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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의 축복된 미래를 꿈꾸며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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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대근 목사

오늘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9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아직도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고 단언하기에는 많은 갈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친일 청산’의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아직도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전반에 걸쳐 친일의 잔재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한국교회는 앞장서서 기도하며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힘써서 노력했던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한국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여 명맥을 유지해 온 친일의 잔재들과 그 죄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금요일 기독교방송국(CBS)에서는 한국교회의 친일문제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영했습니다. 제작진은 과거 일제시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등에 앞장섰던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제작편찬중인 ‘친일인명사전’과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한 조사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죄책 고백과 회개의 목소리가 한국 교회의 이름을 걸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친일 부역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큰 어른들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제작진은 일본 기독교회가 1967년 파시즘을 찬양하고 범죄적인 전쟁을 지지한 과거를 교단 차원에서 회개하고 사죄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과거사 죄책 고백의 아주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부분을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과거사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과거사의 문제를 파헤치고 들추어내서 싸우고 다투기 전에,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고민과 결단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수준은 그 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민족을 대표하는 종교는 기독교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나라의 낡은 정치와 타락한 관료사회, 그리고 희망 없는 나라 경제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현실이나, 세대간, 계층간에 서로 질시하고 반목하고 갈등하고 있는 모습은 바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수준이라고 하는 영적 각성과 함께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책임 있게 오늘의 현실에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청산보다 더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민에 해답을 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으로 정의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關心)이고, 우리를 택하신 이유(理由)요,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명(使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세 가지의 관점을 통해 이 민족의 축복된 미래를 열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세상을 사랑할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실 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세상은 타락한 곳입니다. 죄가 있는 곳입니다. 악하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는 곳이 세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이 세상은 끊임없이 죄악의 역사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부패하고 썩은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은 피해야 하는 곳으로 여겨 멀리하고 세상을 부정하면서 오직 교회 안에서 거룩하게 살면 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 모이는 교회만 성도만 사랑하는 줄만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미워하고 저주받을 곳으로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여기고 무관심으로 일관해왔고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세상은 망할 곳이라고 여기며 저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멀리하시거나, 부정하시거나, 심판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할렐루야!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 세상을 죄 많은 세상이라고 버리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세상에 보내어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 그리고 죄인의 낙인이 찍혀서 전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주님께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오는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모습을 민망히 여기셨다”고 표현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속에 있는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스러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죄악시하고 멀리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 깊은 관심을 갖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사랑하라는 말은 세상과 야합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미워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문화들, 음란, 술 취함, 방탕함 등....., 이 세상의 가치관은 사랑함으로 따라가면 안 됩니다. 철저히 미워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을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썩어진 곳을 보면 안타까움에 울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욕심에 빠져 이기적인 삶을 사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겨 그를 위해 울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사랑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봄철인 식목일을 전후하여 아주 많은 나무를 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90% 정도는 죽고 약 10%만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돌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잘 관리하고 돌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첫 번째 사명은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관심과 사랑을 행함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점점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때, 이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구원할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타락한 세상과 피조물들의 탄식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입니다.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만 정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을 위해 영원한 대속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리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금과 빛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소금의 역할입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막아줍니다. 이것은 오염시키며 썩게 만드는 세상의 균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죄의 번식을 차단하는 역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가면 더 이상 부패의 행위가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만 부패하지 않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적당히 눈감고 다른 사람들의 부패를 지나쳐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에서는 부패한 곳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즘 세상은 온통 재미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보다 당장 웃고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즉흥적입니다.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딸과 같은 소녀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몰지각한 행태들이 일어나는 이유들입니다. 자신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순식간에 야수로 살인마로 변합니다. 모두가 삶의 의미와 가치보다 즉흥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오는 병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의미와 보람을 가져다주는 올바른 목표와 가치관을 제시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는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있는 곳에 항상 의미와 기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빛의 역할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이 없을 때, 어두움은 어두움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깜깜한 방안에 빛이 비추게 되면 드디어 어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만연한 곳에서는 자신이 죄인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삶을 살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며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아! 내가 어둠 속에 있었구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사탄의 정체를 벗기셨습니다. 어둠의 세력을 밝히시고 그곳에서 방황하며 유리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라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세상의 어둠을 노출시키는 역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또한 빛은 안내자의 역할을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비추어지는 전등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은 어두운 세상에서 삶의 한 표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이 참된 삶인지? 그리고 진리의 삶인지를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과 부패의 길로 나아가던 사람들이 우리의 빛 된 삶을 보고 하나님이 여시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교회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의 특징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와 성도의 사명을 잘 함축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행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세상과 다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세상은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교회는 나누어주는데 열심입니다. 세상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데, 교회는 서로 인정해주고 사랑하고 높여주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은 권력을 얻기 위해 불의를 도구를 사용하지만 교회는 공의로 행합니다. 이런 구별된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로 교회와 성도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웠는데, 변함없이 거룩하게 살면서 그들의 주변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한마디씩 칭찬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 다른 게 있구나” 처음에는 그들의 거룩함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용기 있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칭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행전의 교회는 날마다 구원을 얻는 사람이 더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삶의 살아가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온 세상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소금과 빛의 삶으로 이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복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을 향해 헌신할 책임입니다.

소금과 빛이 온전히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심지가 없는 등불은 더 이상 등불이 아닙니다. 흙 속에 파묻혀서 감추어져 있는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말 아래 감추어진 등불은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졌습니까? 건물이나, 교인의 숫자나, 헌금은 많은데, 왜 세상은 점점 더 썩어가고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기에 서 있는 목사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희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녹는 아픔과 타는 아픔 없이 그저 세상이 저절로 변화되기를 소원만 하고 있었기에 오늘의 기독교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를 피할 수 없겠느냐고 하나님께 물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온 땅에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따르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본거지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은 결코 피하는 곳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구원해야할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십자가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곳은 바로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곳은 바로 타락한 세상, 죄가 있는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한 가운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처럼 “우리는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야만(히11:13)”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서만 계신 분으로만 간주하고 세상에서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 영적인 책임과 의무를 도외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끔 한번씩 성전에 찾아와서 천천만만의 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어떤 제물을 받으실까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로 공의를 따라 사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개인의 사적인 생각과 가치관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함축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고 살려내는 일에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은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펼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모습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을 고치고 살리는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민족의 축복된 미래를 여는 비밀입니다. 우리 모두 소금과 빛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펼쳐 나가는 귀하고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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