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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하지 말라 (마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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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약선 목사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좀 모자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인간들 중에는 남을 비판할 만한 자격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판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비판은 옳고 그름을 검증하여 평가하는 것! 이렇게 써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판은 옳고 그름을 검토해서 평가하는 것이 비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에 나오는 비판이라는 말은 거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옳고, 그름을 검토하여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인간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을 평가하여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은 남을 정죄할 만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남을 정죄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를들면 재판관이 재판을 하는 것은 비판이 아닙니다.
죄를 정하는 것은 법에 따라 하는 것이니까 이 말씀에 해당이 안됩니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나는 완전한 인간처럼 어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까지 한다면 그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비판과 충고는 그 모양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충고는 충고하는 사람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똑같은 말도 사랑으로 하는 말과 사랑 없이 하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충고는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비판과 정죄는 상대방이 망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누구도 남을 평가하고, 정죄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충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충고의 예를 들면,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이 충고입니다.
거슬리게 들려도 잘 들으세요! 그것은 충고입니다.
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은 사랑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내 자식이 잘되기를 원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는 것은 충고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도 충고입니다
어떤 선생님이 자기 제자들이 망하는 것을 좋아할 선생님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하는 말도 충고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에 수많은 교인이 있지만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사람도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더 잘 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잘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혹 내 마음에 아픔이 있어도 이것은 충고구나 그렇게 들으세요!

비판하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정죄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다!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보여지는 것이 자기의 본 모습입니다
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남을 정죄할 틈이 없습니다.
먼저 나의 모습이 보여지니까..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남을 평가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 합니다. 비판을 좋아하고, 남을 정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마귀에 사로잡힌 자가 남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마귀는 아름다운 사이를 깨뜨리고, 서로 싸우게 하고, 이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정신적인 큰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무서운 질병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비판하는 병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원수고 다 망해야되고, 모두 정죄를 합니다.
내 편은 모두 옳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모두 적이고........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정신이 황폐해집니다. 그 마음이 사막같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손가락질하며, 너는 망해야되고, 내 편 아니면 다 나쁜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정죄와 잘못된 비판이 오늘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인들도 그 말속에 보면 독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사막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마음이 사막처럼 삭막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막에 아무리 주일날 와서 하나님의 말씀 좋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싹을 내지 못합니다. 소용없습니다.
사막에 아무리 좋은 나무를 심어보세요! 그냥 말라 죽습니다
마음이 사막처럼 되고 있습니다. 황폐화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을 안합니다

비판하면 비판을 받습니다.
나는 비판해도 나는 비판을 안받을 거야..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받는다고 하시면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면, 너도 똑같은 정죄를 받느니라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흠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정죄할 만큼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평가하여 정죄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50보, 100보라는 말이 있지요?
도망을 가는데.. 어떤 사람은 오십 발자국을 도망을 갔고, 어떤 사람은 백 발자국을 도망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십 발자국을 도망간 사람이 백 발자국 도망간 사람에게 비겁한 놈이라고 나무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이죠.. 누가 누구를 나무랍니까?
너는 나보다 많이 먹었으니까 나쁜 놈이고, 나는 너 보다 조금 먹었으니까 나는 괜찮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둘 다 도둑놈이죠......
요즘 우리나라는 서로 손가락질을 합니다. 안됩니다. 여러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을 못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네가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 사람은 이미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사람은 이미 자기의 눈에는 들보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것을 깨달은 은혜 받은 사람은 절대 남의 눈의 티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내가 저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면, 그 사람이 비판받고 정죄 받을 그 죄보다 이미 나는 더 큰 죄를 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착각을 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고 남을 정죄하면 자기가 올라가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남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를 하면 나는 점점 옳은 사람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남을 정죄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이미 네가 남을 정죄하느냐? 그 사람의 죄가 티끌이라면 네 죄는 들보다!
남을 정죄하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절대로 정죄하는 죄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 검증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지혜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정죄까지 하면 그것은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제일 먼저 내 모습이 보이니까 그 사람은 남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 문제가 더 크니까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을 보세요! 아기와 같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은혜를 넘치게 받으니까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그가 우리보다 죄를 더 많이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발꿈치도 못 따라갈 정도입니다.
그는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자기 자신이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이 날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모자란 사람들이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들이 남의 눈에 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유행병이 오늘 한국을 지금 썩게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어른들은 아이들을 향해, 아이들은 어른들을 향해, 동과 서가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입니다. 무조건 정죄하고, 무조건 비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 편은 옳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오늘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사람은 두 가지 잣대를 가지고 삽니다. 하나는 작은 것! 하나는 큰 것!
작은 것 가지고는 자기를 잽니다. 남을 잴 때는 큰 잣대를 들이 댑니다.
똑같은 잘못을 했는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작은 잣대를 대면서 이것은 죄가 아니고, 어쩔수 없이 그랬다고 합니다.
얼마나 관대한지.. 얼마나 이해심이 많은지... 얼마나 양보심이 많은지....... 자기를 위해서는
그런데 똑같은 잘못을 남이 저질렀을 때는 큰 잣대를 들이 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혹한지, 얼마나 무자비한지.. 얼마나 매정한지....
