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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썩을 것으로 심으라 (고전 15: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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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영민 목사 (강남침례교회)

  저는 지난주 부활절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에 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말씀인 고린도전서 15장 35절을 보시면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사느냐?’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의 질문을 한 사람은 부활에 관하여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불신앙의 사람
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질문을 한 사람은 부활에 관하여 믿기는 하되 여전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던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을 향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하여 첫 번째의 의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꾸중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3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 말씀처럼 바울은 부활에 관하여 의심을 품고 있던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하여서 ‘어리석은 자’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식물의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는 뿌리가 자라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확실성을 알 수 있다고 강조를 하였습니다. 비록 하나의 생명을 가진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여러개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처럼 우리 죽은 자의 몸도 언젠가는 다시 확실하게 부활하게 된다는 진리를 사도 바울은 담대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제가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질문에 관한 대답입니다. 두 번째의 질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사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질문의 대답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죽은 씨앗을 살려내는 능력이 죽은 몸도 살려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본문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뿌리는 씨앗의 모양과 장래에 나타날 식물의 모양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처음에 심겨진 알갱이가 썩어서 나중에는 새로운 형체로 변화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알갱이가 변하여 새로운 형체로 탄생한다는 자연의 섭리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어서 부활할 때에도 현재의 몸과 미래에 나타날 부활의 몸 사이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섭리로 말미암아 실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 자신의 얼굴과 육체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이후로는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몸과 우리가 미래에 가질 부활의 몸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키가 조금 작다고 해서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얼굴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못 생겼다고 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피부색이 남들에 비해서 조금 검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연수는 길어야 70, 80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서 살아갈 연수는 영원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세를 살아가시면서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을 품고 있는 분들도 희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젠가는 우리들에게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순간이 틀림없이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35절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처럼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 현재에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을 받는 분이 계시다면 장차 받게 될 부활의 영광을 확신하는 가운데에 담대히 이겨내시는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질문의 대답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부활의 몸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관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점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동안에도 입고 있는 육체의 모양도 저마다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 38-3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육체도 다르고 짐승의 육체도 다르고 새와 물고기의 육체도 저마다 독특한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그럼 바울의 두 번째 논리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생명체들도 각각 저마다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신령한 존재들도 저마다의 모습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같은 주장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49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또한 50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처럼 우리는 이 땅에 있는 혈과 육의 형상으로는 신령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이 죽음을 통하여 신령한 존재로 변화하여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고 있는 육신의 모양도 저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또한 그 육신이 받고 있는 영광도 사람마다 전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남들보다 출중한 외모를 소유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스타가 되어서 온갖 부귀영화와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에 가만히 보니까 백인들은 흑인보다 피부색이 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황인종에 속한 우리나라 사람들도 흑인들을 보면서 좋지 않은 편견과 선입관을 갖고서 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저 마다의 육신도 다르고 그 육신이 누리는 영광이 다른 것처럼 사도 바울은 부활의 순간에도 저 마다의 영광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본문 41절에서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믿음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에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순간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변화할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최우선적으로 죄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함을 입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화친’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너무나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젠가는 의인의 부활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인간적인 노력과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죄사함, 칭의, 화친, 천국, 영생, 의인의 부활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기본구원’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의 기쁨을 맛보며 부활의 대열에 참여하는 기본구원의 혜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본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부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순간에 나타나는 영광은 각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기본구원의 터전위에 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사모하는 가운데에 힘써 건설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광을 입게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이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기본구원이 결정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영광과 존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건설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천국은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생만이 있다는 진리를 믿고 날마다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주일성수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건설구원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건설구원은 우리의 ‘언행심사’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느냐?’, ‘어떠한 행동을 실천하였느냐?’, ‘어떠한 마음을 품고 살아갔느냐?’, ‘어떠한 사상을 갖고서 살아갔느냐?’에 따라서 저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이 제각각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입게 될 의인의 부활시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건설구원의 정도에 따라서 받게 될 부활의 영광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생전에 이 건설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제가 믿고 바라기로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님들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의 아까운 힘과 열정과 물질을 허비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신령한 상급을 받기 위해서 건설구원에 모든 것을 헌신하시는 참으로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부활시에 입게 될 영광스러운 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라고 주장합니다. 셋째, 부활의 몸은 강한 몸이라고 주장합니다. 넷째,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여기에 반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육신은 어떻습니까? 첫째, 썩을 몸입니다. 둘째, 욕된 몸입니다. 셋째, 약한 몸입니다. 넷째, 육의 몸입니다. 사실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약한 존재입니까?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몸이 떨리고 감기가 걸리고, 이제는 날씨가 풀려서 기온이 올라가면 몸에 땀이 나고 온 전신이 나른해지기가 십상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신은 조그마한 기온의 변화에도 잘 대처하지 못하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을 때에는 신령한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하고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우리가 변하게 된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썩을 몸으로 심어 영원히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며, 욕된 몸을 심어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며, 약한 몸을 심어 강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며, 육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멀리는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가까이는 부모님으로부터 이 육신의 몸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을 받게 되었습니다.

