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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는 길과 사는 길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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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말 중에 가장 절망적인 말이 있다면 ‘당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십시오.’라는 말일 것입니다. 일생에 한번은 듣게 될 이 말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미국의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박사는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약 200명의 죽어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보통 처음에는 부정을 한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으니 다시 한번 검사해 보라고 하다가 당신이 의사가 맞느냐고 따지기 까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된 겁니다. 난 더 오래 살고 싶습니다.’하며 희망이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입니다. 이때는 누구와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 단계는 타협의 단계입니다. 다시 한번 건강과 생명이 주어진다면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노라고, 하나님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보겠노라고 하며 하나님과 타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도 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네 번째로 우울의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 슬픔을 느낍니다. 세상에서 성취해온 모든 것, 맺어온 모든 관계를 이제는 전부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낙담하여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이 단계를 지나 다섯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죽음 앞에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정말 죽는구나.’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리 길지 않은 약간의 평온의 시기를 갖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도 남은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마지막을 보냅니다.

죽음은 아무리 포장한다 해도 아름다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것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식물인간이 된 사람을 문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종종 그런 분들을 찾아가 기도해드릴 일이 있습니다. 기계에만 의지해서 살아있지만 아무 반응도 움직임도 없는, 언제 죽을지 모르나 또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사람 곁에서 환자를 바라보는 식구들의 마음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 하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 결론 없는 깊은 갈등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 들어서는 안 될 마지막 선고를 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런 선고를 받은 사데 교회는 대체 어떤 교회였을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렇게 선고하실 만큼 절망적인 교회였을까요? 그러나 역사적인 정황을 보고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사데 교회의 모습은 주님의 선고와는 전혀 다른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트몰루스 산봉우리에 세워져 있는 사데 지방의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절망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삼면이 450m의 절벽이고 남편으로만 통로가 나 있어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농산물이 풍성하고 교역이 활발한데다 사금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있던 사데 교회는 여유와 평화로움을 누리는 교회였습니다. 이단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교회의 분쟁도 없었습니다.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즐겁고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여느 교회보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잘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데 교회에게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 살아있는 교회라는 말은 다른 교회로부터 들어온 평일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정말 살아있는 교회야. 참, 굉장하고 부러운 교회야.’ 등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데는 부를 누리다가 서서히 후퇴해서 주후 17년에 지진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교회를 보시고 뭐라 말씀하실까요? 다른 교회로부터 우리 동안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 평하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유한 교회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예산이 어려운 교회가 종종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며 재정을 좀 지원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잘 되고 있다고 신문에도 나고, 다른 교회에서 배우러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죽어가는 교회는 아닐까요? 남들이 볼 때는 활동이 왕성하고 살아있다는 말을 듣는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보실 때는 죽어가고 있는 교회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근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로 보신 이유는 본문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 말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말하고 일곱별은 교회를 말합니다. 동시에 일곱 영과 일곱별을 보이신 것은 교회는 바로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할 때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는 굳이 오늘의 본문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시작되는  1장 4절에서도 성령의 통치를 받지 않는 교회는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는 영혼 없는 배우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마음이 없고,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행위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며, 올바른 신념은 있지만 행위는 존경할 만한 것이 없는 교회라고 말입니다. 경직된 교리가 있고 외형적 예절은 있지만 사랑은 없고 그리스도 자신은 정작 교회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결혼반지는 끼고 다니지만 다른 이성을 만나고 다니며 마음은 다른데 둔 사람과 마찬가지 모습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4절 말씀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교회를 조직하시고 주님의 사역을 대신하는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고 교회를 통해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고자 하셨지만, 누가복음 말씀과 같이 교회 안에 주님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성령과 관계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활동과 생명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현재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죽은 가지인 것처럼 하나님과 또 성령과 교제하지 않고, 성령의 뜻에 따르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은 활동은 활동과 상관없이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름대로 내는 열심은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열심이 있다는 점이 본질적으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데 교회 안에도 좋은 교훈이 있었고 좋은 회중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건축물과 인격적이고도 사회적으로 명성을 가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있던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를 향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성령과 관계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들 중 성령과 관계없이 열심히 일했던 교회가 몇 교회 있었습니다. 먼저 살펴보았던 버가모 교회의 경우 ‘편하게 믿자’는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뜻보다 편하게 믿자는 주의였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버가모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었습니다. 또한 두아디라 교회는 음행을 용납함으로 교회 본질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부분들로 교회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전체를 두고 죽어간다는 평을 들은 사데 교회는 바로 교회 조직 속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4절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의 조직 속에 이미 사단의 깊은 것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교훈이 교회에 들어오면 신앙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이 분별해서 신앙을 지켜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도 안에 사탄의 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교회 전체 흐름이 부패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 성장도 없고 생명력도 없어집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는 일도,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하는 도전도 없어지며 하나님의 뜻을 위한 헌신도 사라집니다. 복음을 증거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아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명도 느끼지 못하고 교회와도 도전 받지 못하며 교회 와서 자신의 가려운 데만 긁고 가는,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된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잘못된 제도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가장 핵심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둘째는 제잠 삼으셔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실 때에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교회는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선포되고 사람들은 말씀으로 훈련되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하며, 성도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증거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자꾸 넓혀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일입니다.

