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의 사람(1) (눅 19:28∼40)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 설교자 : 김창인 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 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 제자 중 둘을 보내시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 19:28∼31>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40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예수의 사람",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오늘은 첫째 대지만 말씀드리고, 다음 주일은 본문과 제목으로 둘째 대지를 말씀드리고, 셋째 주일은 똑같은 제목으로 셋째 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면 천만 교인을 자랑하고 있는 저희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좀 생각하게 하는 제목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 역사상 백년 동안 사천만 인구 중에서 일 천만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덩치가 굉장히 큰 교회입니다. 사천만 명 중 일 천만 명이라면 네 명 중 한 명 꼴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주일이면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예수의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것은 문제입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너는 내 사람이다. 내가 너를 꼭 들어 써야겠다."하는 사람과 또 진실로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되겠다." 이렇게 자기를 예수의 사람으로 자인을 하고 또 예수님도 인정을 하는 그런 사람이 한국교인 중에 몇 명이나 되겠느냐 하는 이것은 사실 문제입니다.

이제 본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본문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눈가복음은 누가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의사로서 예루살렘에서 개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고 명성도 얻었던 사람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완전히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모든 것 다 버리고 복음 전하는 일에 직접 뛰어들어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누가복음을 썼고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누가는 이 두 권의 성경을 써서 이 천년 동안 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사람입니다. 이쯤 됐으면 가히 누가복음에 예수의 사람은 이렇다 하는 내용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보여집니다. 이제 본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예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I. 일꾼 된 사람(28∼31절)

첫째로는 예수의 일꾼이 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일꾼 노릇은 안 한다면 예수의 사람은 아닙니다. 일꾼 된 사람은 세 가지입니다.

1) 따라가는 일꾼(28절)

첫째는 따라가는 일꾼 즉 예수를 따라가는 일꾼이 예수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거느리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막 올라가고 있는데 앞장서서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열두 제자에게 두말 말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두말 말고 따라오라는 뜻으로 앞장서서 가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서 가시더라" 하신 것처럼 우리는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① 말씀하시는 예수님만 따라갔습니다(28상반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바로 그 앞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곳에 귀인이 있었습니다. 이 귀인이 머나먼 나라로 왕권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귀인이 왕 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사람을 보내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기의 종 열 명을 불러서 한 므나씩 돈을 맡겼습니다. 한 므나씩의 은잔을 맡기고 떠난 뒤 오랜 후에 이 귀인이 왕권을 받아서 돌아와 계산을 합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 나온 종이‘주인님 내게 한 므나를 주셨는데 내가 장사해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 때 주인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또 두 번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 때도 똑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와서 불평만 늘어놓습니다.‘주인은 두지 않은 데서 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고 하는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아예 내가 단단히 묻어 두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주인의 책망이 굉장했습니다.‘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 돈을 은행에 두었을 것이요 그렇게 했다면 내가 본전과 함께 변리라도 받을 것이 아니냐 왜 그것까지도 네가 안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즉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내가 왕 되는 것을 반대하던 저 운수들은 하나같이 진멸시켜 버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종에게는 각각 금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그 비유와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재능대로 그에게 직임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하루 24시간이 똑같고, 1년 365일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노라면 기회는 균등한데 재능은 달라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결과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므나를 남겼든 다섯 므나를 남겼든 자기에게 맡겨진 기회에, 맡겨진 일감에 충성을 다했을 때에는 똑같은 칭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은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것마저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 사람에게 주었다고 했는데 세 사람만 나와서 계산하고 일곱 사람은 등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주인의 돈까지 다 떼어먹고 말았나 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왕왕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주님께는 하나도 계산 안 하고 전부 내 것으로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볼 때 도적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충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우리들에게 충성에 대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충성을 보여주신 예수님, 충성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충성을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는 따라가면서 온갖 충성을,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바칠 때에 예수님의 일꾼이 된다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② 일하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28하반절)

