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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너 있다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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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를 품고 삽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존재하는 거죠. 해서 우린 먼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 안에 나 있다!> 그런데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평상시에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면, 대개는 깜짝 놀랍니다. 더러는 기뻐하기도 합니다.

깜짝 놀라는 경우는,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매우 부정적인 경우요, 기쁘고 즐거운 경우는,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매우 긍정적인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내가 보아도 내 안의 내가 걱정스러운 경우요, 후자는 내가 보아도 내 안의 내가 자랑스러운 경우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요한 사실은, 내 안의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또 다른 <나>와 내가 갈등하고 반목하는 경우입니다.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깊어지면 결국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분들, 평생 내 안의 <나>하고만 씨름하며 삽니다. 내 안의 <나>와 싸우느라, 언제 가족이나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내 안의 <나>하고 싸우는 일에 몰두하느라, 언제 주님을 돌아보고 그 말씀 실천할까?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해서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나와 또 다른 내가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또 다른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나를, 내가 사랑하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설령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일단 사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그 모습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영접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 2>
사도 바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옛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에 화목을 이루는 첩경이요,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말씀, 직접 확인하고 갑니다. 요즘 새벽제단에서 은혜 나누는 중이지요. 로마서 6장으로 갑니다. / 로마 6:6-7 / (읽기)

거기 6절을 보니, 아예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완료형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과입니다. 이젠 죄의 종에서 의로운 사람, 곧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한 것이지요. 그런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 하시는 말씀, <내 안에 너 있다!> 아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다시 바울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 롬 6:4 / (읽기) / 답은 세례였습니다. 세례란 바로 옛 사람의 장례식입니다. 그러므로 형식논리상으로만 보자면, 세례교인만 되어도 나는 더 이상 옛 사람, 곧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울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이미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냈기 때문입니다. 난 이제 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례까지 받아 놓고 여전히 옛 사람 죽이지 못해 고생하는 분들이 상당수 계십니다. 그리고는 내 안의 나와 싸우느라 평생을 허비합니다. 옛 사람의 잘못된 습관 하나 바꾸지 못하고, 끊어야 할 것 끊어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우물쭈물 살아갑니다. 아니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벌써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옛 사람, 더 이상 그리워하지 말고, 이젠 새 인생을 살아보라는 겁니다. 여러분, 옛 사람은 살려 두는 것 아닙니다. 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이 바도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의 또 다른 <나>뿐 아니라, 주님 만나기 이전의 <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 직접 들어봅니다. / 빌립보 3:7-9 / 이전의 나, 곧 옛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는 겁니다. 왜?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나와 질적으로 다른 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마침내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너 있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데요, 직접 들어봅니다. / 1:21 / (읽기) / 아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3>
이렇게 해서 오늘 주신 본문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빌립보서 2장 1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싶습니다. / 2:18 / (읽기) / 거기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대목에 표시하시지요. 매우 중요한 말씀인데요, 기뻐하되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사도 바울도 너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시는군요. 그러므로 나도 기뻐하되 너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도 기뻐하되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요,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이 편지가 옥중 서신이란 뜻인데요, 감옥에 갇힌 사람,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기뻐할 처지가 아닐진대, 무에 그리 기쁜 일이 있어,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 너희도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걸까? 정말 믿음 없이는 받기 힘든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조차 힘겨운 말씀입니다. <혹시 돌았나?> 세상의 반응입니다.

왜 기뻐하라 하셨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안의 당신 때문에 기쁘고, 당신 안의 나 때문에 기쁘고, 해서 기뻐하고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장 12절의 맨 끝 문장을 보니,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시고, 18절의 맨 끝 문장을 보니,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하십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나와 함께 기뻐하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이루는 일, 곧 당신과 함께 기뻐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기뻐하는 일이 곧 구원을 이루는 일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과 기쁨, 기쁨과 구원은 서로 통합니다. 구원을 얻으면 기쁨이 넘치게 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린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 항상 기쁨으로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자신이 없는 사람, 기뻐하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죽겠다는 말만 합니다. 아니오, 그런 것 아닙니다. 구원 받은 성도,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주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다 놀라는 기쁨으로 마침내 그의 삶을 승리로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기쁨으로 통합니다.

<# 4>

다시 빌립보서 2장 18절을 보실까요?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사도 바울! 기뻐하는 주체는? 빌립도 교회 성도들! 그러므로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말씀, 요즘 말로 하자면, <너 안에 나 있게 해 주어 함께 기뻐하자!>는 겁니다. 이미 내 안엔 <너>가 있어 지금 내가 무척 기쁘니, 이젠 네 차례다, 너 안에 나 있게 해 주어 함께 기뻐하자는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밀어 넣고 압축한 표현이, 바로 최근에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하는 인사말, <내 안에 너 있다!> 입니다. 이쯤해서 우리도 한번 용기를 내어 옆의 분에게 고백해 보실까요?