교회 본질을 위해 말씀 전하는 사역자로 목사가 세워진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과 교회를 위해 존재합니다. 목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들 중에 목사가 교회의 주인인 냥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강조하고 말씀을 계속 선포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복음의 확신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 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한 희망과 생명, 의와 희락이 넘치도록 계속해서 공급하는 역할을 하며 헌신하는 일이 바로 목사가 할 일입니다. 성도들 삶 속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 목사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장로 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를 세우는 이유는 약하고 어려운 교인을 돌보게 하고, 교인들의 행실을 감독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도록 하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장로는 교회 안팎을 돌보고 섬김으로 성도들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장로직은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신앙의 연륜으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남다른 공헌이 있다고 해서 명예로 주는 직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듣는 분들이 장로로 서지 않는다면 오히려 교회 조직의 중심에 서서 교회 전체에 성령께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를 타락시키는 큰 원인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권사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를 위한 직분인데 교회 출석을 잘 한다고 해서 또는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임명한다면 참된 섬김과 봉사의 정신은 변질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성령이 교회에서 떠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어떤 제도든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누구를 세워야 할 것인가, 언제 세워야 할 것인가, 몇 명이나 세워야 할 것 인가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목적 앞에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일에 누가 합당하며 누가 그 일에 기쁘게 헌신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것을 놓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나님 뜻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로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직분은 명예직이 절대 아닙니다. 권위직도, 일꾼자리도 아닌 섬김의 자리, 헌신의 자리, 겸손의 자리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움직이시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직분과 관련한 문제는 오늘날 세계교회와 한국 교회가 타락하게 된 아주 큰 이유이면서, 사탄이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여기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이 문제로부터 탈피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많은 어려움들 중에서도 특히 직분과 관련되어 감정이 상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바로 정립 되지 않아서 엉뚱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의 분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을 얼마나 민감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의 문제이며 이런 사람이 세워지지 않으면 사탄의 뜻대로 움직이는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래된 관습과 제도입니다. 무엇이든지 오래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생깁니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남들보다 잘 하게 되고 잘 알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 섬김의 마음 대신 판단하는 마음과 자기 의가 생기게 됩니다. 습관이 처음부터 어떤 의도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래 생각과는 달리 본질 대신 자기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보다는 내 경험을 의지하게 되고, 내 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믿음의 교제 보다는 일의 교제가 앞서게 됩니다.

사데 교회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는 취약한 부분 때문이 아닙니다. 삼면이 450m의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초를 잘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적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절벽을 타고 올라와 사데 지방을 점령한 것입니다. 가장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 익숙해져 습관으로 정착 되었던 부분들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습관이 되면, 신앙생활도 헌금도 기도도 습관이 되면 가장 아름답고 익숙하던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타락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번역된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려지는 A.W.토저 목사님의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을 보면 바로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가는 성령을 떠난 사데 교회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 지배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과의 교제에서 떠난 사람은 과거에 매우 집착합니다. 전통에 집착합니다. 현재 생활에 대한 형식은 있지만 형식을 채울 수 있는 생명의 필요를 채우지 못합니다. 나아가 미래의 비전을 상실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인 가치 판단으로 미래를 새롭게 열어 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육체의 안락함과 인간의 짧은 지식에 안주하여 결국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이름과 더불어 아버지로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까? 어머니라는 이름과 더불어 어머니로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까? 그리고 직분자의 이름과 함께 본질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마음이 없다면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어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도전의식도 없이 변화도 거부하며, 자기생각과 기준에 맞춰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성령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다시 죽은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외치고 계십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절규입니다. 형식주의와 자기기만에서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꼭 붙들어야할 가치를 더욱 굳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어떻게 복음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라 말씀하십니다. 내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키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교역자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이를 한 장씩 내어 조금은 부끄럽지만 서로에게 고백하고 싶은 내용들을 적었습니다. 교회의 비전,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교회가 가져야 할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도 적어보자 했습니다. 그리고 섬기고 있는 구역과 구역장들의 이름, 담당하고 있는 부서와 섬기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보자 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를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신 이들의 이름, 금년 들어 우리 교회에 등록해서 자신의 교구에 들어온 새 신자 이름을 적어보자 했습니다. 중간 중간 비어 있는 이름들, 우리는 다 적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빈 영성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예배에 가장 소홀했던 모습, 섬긴다며 수 없이 심방을 다니면서도 마음에 중심을 가지고 섬기지 못했던 모습, 사랑한다고 얘기하면서도 일로 여겼던 우리들의 나약하고 어쩌면 위선적이기까지 한 모습들. 구멍 뚫린 빈 칸에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졌던 것이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저도 그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결의했습니다. 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결심하여 순서를 짜서 토요일 마다 주일예배와 선포될 말씀과 성도들을 위해 어느 곳에서든 세 번 제단을 쌓기로 하고 어제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졌던 일들에서 우리의 빈 영성과 깨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름은 살아있지만 주님 보시기에 죽어가고 있는 교회는 아닙니까. 이름은 있지만 죽어가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이름은 있지만 죽어가고 있는 여러분의 위치는 아닐까요. 그렇다면 성령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오늘 나가십시다. 사랑의 고백과 함께 우리를 부르시고 회복시키시고, 일깨워주시는 그 분 앞에 모든 것을 올려드리며 다시금 회복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오늘 예배와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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