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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약할 그때에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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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배경이 있습니다.
존 번연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자들의 손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본시 대단히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감옥에 갇혀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속히 제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세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후12:9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변함 없이 족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 지긋지긋하게 여겨졌던 감옥 생활도 그에게는 천국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장장 12년동안 갇혀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자신이 말로 복음을 전할 때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쓴 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그는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더 크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신비한 영적인 체험도 했습니다. 셋째 하늘로 표현된 낙원, 곧 천국으로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령한 체험을 했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마치 사단의 사자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몹시도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시는 아마도 그의 안질, 곧 눈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바울은 시력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다멕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주 강한 빛이 그에게 비추어졌습니다. 그때문에 그는 사흘 동안이나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뒤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일로 인해서 시력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도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켜야 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가시는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기간을 정해 놓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가시를 저에게서 물리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가시가 제해지도록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고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하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을 은혜 가운데 얻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가시가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있는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생각을 하던 가시가 사실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그 가시를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그 가시의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시가 원인이 된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믿음으로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저런 가시로 인해서 우리가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낙심을 해 버립니다. 좌절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인생의 실패자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무턱대고 염려부터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르켜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4:6∼7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염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일 뿐입니다. 시50:15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축복된 계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염려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말고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나와서 아뢸 수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크게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경우입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뜨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보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동안이나 병들어서 누워있던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병 낫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12년동안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병 낫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원하는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큰 은혜 가운데 가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고난의 잔을 옮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북돋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응답하시는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세 번 간절히 기도하고 난 뒤에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즐겨 순종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옛날 영국에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친구들의 눈동자는 다 파란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자기의 눈동자만 갈색이었습니다. 소녀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문제 때문에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소녀는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눈동자도 친구들처럼 파란색이 되기를 원합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대를 가지고 맨 먼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눈동자 색깔을 확인했습니다.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많이 낙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도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인도의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파란 눈동자의 사람을 보면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은 갈색이었습니다. 인도 사람의 옷을 입고 인도 사람처럼 치장을 하면 영락없이 인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사람을 사귈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쉽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받는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혜롭지 못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를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가장 좋은 응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울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수로 우리의 갈한 심령을 언제나 촉촉하게 적시어 주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염려하지도 말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도 들지말고 사도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바울에게서 육체의 가시가 제하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큰 은혜를 받아서 그 가시를 이겨내는 힘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가 자기에는 주는 유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의미 없는 가시를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하실 때는 그 가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시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지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해졌을 때 다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그러면서 절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마련입니다. 탕자가 그러했습니다. 강할 때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약해졌을 때에 다시 두 손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서 금의 환향을 합니다. 강해졌을 때입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서 자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그때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얍복 강변에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밤이 맟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자신이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항복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형 에서와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육적인 야곱이 변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승리자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가시를 허락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시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천국으로 이끌려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그는 교만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겪었던 신비한 체험을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2: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무익하나마."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신비스러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겸손하게 "무익하나마"라는 단어로 시작을 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을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여기서 말하는 "그"라고 지칭한 3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르키는 것입니까?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신비한 체험을 했지만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가 싫어서 "그"라고 하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2절 하반부입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면서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만 높이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놀라운 천국의 광경을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것을 들었다, 내가 이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셔서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그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가시로 약해졌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흙이 단단해서는 그릇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흙에 물이 들어가서 그 흙이 진흙처럼 부드러워져야 그릇을 제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쇠로 연장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쇠가 단단해서는 연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불에 달구어져서 쇠가 부드러워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연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단단해져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찌릅니다. 온유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그때가 우리는 강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져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찌르는 가시의 의미가 무엇인가, 가시가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오히려 기뻐하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가시 자체가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힙니다. 못살게 굽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 가시를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 고통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의 성숙한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조개 두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조개가 옆에 있는 조개에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기에게 있는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아마도 내 몸 속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이 아파."
그러자 다른 조개가 뽐내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과 바다에 찬미 있어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너무나도 건강해. 내 몸 속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곁을 지나가던 게 한 마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게는 아픔을 호소하는 조개에게 다가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네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은 너의 몸 속에 진주라고 하는 보석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드러운 조갯살 속에 깔깔한 모래알이 하나 박힙니다. 그때 조개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육체의 가시입니다. 조개는 고통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짜냅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계속해서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생명의 즙을 짜내고 또 짜내어서 그 깔깔한 모래를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찌릅니까? 우리는 진주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값진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는데 왜 우리에겐들 가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중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성적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업을 잘하는 사람도 때로는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도 때로는 가시와 같은 존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가룟 유다와 같은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정리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그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가시로 인해 약해졌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쉽게 좌절해 버립니다. 때로는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가시가 우리를 찌를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족한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가시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리어 자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그 가시를 제해 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나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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