<내 안에 너 있다!>

(이 고백을 할 때 주의할 점이 있더군요. 매우 중요한 건데요, 이 고백을 하는 내가 먼저 흥분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흥분은 금물입니다. 그저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밥 먹자!> 하고 제안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한번 고백해 볼까요? 시작!)

<내 안에 너 있다!> / <내 안에 당신이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요구는 나와 함께 기뻐하자는 겁니다. 너 안에 나 좀 받아주고, 그래서 우리 함께 기뻐하자는 겁니다. 바울이 이렇게 과감한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내 안에 너 있으면 얼마나 기쁜지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바울은 내 안에 너 있어 행복했던 인물입니다. 내 안에 주님 계셔 무서울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내 안에 너 있어, 그 모든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 속에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해서 오늘 자신 있게 말하는 중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 곧 나 너에게로 들어가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안에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내 마음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는 한, <너>는 내 안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가야 당신을 내 안에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너 있다>는 고백, <나 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는 고백에 다름 아닙니다. 난, 내 안에 들어온 <너>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고백입니다. 해서 우리 주님, 친구를 위하여 죽는 사랑, 가장 귀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허락하신 당신, 내 마음에 담아둔 당신, 보통 당신이 아니군요. 왜? 당신은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쁨의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바로 나에게 보내주신 기쁨의 천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 안에 너 있음은, 나에게 더 좋은 일이군요. 단, 잊지 말 것은 나는 당신 안에, 당신은 내 안에, 오직 기쁨으로 자리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렵사리 내 안의 <나>를 몰아내고 맞아들인 당신이, 오히려 애물단지요 화근이라면, 그런 당신, 내 안에 들이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다투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안의 <당신>과도 싸우지 말라야 합니다. 내 안의 당신, 기쁨과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너 있다!>고 말할 때, <너>는 주님이 내게 보내주신 기쁨의 천사입니다.

<# 5>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어떻게 해야, 내 안의 <너>있고, 너 안에 <나>있어, 서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의 천사가 되는 길이기도 한데요, 오늘 주신 말씀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여러 길이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 세 가지 길만 배우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복종하라!

2:12 / (읽기) / 내가, 내 안에 있는 <너>와 함께, 기쁨을 누리며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명령, 그건 항상 복종하라는 겁니다. 그것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복종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내 안에 영접한 당신을 향해 내가 취해야 하는 기본자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복종이란 단어를 싫어합니다. 내가 왜 복종해야 되는 거야? 그러다가 주님께 복종하는 일도 거부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향해 내 뜻에 복종해 주실 것을 강요합니다. 문제는 그런 인생들,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쁨이 없으니 행복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너> 있어도 기쁘지 못한 이유, 내가 <너>에게 복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같이 살아도, 서로 행복하지 못한 원인, 내가 먼저 복종하면 될 것을, <너>한테만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오, 그건 틀린 방법입니다. 내 안에 당신을 주심은, 내 안에 <너>를 주심은, 우선 복종하라는 명령입니다. 항상 복종하라!

해서 초심이 중요합니다. 첫 만나의 감격이 중요합니다. 그 땐 옷깃만 스쳐도 그렇게 마음이 설레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잖습니까? 그 땐 서로 쳐다보고 웃기만 해도 는데, 가슴이 쿵쾅거려 하루 종일 진정하느라 애를 먹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당신들이, 그랬던 너와 내가, 이젠 경외심이란 약에 쓰려고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젠 바라만 보아도 이가 갈리고,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해서 <내 안에 너 있다!>는 고백을 하려면, 먼저 당신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라 하신 것입니다. 서로 복종하여 마침내 기쁨 가운데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2:14 / (읽기) / 내 안의 <너>와 함께 기뻐하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두 번째 길, 그것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 원망이란 단어는 내가 혼자 투덜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먼저 불평하는 거죠. 문제는 이 원망이 내 안의 당신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원망이 쌓이니 사랑은 저만치 달아납니다. 원망하는 사람에게 복종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망이란 반드시 시비를 불러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나 홀로 투덜거리는 거지만, 시비란 두 사람이 함께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해서 시비를 걸다, 곧 싸움을 건다는 뜻인데요, 문제는 모든 시비가 내 마음의 원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요, 원망과 시비는 우리 사이의 기쁨을 깬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과 시비로는 내 안의 당신과 결코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당신>을 향해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당신에게 시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시비조로 말 걸지 마시고, 그저 좋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원망부터 하지 마시고, 범사에 감사하시고 또한 당신에게 칭찬만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과 시비로는 기쁨을 나눌 수도 없고, 구원으로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시비 대신, 감사와 칭찬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마침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흠이 없고 순전하여 빛으로 나타나라!

