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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택하라 (신 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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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곽주환 목사 

미국의 좋은 대학교를 아이비리그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미국 동북부에 있는 사립대학 8개교로 구성된 체육경기 연맹조직 및 대학의 총칭이다. 학교 건물을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 잎(ivy)>으로 상징되며 고도의 학문적 실적, 사회적인 위신으로 명성이 높다. 하버드·예일·컬럼비아·프린스턴·펜실베이니아·코넬·다트머스·브라운 등의 대학이 가맹되어 있다.

아이비리그의 대학 중에서도 하바드와 예일대학교의 명성은 매우 높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케네디 대통령 이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하버드 출신 가운데 대통령이 당선된 사람이 없고, 같은 아이비 리그에 속한 예일대학 동문가운데에서는 1988년 조지 부시, 클린턴, 아들 현직 부시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하바드 대학 동문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고 예일 출신에서 대통령이 나오는가? 거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다. 1963년 새로 취임한 총장 킹만 브루스트만 2세가 입학 정책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비리그의 학교는 사립학교의 상류층 자녀들만 입학시켰는데 새로운 총장은 학생의 40%를 일반 공립학교에서 선출하여 학교를 상류층의 집단이 아니라 대중화 시켰다. 그 결과 모든 학생들이 보통 사람의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하버드 출신의 후보들은 중산층과 섞이지 못하여 계속해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를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선택이 학교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다.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바꾸어 놓았다.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바라기는 우리 나라의 위정자들이 바른 선택을 잘해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달라지게 되어 있다. 본문을 보라.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의 선택이 있고, 복과 저주의 선택이 있고, 흥하는 일과 망하는 일의 선택이 앞에 놓여져 있다. 생명을 선택하자. 복된 길을 선택하자. 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일어나고 흥하는 선택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명을 선택하는 길인가? 어떻게 해야 축복된 길을 선택하는 것인가? 대답은 아주 명확하다. 분명하다. 말씀을 의지하라. 말씀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바로 생명을 택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똑같은 씨가 뿌려졌는데 길가, 돌밭, 가시 밭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태양의 빛에 말라 죽었고, 가시 밭에 떨어진 씨앗은 가지의 기운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머물러 있고 말씀을 소중하게 여겨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생명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어떤 이유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결국 사망의 길에 이르게 된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에 말씀을 지키지 못했다. 말씀의 씨앗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죽음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다윗 시대의 일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메어오기 위해 장병 3만명을 대동하고 다윗이 바알레 유다로 갔다. 그런데 그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웃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윗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궤를 사람이 메고서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웃사는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다윗은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레가 털털거리고 나오다가 그만 언약궤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얼른 웃사가 언약궤를 잡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웃사가 잘못했기에 그 자리에서 웃사를 치신다. 결국 죽고 만다.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나름데로 언약궤를 움직이기 위해서 새수레를 마련하고, 떨어질 것 같아서 얼른 손을 댔는데 왜 그곳에서 즉사하고 말았는가? 다윗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옮기라고 하셨는데 웃사는 수레를 이용하여 옮겼다.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고 오히려 편한 쪽을 택했다. 결국에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에 표현된 웃사라는 용어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웃사는 인간의 힘, 능력, 위엄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메어 언약궤를 옮기라는 말씀을 웃사는 새로운 수레에 옮겼다. 웃사라는 표현은 인간의 힘, 능력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사망과 저주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지식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사망과 저주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않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있다.

유학생활 중 바쁜 학업 중에서도 자신의 영성을 지키기 위해 “No Bible, No Breakfast"단어를 냉장고에 붙였다. 말씀없이는 아침도 먹지 말아라. 또한 침대 머리쪽에다는 “No Bible, No Bed” 라고 써붙여 놓았다고 한다. 말씀없이는 잠도 자지 말라.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은 결국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있다. 말씀은 말 속에 담겨진 숨이다. 말인데 그 말 속에 생명이 담겨져있는 것이 바로 말씀이다.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고, 형통함이 있다.

나비의 애벌레가 나비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데기 과정을 겨쳐야만 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고치 속에 가만히 갇혀 있다. 가령 여기에 열 개의 고치가 있다고 하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똑같은 고치다. 때가 이르면 어느 고치로부터 허물 벗은 나비가 비상해 오르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속의 애벌레가 살아 있는 고치이다.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속의 애벌레가 죽은 고치에서는 어떤 생명의 비상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고치 속에 있는 누에는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자와 생명이 없는 자는 결과가 다르다. 어떻게 생명을 택할 수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빼앗기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가? 새벽에 모여서 기도하는 이러한 영적인 훈련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훈련이다. 말씀을 빼앗기면 우리는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이 없는 자의 결과는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망할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망할 것이라. 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가?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머무르게 할 수 있을까? 방법은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계속해서 작아져야 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마음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커지려는 욕심 때문에 말씀을 빼앗기고 결국 사망을 택하는 길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지난 백년 동안 부흥해 오다가 요즈음에는 주춤한 상태이다. 왜 한국교회는 부흥했는가? 종교사회학자들이 하는 말 중에 박탈-보상심리 때문에 한국교회가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제치하, 육이오, 가난, 등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감정을 갖고 있었다. 실패의 감정이 있었다. 빼앗긴 감정이 있었다. 이것을 박탈감이라고 한다. 교회에 와서 이렇게 빼앗긴 감정이 보상받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박탈보상 심리 때문에 한국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박탈감, 빼앗기는 아픔을 경험할 때에 주께로 더욱 가까이 나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으려고 한다. 그러기에 고통을 당할 때에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말씀이 내게 머물러 있게 한다.
그러다가 요즈음에는 여러 모양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커졌다. 나의 능력이 부각되었다. 내가 자랑거리가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말씀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말씀을 빼앗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의해야 할 점은 베레사 웃사이다. 웃사는 능력, 힘을 의미한다. 내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치시는 베레사 웃사를 체험하게 된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말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거죠?"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선 옷 걸이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옷을 걸쳐 주셨는가? 밍크코트 걸쳐 주셨다고 마냥 뽐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는 자는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죽코트 걸쳐 주셨다고 나는 힘이 있다고 말씀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옷걸이에 불과한다. 그러기에 내가 걸친 물질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빼앗겨서도 않되고, 내가 걸친 능력 때문에 말씀을 빼앗겨서도 안되고, 내가 배운 지식 때문에 말씀을 빼앗겨서도 안된다.

내가 지금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말씀을 빼앗기는 것보다 차라리, 빼앗긴 아픔이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 훨씬 낫다. 내가 지금 건강해서 그 능력을 믿고 말씀을 빼앗기는 것보다 약해서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 낫다.

사랑하는 성도여! 생명을 택하라. 여기에 생존이 있고 번성이 있다. 그러나 말씀을 빼앗기면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지금 멀고 살기 힘들다고 하여 말씀을 빼앗기면 이러한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말씀으로 일어서라. 말씀으로 힘을 얻으라. 말씀으로 새로워지라.
내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택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을 네가 거주하리라. 내가 오늘 바른 선택하면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씨앗이 된다. 복의 씨앗이 된다. 생명을 택하여 생명과 번성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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