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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자의 소원 (잠언 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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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삼우 목사

결혼한 지 30년이 되어 함께 나이 60이 된 금실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30주년을 기념하여 함께 소원을 기도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 주겠으니 마음속으로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먼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워낙 가난하다보니 세상구경을 못했어요. 세계일주 여행을 해봤으면 좋겠네요."  천사가 지팡이를 흔들자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는 항공권이 나왔습니다.  다음은 할아버지 차례였습니다.  60세 된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난 나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소원을 빌고 난 후 천사가 지팡이를 흔들자 할아버지는 90세 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우스개 거리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중의 할아버지의 소원, 여러분 이 할아버지의 소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것들을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소원이 아니라 정욕이요 욕심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소원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욕심과 소원은 다릅니다.  욕심이란 언제나 동기가 정욕적이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 이기심과 죄악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소원이란 부자 되고, 출세하고,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원은 보다 차원 높은 것으로서 우리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보다 수준 높은 영역으로 이끌어 줍니다.  적어도 소원이라고 하면 깨끗해야 하고, 하나님 보실 때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또 혹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값있고 보람된 것일 때 비로소  소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소원을 말하라고 하시면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번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한 평생 추구하며 따라가야 할 진정 값진 소원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다.  그래서 먼저 소원을 정립하고, 그 소원을 바라보고 그 소원을 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우리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삶이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굴이라는 사람의 소원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잠언 30장은 1절을 보면 아굴의 잠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아굴이라는 사람이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말씀이라고 했는데, 아굴이 누구냐, 논란이 많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아굴을 솔로몬의 별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어느 지파의 사람인지 어느 시대 사람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의 소원을 두고 몇 가지 특징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지혜자의 소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굴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의 말이 성경 잠언에 남았습니다.  잠언은 지혜서입니다.  그의 말이 지혜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잠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지혜자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경험도 없는 사람이 그냥 마음 가는 데로 하는 소원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의 소원도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원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지혜자가 정말 중요하고 정말 바라보아야 할 것을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소원하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소원이라는 데 이 소원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소원은 마지막 소원입니다.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여기 죽기 전에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싶은 소원, 그것이 어떤 소원입니까?  그냥 인생 살면서 이것저것 바라는 중에 한 번 가져보는 그런 지나가는 소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경험한 결과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원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것만은 이러야겠다는 가장 간절한 소원이요 가장 절박한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특징을 합쳐볼 때 이 소원은 지혜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원은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소원이요 우리 모두가 가져아할 소원입니다.  그러면 그 소원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진실입니다.  8절 함께 읽겠습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라고 했습니다.  허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를 보면 헛된 것, 거짓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 다시 말해 진실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좀 특별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말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면 생각이요 사상이고,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다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 행동이 됩니다.  말이 곧 사상과 행동의 중심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말씀의 결과로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의 중심이 곧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말이 그냥 거짓말하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행동, 내 인격 전제에 거짓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 마지막에 가서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을 말씀하시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한 주일도 설교를 마치면서 말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거짓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니 다음 주일 오실 때 유다서 2장을 다 읽고 오십시오."  교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다시 주일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지난주일 내가 유다서 2장을 읽어 오라 했는데 읽으신 분계십니까?"  말했습니다. "예." 하는 대답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얼마나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가 여기 나타난 것입니다.  유다서는 2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기술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지가 못합니다.  제가 어느 설문조사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 중 63%는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진실해서는 제대로 살 수 없는 나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참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외국 언론이나 연구 기관들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부정직한 국민 중의 하나라는 비난을 듣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인이 20%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벌써 수년이 지나갔습니다만 저는 이 시간 소위 옷 로비 사건 청문회를 잠깐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비난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이 사건이 이 땅의 기독교에 입힌 상처가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 땅의 기독교는 그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치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온 국민이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는 앞에서 이 땅에 그래도 이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맹세를 하면서 서로 자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만약 내가 거짓말을 하면 성경에 기록된 거짓말을 할 때 받는 벌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경에 맹세하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면 지옥 가도 좋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렇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교회적으로도 존경 받았던 강남의 가장 엘리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그 이전에도 우리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욕먹을 만한 일들이 많았습니다만 저는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 치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잃는다하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했습니다.  명예를 잃고 욕을 먹고 감옥에 가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정한 돈을 받아 검찰에 불려 가는 사람들,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불과 며칠 후면 밝혀지는데도 돈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검찰에 불려 가기 전에 교회 가서 기도하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내가 돈 받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들을 비난할 만한 진실은 과연 있는 것입니까?  생각해보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거짓으로 살아온 인생은 다 헛수고입니다.  어떠한 형태였든 간에 진실하게 산 것만이 내 인생입니다.  아무리 높고 화려한 인생의 집이라고 해도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신기루입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지혜자도 죽기 전에 소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그것이 거짓 위에 있는 것일 때 소용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헛수고였습니다.  진실만이 참된 것이요 진실만이 내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이제 오직 남은 생애 진실하게 살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난한 청년이 구두를 살 돈이 없어 잘 아는 동네 중고 구두를 사고파는 구두수선 가게에서 한 달 뒤에 갚기로 하고 외상으로 구두를 사 신었습니다.  한 달 후 돈을 장만하여 가게를 방문했더니 주인은 없고 부인이 앉아 있습니다.  “주인은 어디 가셨습니까?”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청년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돈 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구두와 그 주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밤새 고민을 합니다.  결국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아가 부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죽었지만 아직 나와의 관계에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 구두 값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돈을 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청년은 자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실입니다.  진실보다 귀한 것이 없고 진실만큼 강한 것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진실했다면 자신만만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해도 진실하게 살았다면 성공입니다.  하나님 “이 모습 이대로 진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망 불평하지 말고 남을 미워하지 말고 이대로 오직 진실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했습니다.  8절 하반 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9절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9절 함께 읽겠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아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가난이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에 신앙의 사람 중 가난한 사람들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 지혜자는 자신에게는 부도 가난도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몰라도 나는 부해지면 하나님 모른다고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는 부하면 교만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가난하면 하나님 이름 욕되게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도적질할까 하오며” 라고 했습니다.  나는 가난하면 정당하지 않은 것을 바라며 비굴해집니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가난하게도 말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터무니없이 부해지기만 소원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해져서 하나님과 멀어질는지 누가 압니까?  십일조를 해보아도 백만 원 벌 때 십만 원 십일조 하기는 쉬워도 1억 벌 때 천만 원 십일조 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백만 원 벌 때 십일조 잘 하던 사람이 1억을 벌게 되어 십일조 못하게 되었다면 그 1억을 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해서 교만해지고 부해서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 부는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돈 많으면서 겸손하고, 돈 많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 존경합니다.  절대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난해서도 안 됩니다.  가난하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가난하면 정당하지 못하게 남의 것을 탐내게 됩니다.  결국 가난해서 하나님의 영광 가리울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지 적당한 것이 좋습니다.  소유뿐 아니라 모든 것이 적당한 것이 좋습니다.  현대인들 취미생활에 관심 많습니다만 그것도 과하면 안 좋습니다.  어떤 사람 낚시에 취미 붙여서 밤낮 없이 낚싯대 들고 나갑니다.  정도껏 해야지 그래 가지고 아내는 무엇이며 가정은 무엇입니까?  더욱이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취미 생활 적당히 해야 합니다.  보신도 그렇습니다.  요즈음 몸에 좋다 그러면 가리지를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몸에 좋은 것도 정도껏 먹어야 합니다.  이것저것 아무것이니 먹다 보면 그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해지려다가 건강 잃을 수도 있습니다. 