2:15 / (읽기) / 거기 <너희>라는 복수 2인칭 대명사에 표시하시지요. 그럼요, 나는 홀몸이 아닙니다. 내 안에 <너>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어, 우리 만들어 주심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의 빛이 되라 하시는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만남의 궁극적 목적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 교회의 이름도 동광, 곧 동녘의 빛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빛이 뒤기 위해서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흠이 있어 순전치 못한 것, 별 가치가 없습니다. 일단 흠이 난 보석, 그 빛을 바랩니다.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 해도 한 귀퉁이 작은 흠만 나도 내다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우리가 흠이 없어야 하고, 우리가 순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 홀로 흠이 없고 순전해서는 반쪽 자리 전구일 뿐입니다. 해서 서로 복종하며,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신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만남이 순전한 만남이 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거룩한 만남 속에 흠집이 생기기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인격, 우리의 육체까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아름다운 빛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빛은 빛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기 15절의 <빛>이란 단어, 공동번역 성경은, <하늘을 비추는 별 같은 빛>이라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빛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별은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바로 여기에 밤하늘의 별 같은 빛이 되라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을 비추는 별은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들의 벗입니다. 저 하늘의 외로운 별은 광야에서 양을 먹이는 목동들의 친구입니다. 또한 저 별은 실망과 좌절과 배신의 늪에 빠져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새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안내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진정한 스타는 빛이 되어주는 스타입니다. 자기 잘난 척 하는 스타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많은 이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스타, 바로 하늘이 낸 스타입니다. 그런 스타, 곧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16절의 마지막 구절,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내 안에 있는 너, 바로 나의 자랑이란 고백이지요. 부디 하늘이 낸 스타가 되시어 사랑하는 당신의 가슴에 별 빛으로 영원히 빛나시며, 우리 모두의 자랑이 되어 주시길 축원합니다.

<# 6>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이미 드린 말씀, 다시 정리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일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교회를 다녀가신 후로, 우리 동광가족들을 가슴에 품고, 서울 손님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매일 새벽 기도로 준비하는 별 같은 분들의 아름다운 편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충청북도 두평 교회, 문미연 전도사님, 보내온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동광 가족 여러분, 여기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가슴이 뜁니다.

풀벌레 합창소리에 가을이 성큼 다가옵니다. 하지만 잘 익은 포도들은 많은 비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다 터져버렸습니다. 농부들 가슴도 같이 터지는 순간이었지요.ㅠㅠ

그래도 올가을은 풍년입니다.^^ 작년, 재작년에 비하면, 그저 감사 또 감사지요. 장빈 목사님과 기도의 용사들께서 오신다기에 저희는 무엇으로 동광교회의 사랑을 보답 할꼬 고민하다가, 우선 특별새벽기도회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벌써 마음이 들떠 가슴 설레 하는 모습, 참으로 연애하는 동네처녀 같은 모습입니다^^하하하. 오시는 날, 맛있게 점심 진지를 차려 드리기 위해, 모여앉아 회의 아닌 회의들을 하는 모양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빈 목사님, 그리고 동광 가족 여러분, 지난 번, 두평 교회 어린 친구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맞아 주시고 섬겨주신 그 일들, 잊지 않겠습니다. 이곳은 농촌이요 시골이라, 대접할 만한 귀한 것도, 보여드릴 만한 대단한 것도 없지만, 오시는 분들과 동광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서 오십시오. 두 팔 벌려 환영하겠습니다. 동광교회 가족 여러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평교회 전도사 문미연 올립니다.

우리 주님, 오늘 우리에게, 나에게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너 있다!> 이 말씀 감사로 받으며, 오는 화요일엔, 동광을 대표해서 미리 신청하신 30분만 모시고, 두평 교회를 다녀오겠습니다. 더 많은 분 모시고 싶지만, 그 쪽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인원수를 제한한 점, 양해해 주시고, 기도로 동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빛을 들고 두평으로 향하는 우리 모두의 발걸음을 축복하시어, 우리 안에 주님 늘 계셔, 우리로 행복하게 해 주실 줄 믿으며, 마지막으로 부족한 종의 가슴 속에 사랑하는 여러분이 계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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