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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 (약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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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마음속의 자(尺度)

(자를 들고) 여기 자(尺)가 하나 있습니다. 이 자는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자는 아주 흔한 물건이고 여러분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자 하나씩 없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가 뭐에 쓰는 물건입니까? 자는 길이를 재는 도구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대상이 기준에 맞는지 판단하는 척도(尺度)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기준 말입니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이래야 한다, 정치인은 이래야 한다, 부인은, 남편은 이래야 한다, 교회에서 목사는, 장로는 이래야 한다. 등등”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집에만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속에 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음속의 자를 가지고 상대방을 재본 후 자신의 기준에 안 맞으면 옳으니 그르니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마음의 자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기 이전에 꼭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판단은 자유지만 이 판단이 자칫 상대방에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 마음속의 자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마음속의 자를 가지고 남을 제멋대로 판단해서 내 마음에 안 맞으면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내 판단과 평가를 받는 사람은 몸이 제멋대로 늘려지거나 잘리게 됩니다. 상처를 입고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이 가진 자가, 우리의 판단이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이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상처 주고 죽이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요?

너는 누구관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웃을 판단하고 주변 사람을 평가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너란 사람이 누구길래 네 이웃을 멋대로 판단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판단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섬뜩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세상에서 법을 세울 수 있는 분, 진정한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의 유일한 재판자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한 분만이 재판자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은 유일한 입법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할 기준을 세우는 일도, 또 그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는 일도, 그 판단에 따라 상대방을 상벌에 처하는 일도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조처 앞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일만이 우리의 소관인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

성경에서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가던 사울이 동굴 속에 발을 가리러(대변을 보러) 들어갔는데 마침 그 동굴 속에는 다윗일행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볼일 보고 있는 원수 사울이 바로 앞에 있고 다윗이 한번 칼만 휘두르면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사울의 옷자락을 베기만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을 내 마음대로 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사건이 사무엘하 16장에 나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가던 다윗을 향해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습니다.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 공동번역으로 읽습니다. “꺼져라! 이 살인자야, 꺼져라! 이 불한당 같은 놈아!” 이렇게 저주하면서 시므이는 다윗 일행을 향해 돌까지 던집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역시 공동번역입니다. “이 죽은 개만도 못한 놈이 무엄하게도 임금님을 욕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제가 당장 건너 가 목을 자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10~12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번에는 표준새번역으로 읽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그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소. 주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혹시 주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 이러한 다윗의 태도야말로 모든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만 맡기는 모습입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할 것이며, 심지어 나를 힘들게 하고 저주하고 괴롭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판단은 오직 유일한 입법자요 재판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참으로 복 받는 위대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우리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세

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난 주, 그리고 이번 주 다음주까지 걸쳐 낮 예배 때 우리 크리스천의 언어습관에 대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듯이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잣대 하나가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아니, 무엇보다 나 자신의 신앙과 인격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 주변에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이라도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께만 맡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결코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눈치 보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판단만을 두려워하면서 신앙적인 자세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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