  “더 부하게도 말고, 더 가난하게도 말게 해 달라.”  이대로 족한 줄 알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것으로 족합니다.  더 부할 것 없고 더 가난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알아서 주셨습니다.  욕심대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땅덩어리보다 더 두터운 사람의 욕심을 무엇으로 채웁니까?  족한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대로 족한 줄 알게 해 달라고 소원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소원의 핵심은 하나님을 존귀히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배불러 하나님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가난하여 도덕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소원의 중심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 가리울까, 너무 부하면 부해서, 나무 가난하면 가난해서 하나님 이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가난도 부도 말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대로 남은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살고 싶습니다.  부도 가난도 이 목적에 방해될 때 안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소원의 핵심입니다.  다른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이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사랑하는 하나님, 오직 그 분 이름 높이고 그 분께 영광 돌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 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제 나도 남은 생애 오직 그분 이름 높이고 싶습니다.  바울의 소원처럼 죽든지 살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만이 보람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 욕되게 하지 않고 생애를 마치고 싶습니다. 

  그러니 본문의 지혜자, 세상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다.  뭐 엄청난 것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내가 진실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진실하게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도 남은 생애 진실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진실만이 중요하고 진실만이 가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높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 살고 못 살고가 중요한 것 아니라 하나님 존귀히 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대로 만족하면서 주님만 존귀히 되기를 소원하십시다.  이렇게 소원할 때 참으로 거기 영광과 기쁨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고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소원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이 시간도 저희들 권고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랐기에 삶이 피곤했고 우리의 소원이 타락했었기에 우리의 삶이 이다지도 부끄럽습니다.  간구하오니 지혜자의 마지막 소원을 우리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실이 귀한 줄을 알고 오직 진실을 소원함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하시고, 이대로 만족함을 배워 하나님만 존귀히 되기를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소원을 향한 수고와 바램 속에서 인생의 참된 보람과 영광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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