그리고 다음은 일하러 가시는 예수님, 바꾸어 말하면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무엇을 하러 가셨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길인 줄 알고 가셨습니다. 가면 죽는다고 제자들에게 누누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으러 가는 곳에 너희들도 각오를 하고 따라 오라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대해서 엉뚱한 해석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인 중에는 이런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으면 전혀 문제가 없이 해결이 잘 될 일을 아주 미련하게 처리해서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것을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라고 단정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입니까? 미련한 짓은 다 해놓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는 종종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흉악한 죄인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면 사형 틀을 누가 저 공동묘지까지 져다 줍니까? 져다 줄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처형당할 사람이 그것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인줄을 자타가 다 압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더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들을 죽일 그 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 즉 죽음을 지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묵묵히 앞장서 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입니다. 여러 말 말고 따라 오라,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 오라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충성을 바치는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도 참예하는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일꾼 된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만 전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2) 파송 받는 일꾼(29절)

두 번째는 파송 받는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즉 주님의 일을 위하여 파송하였습니다. 일꾼은 반드시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① 파송 받는 때가 있습니다(29상반절)

파송 받는 데는 때가 있습니다. “감람원 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그러니까 파송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한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지방이나 가릴리 지방에서 두 제자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을 오리 남겨 놓고, 즉 2Km를 남겨 놓고 스가랴서 9장 9절에 예언한 대로 나귀를 타시기 위해서 베다니와 벳바게 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두 제자를 파송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당신의 사람을 파송 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우리 인간에게는 만사에 때가 있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때를 맞춰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태여 왜 1986년 전에 오셨습니까? 이 천년 전에 오시든 삼 천년 전에 오셨든 또 사 천년 전에 오셨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첫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고 기약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첫 말씀이 때가 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때가 되어서 주님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슨 때가 찼다고 하셨습니까? 정말 그 때는 예수님의 때가 되었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로마가 유럽 일대와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그 때 당시 손이 닿아서 갈 수 있는 지역의 나라들은 모드 통일시켜 버렸을 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도로가 뚫렸습니다. 로마가 정복한 나라들은 다스리고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이 어떻게 잘 되어 있는지 요즈음으로 말하면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었습니다. 열흘 가던 길이 삼일이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길이 예비 된 것 입이다. 자기네들은 군사 목적으로 예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 길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 준비가 다 된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전쟁 때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위험스러운 전쟁 때에는 피난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로마가 수십 개 나라를 다스리고 전부 통일시켜 놓은지라 전쟁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마음을 놓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평화가 이루어진 때입니다.

그 다음에는 언어의 통일입니다.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데 그 나라 말들을 모두 배워 가지고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한 나라 두 나라 밖에는 못 갑니다. 그런데 로마가 통일시킨 나라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다스렸지만 문화는 전부 헬라 문화가 지배를 했습니다. 헬라어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헬라어만 하면 다 통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다된 준비된 때입니다.

그 다음은 종교적인 때입니다. 그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잡종교들의 타락한 윤리와 도덕성으로 인해 백성들이 탄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뭔가 좀 색다른 종교, 참다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기독교가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시간표에 의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입니다. 우리를 들어서 쓰시기를 원하시는 그런 시간표가 있습니다. 그 때를 맞춘 일꾼이 가장 귀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② 파송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29하반절)

그 다음에는 파송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이것 참 묘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이스라엘 중에 열두 제자를 구별해서 선택하셨고 그리고 그 열두 제자 중에서 두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파송 받는 사람이 별도로 있더라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하나 하나를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맡기면 잔소리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일을 바로 해주고 잘 해줄 사람을 주님이 택해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가시는 길에 이렇게 일을 잘 해주었으니 그 이름을 밝힐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름을 빼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성격은 이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큰 일, 장한 일을 했지만 내 이름 다 나타내면 주님의 이름이 나타날,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자리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 이름도 없이 주님의 이름만 높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선택하사 보내서 마지막 길에 큰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주님이 나에게 맡길 때 잔소리 안 하셔도 될 만큼 충성되게 해야 합니다. 또 내 이름은 전혀 나타내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름도 없이 일하고 주님의 이름만을 나타내는 일꾼이 될 때 곧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교육받은 일꾼(30∼31절)

마지막으로 교육을 받은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두 사람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킨 후에 보내셨습니다.