오늘 이것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인간에 대해서 전체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이 저를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아는 것도 아주 작은 부분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작은 부분만 보고 그 전체를 함부로 정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은 세상에는 없고,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왜 은혜를 못받느냐?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무덤덤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왜 시험을 받느냐? 오늘 이 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이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들려주신 산상복음입니다.
보화와 같이 귀한 말씀중의 한 대목입니다.
이것을 해결 못하면 여러분은 아무리 와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자신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도 저 사람은 잘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바리새인입니다.
한사람은 자기 자신도 나는 하나님 앞에 잘못 믿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도 저 사람은 죄인이라고 취급받았던 세리입니다.
두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모습도 다르지요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얼굴도 감히 들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더니 어떻게 하는고 하니... 서서 따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생각에는 나는 저런 죄인들과는 같이 섞이면 안 되는 사람! 나는 훌륭한 사람!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나는 저런 사람과는 다르고,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교회 안에서도 서서 따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자란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즉,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는 갖지 않습니다. 또 그 다음에 아주 날카로운 말을 합니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마음속에는 이 세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났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라가야 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고하니,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하다는 남들과 다르다는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맞다! 네가 저 사람들과는 뭐가 나은지는 몰라도 네가 인간으로써, 불쌍한 세리를 저주하고, 정죄하는 그것을 보니까 너는 틀렸다! 세리가 가진 죄가 눈에 티끌이라면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갖고 남을 무시하는 네 죄는 눈의 들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리의 기도는 들으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절하셨습니다.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늘 두 가지 잣대를 가지고 봅니다. 자기에게는 얼마나 관대한지....
거꾸로 해야 합니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철저해야 됩니다.
그 말을 어떤 분은 자기에 대해서는 검사가 되고, 남에 대해서는 변호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죄를 밝히는 검사가 내 자신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적게 해주려고 변호하고, 덮어주는 변호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변호사이고, 남에 대해서는 검사입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은혜를 못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제부터 남을 볼 때, 좋은 점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이 눈은 죄인의 눈이라, 나쁜 것이 더 잘 들어옵니다.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잘 들어옵니다.
종이에 검은 점이 있다면, 종이보다는 검은 점이 눈에 확 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좋은 점이 많은 사람도 단점이 하나 있으면 그 것이 눈에 확 들어와서 그 사람을 평가를 합니다.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남들의 좋은 점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남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죄하지 마세요! 정죄하면, 그 죄가 나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돌아온다고 하면 돌아오는 것입니다. 틀림 없습니다
어떤 정치가가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은 모르고, 남의 아버지의 일을 보고 이야기를 많이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남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말고, 장점을 이야기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은 죄인의 입이라, 남을 칭찬하는 것은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이 모자랍니다. 밤새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습니다
또 이런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참 좋은 분이에요.. 그러면 그냥 듣고 넘어가지.. 그런데요?
이렇게 꼭 토를 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에게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잖아요? 늘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다보니까 제 눈에 늘 우리 교인들의 단점을 고쳐줘야되지..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기니까 말을 하다보면 내 자신도 정죄를 하게 됩니다. 말에 독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러면 안되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 뭡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정죄하는 그 사람은 외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외식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고하니,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 겉을 하얀 회를 발라놓았으니까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속에 들어 가보면 시체가 썩는 냄새가 가득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큰 소리로 남을 헤하는 사람!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보면, 지적하는 그 죄보다 더 무서운 썩은 냄새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그릇의 겉만 닦는 자라고 합니다.
음식은 안에 담아 먹는 것인데... 겉만 닦으면 더러운 것은 다 입속으로 들어가잖아요?
외식하는 자는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작은 하루살이도 건져내면서, 사람이 없을때는 약대도 꿀꺽 꿀꺽 삼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꼭 알아야합니다
내가 남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남을 칭찬하는 마음이 자꾸 내 마음에 생기면 내 마음이 물댄 동산처럼 아름다워집니다
그런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믿음의 꽃도 피고, 열매도 맺힙니다.
그러나 언제나 날카롭고 남을 비판하고 남을 정죄하는 마음은 사막 같아서 무엇을 뿌려도 안됩니다. 결국 자기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장점,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많이 보입니다.
비판의 안경을 쓰고 보면, 여러분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인간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인간은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두꺼운 성경책 어느 한 구절에 사람을 정죄해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잣대를 다 버리고 성경이라는 잣대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잘 잘못을 평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의 잣대로 재어보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성경말씀에 너는 틀렸다..? 너는 맞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정죄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마음이 삭막해집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왜 사막처럼 변합니까?
왜 서로 싸우기만 합니까?
정말 공통점은 없는 것입니까?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우리나라는 온통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하지 말고, 정말 우리는 충고는 할지언정 비판은 하지 마세요!
그래서 먼저 그렇게 하므로 내 마음이 물댄 동산처럼 아름다워져야 은혜의 꽃이 피고, 믿음의 열매가 맺고, 축복이 가득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부드러운 아름다운 동산처럼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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