야 합니다.(11)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오는데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몇 번 빠지다보면 하나님 뵙기에 미안한 마음보다는 사람보기에 더 부끄럽습니다. 은혜를 받고 눈물이 쏟아져도 마음껏 울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보기에 창피하고 의식이 되어서입니다. 찬양을 부르다가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어 하나님앞에 손을 들거나 일어나고 싶어도 사람들이 비웃지나 않을까 의식이 되어 성령의 감동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나와서 사람들을 더 의식하다보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섭섭해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들어가 둘 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사람 바리세인과 세리는 극과 극입니다. 바리새인은 거룩함의 극치예요. 유대사람의 윤리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거룩'이거든요. 거룩한 자 중의 최고가 바리세인입니다. 그리고 가장 낮고 천히 여기고 아주 죄인의 대명사가 세리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리와 바리세인은 극과 극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는 하지만은 그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될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를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웃을 보고 자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사람 앞에 자기 자랑을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던 나머지 하나님도 못 보고 자기 자신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이 사람은 자기 집착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말을 강조합니다. "나는, 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에는 두 번 "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은 영어나 원문에는 세 번 나타납니다. 우리는 대체로 주어를 빼놓고 동사만 말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하고 강조합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게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예배는 예배될 수가 없었어요.
오늘 본문에 넌센스 같은 얘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따로 서서" 그랬어요. 따로 서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저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죠. 옆에 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썼어요. 저 사람과 나와 같이 대접받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혹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실 때 옆에 누가 앉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쓰십니까? 왠지 저 사람과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이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못 마땅하게 생각됩니까? 그것은 예배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 앞에 함께 있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죄인일 뿐입니다. 그가 무슨 뭐 사장이든 시장이든, 뭐 혹은 어디 가서 막 일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있거나 없거나, 과거가 높건 낮건 예배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이 바리새인은 '이 사람하고, 저런 사람하고는 내가 같이 앉을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예배를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 나와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앞에 자신을 과시하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사람들이 죄진 것도 잊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을 행한 못마땅한 생각도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통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나올때마다 하나님을 꼭 만나고 하나님께 옳다는 인정을 받고 돌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세여야 합니다.(13)
오늘 세리를 보세요. 세리는 하나님 앞에 오직 긍휼을 구하고 있을 뿐이요. 돈도 명예도 지식도 아니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의 기도는 긍휼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소망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한분 만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지난 한 주간 제 입에 맴돌던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를 끝까지 외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 찬양이 입술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구절이 그렇게 은혜가 될 수가 없어요. 한번 불러 보겠습니다. [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
혹시 우리중에는 다른 어떤 은혜를 구하는데 바빠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잊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무엇보다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용서하심과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은헤를 받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이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세리를 멸시하고 깍아내리는데도 세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있어요. 분개하거나 같이 비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어요. 하나님께 집중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긍휼을 구하는데 마음이 집중되었기에 그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에요.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구한다면 이처럼 하나님에 전심을 다해 매달려야 합니다.
세리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런 직분을 가졌습니까?", "나는 왜 이런 직업을 가졌습니까?", "내 팔자는 왜 이렇습니까?" 하는 원망이 없습니다. 저 바리새인처럼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교만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하는 비난도 하지 않습니다. 직업상 어쩔수 없었다는 변명도 없습니다. 토색하지 않도록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간음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직업을 바꿔 달라는 얘기도 없어요. 그래도 나도 헌금을 하느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하는 자기 변명도 없습니다. 오로지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 말 밖에는 안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이게 본문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 나와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여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든 것이 극과 극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자세로 아주 달랐고 결과도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둘 다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둘 다 하나님게 기도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는 둘 다 교회안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앙자세입니다. 하나는 교만했고 하나는 겸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 충만했고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식했고 하나는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자세가 본문의 세리를 본받아 하나님앞에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