① 현장 교육이 있었습니다(30상반절)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가서 일할 현장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일할 일터가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데로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현장을 분명하게 지시해 주셨습니다. 현장에 대한 교육을 시켜서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일할 자리가 있습니다. 일할 자리가 여기인데 저리로 가면 안 됩니다. 저기가 좋다고 내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정해 주신 장소에서, 지정해 주신 제단에서 내 몸을 불태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맞은편 고을로 가라고 일할 현장을 주님께서 교육시켰다는 뜻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한 5년쯤 되었을까 하던 때입니다. 정말 일꾼 하나가 아쉬울 때입니다. 성가대 한 명,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너무 새로울 때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한 사람이 등록을 하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등록 조사를 해 보니까 신학교를 졸업한 아가씨였습니다. 물론 광나루 신학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자원해서 봉사해 주길 바랐는데 석 달, 여섯 달이 지나도록 자원봉사를 안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제가 한 주일에 한번 내지 두 주일에 한번은 꼭 교인들을 심방할 때입니다. 그래서 한 6개월 지난 다음에 가서 “성가대도 좀 하고 교회학교에서도 좀 봉사하라. 당신이 바로 일할 자리, 설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냐 왜 신학을 했느냐.”그랬더니 자기는 음치라서 성가대는 못 한다고 했습니다. 음치라서 성가대를 못 하면 주일학교 선생은 할 수 있지 않느냐? 당신 배운 것이 있으니까 좀 봉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 하는 말이 “그런 것 할 바에야 내가 전도사하지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는 할망정 주일학교 선생은 시시해서 안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속으로 어떻게나 괘씸하고도 섭섭한 지요, 주일학교 선생이 어때서 그런 것 할 바에야 전도사 한다고 합니까? 그래서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었더니 끝내 봉사를 안하고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목사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너도 내 꼴 한번 당해보라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일할 만한 일꾼이 왔을 때 자기가 나에게 한 말을 그대로 들어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내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이야기했고 정말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시집을 가서 아기를 둘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때 저에게 큰딸 하나만 있을 때였는데 딸을 데리고 창경원에 처음 갔던 때였습니다. 창경원 앞에서 그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도 저희 교회에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느냐고 인사를 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그 앞에서 그분의 아들이 음식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자고 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펑펑 울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갓 서른이 넘었을 정도인데 아이 둘을 낳고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한창 젊었을 때 다만 하루라도, 다만 한 번이라도 더 충성하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더 나이 들기 전에 몸을 불태워서 충성하는 것, 이것이 참을 귀합니다. 제자들 둘을 보내면서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바로 건너편 마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충성할 자리는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② 일감 교육이 있었습니다(30하반절)

다음은 일감에 대한 교육입니다.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나귀는 어떤 나귀였느냐 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그 나귀는 아무도 타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귀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모시게 되었습니다. 나귀로선 그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다 태우다가 그 주에 한 번 예수님을 태운다면 그런 나귀는 안 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매여있는 나귀입니다. 나귀는 매여있어야지 매여있지 않으면 가는 곳마다 사고 칩니다. 먹지 못할 곡식 밭에 들어가서 다 뜯어먹기도 하고, 곡식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귀는 매여있을 때 주인의 마음대로언제라도 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여있는 나귀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매여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은혜에 꼭 매여있어야지 이 말씀에 매여있지 않은 교인은 제멋대로 다 해버리니까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귀하 일꾼을 끌고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③ 말씀 교육이 있었습니다(31절)

마지막으로 말씀 교육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거기 가서 너희들이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올 때에 주인이 보고서 왜 푸느냐 묻거든 두 말 할 곳 없이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주가 쓰시겠다” 이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사람은 내가 잘 아는데 두 말 없이 보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니나 다를까 가서 풀고 있는데 임자가 나타나서 왜 푸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가 쓰시겠다”고 주님 말씀 그대로 했더니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쓰겠다면 내가 못 주지만 주님이 쓰시겠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내 집을 주님을 위해서 완전히 개방해 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바들바들 떨면서 아끼지만,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끼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고 주님을 위해서는 내 집을 개방할 줄 아는 일꾼이 진정 예수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