3. 육의 몸을 심으라

  따라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육의 몸을 입어야만 하고, 이 육의 몸을 이 땅에 심어야만 바로 그 사람이 신령한 존재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신령한 몸에 대하여 ‘아하, 우리가 유령처럼 영적인 존재로 변하는구나!’라고 오해를 하십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는 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살과 뼈를 가진 존재입니다. 신령한 몸도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떡과 생선을 드신 것처럼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변한 우리들도 그와 똑같이 어떠한 음식이든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참다운 평화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잘 먹고 잘 사는 유토피아를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육의 몸을 심어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때에 큰 영광을 얻기 위한 삶을 살아가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여러분이 들어 온 이 교리적인 내용이 여러분의 실제적인 삶과 얼마나 중요한 관계가 있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한 마디의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심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썩을 몸으로 심어야 영원히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욕된 몸을 심어야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약한 몸을 심어야 강한 몸으로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육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심으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심으라!’는 동사가 내포하고 있는 세 가지 의미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심는다는 것은 ‘내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농사를 짓는 농부가 씨앗이 아까워서 땅에 심지 아니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거름을 잘 주고 물을 잘 준다고 할지라도 씨앗이 심겨지지 않은 땅에서는 어떠한 열매도 거둘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 안에다가 고이 모셔 놓은 씨앗도 언젠가는 그냥 썩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가 씨앗을 자신의 밭에다가 잘 심으면 놀라운 열매를 틀림없이 거두게 됩니다. 심겨진 씨앗은 금새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나고 잎이 나서 나중에는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가 현재 저마다 소유하고 있는 씨앗은 썩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어도 썩고 남을 위해서 내어 놓아도 그것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우리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간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쁨으로 내어 놓을 때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심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반드시 풍성한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제 선교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큰 병원의 원장님으로 일하시면서 세상적으로 큰 출세를 하셨습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도 큰 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중국의 의료선교사로 떠나셨습니다. 특별히 이 선교사님은 중국의 나환자를 위해서 병원을 세우고 열심히 의료선교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니, 선교사님 왜 한국의 안정된 직업과 명예를 포기하시고 중국의 선교사로 가셔서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선교사님께는 “예, 목사님, 저는 천국의 영광을 위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편안하게 병원 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선교사님처럼 천국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이 땅에서 열심히 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열정과 물질과 생명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내어 놓기를 원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크신 상급으로 반드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이 땅에서 심는 것만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순간에 큰 상급으로 나타난다는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심는 것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심는 것만이 영원한 보상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심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날마다 책을 보면서 깊이 연구를 합니다. 어떤 씨앗이 많은 열매를 거두는지 연구합니다. 어떻게 물과 거름을 주어야만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농부는 이론적으로만 연구를 많이 했지 그 땅에 하나의 씨앗도 심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네, 그렇습니다. 남들은 많은 곡식을 추수할 때에 이 농부는 조금의 수확도 거둘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천독을 했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전부 다 암송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되지 아니하며 조금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단지 자신의 지식만을 조금 늘려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에 깨달은 은혜가 있으면 그 즉시 실천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는 무시로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우리의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시대의 다리오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살았던 다니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간사한 신하들의 간청으로 다리오 왕은 어인을 찍힌 금령을 선포하여 그 누구도 왕 이외에 어떠한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신에게 기도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겠노라고 하는 강력한 금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늘 해왔던 것처럼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왕에게 고자질하였고 결국 그는 사자굴에 던져지는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실천적인 믿음과 희생의 삶을 보시고 사자의 입을 막으사 무사히 사자굴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을 참소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 사자들의 입속으로 던져 넣으셨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는 것을 실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축복의 역사가 틀림없이 임하게 된다는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현세에서도 축복이요 저 영원한 내세에서는 영원히 썩지 아니할 신령한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남구에 있는 독거노인들에게 정성스럽게 반찬을 마련하여 매 주마다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반찬이 맛이 있는지 드시는 분들마다 다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리고 청년처에서도 노숙자들을 위해서 이불과 옷을 제공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지속적으로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행동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실천을 통하여 보여주는 지극히 고귀하고도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귀한 사역에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앞으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거둘 것이 없는 초라한 신앙생활임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심는다는 것은 양자간에 바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씨앗을 임의대로 심을 수도 있고, 반대로 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떠한 제한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기본구원을 얻고 힘써 건설구원을 이루기를 원하는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은 반드시 이 땅의 것들을 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세상의 욕심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심는 삶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심는 일을 선택하면 세상적으로 큰 손해가 생길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들도 다 떠나갈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어떠한 즐거움도 없고 고리타분하고 재미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엄청난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심는 것을 선택하는 자에게는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의 신령한 상급이 쏟아 부어 질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날 동안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심는 일을 항상 선택하셔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사도 바울처럼 영원한 상급을 풍성히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결론)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연약한 육의 몸에도 하나님께서는 저마다 각각의 영광을 내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벌이라는 영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출중한 외모의 영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막대한 물질의 영광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각각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의 영광이 그대로 하늘의 신령한 영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땅에서 가장 막강한 대통령의 권세를 소유한 사람도 저 천국에 가서는 대통령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영광과 저 하늘나라의 영광을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심는 자에게만 천국의 영광으로 나타난다는 진리를 깨달으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육의 몸을 심어야만 신령한 몸의 영광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교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는 삶을 살아가리라고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많이 심는 자만이 궁극적으로 풍성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오늘 진리의 말씀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  저는 이제 갈라디아서 6장 7-8절의 말씀을 통하여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한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대원리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될 것이며, 영생을 위하여 심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남은 인생을 저 영원한 삶을 위하여 심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천국의 상급을 한없이 누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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