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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사람(2)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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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창인 목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눅 19:32∼35>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4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지나간 주일날 똑같은 제목으로 말씀드렸었습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린 내용은 “일꾼 되는 사람이 곧 예수의 사람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꾼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즉 파송을 받고 가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내지도 않고 맡기지도 않았는데 내 욕심으로 가거나, 내 욕심으로 맡아 일하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또 주님께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 가서 일해야 합니다. 언제 가고, 어디로 가며, 가서 일할 내용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교육받고 가서 일했다는 내용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II. 제자 된 사람(32∼35절)

오늘은 똑같은 본문과 제목을 가지고 두 번째로 예수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와 일꾼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면 됩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을 배워야 됩니다. 스승의 지식을 배우고, 스승의 인격을 배우고, 스승의 생활을 배우고, 스승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그대로 스승을 닮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인격을 대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야 합니다.

1) 순종하는 제자들(32절)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예수님의 제자는 첫째로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① 보냄을 받고 순종했습니다(32상반절)

첫째로는 보냄을 받고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보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엉뚱한 곳에 목적을 두고 배를 탔습니다. 얼마 동안은 아주 순풍에 잘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얼마 동안은 잘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감당을 못합니다. 요나 자신의 짐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귀중한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지게 하는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래도 배가 풍랑을 감당치 못하게 되자 그 다음에는 누구 까닭이냐 하는 제비를 뽑아서 그 사람을 바다로 던지기로 했는데 요나가 당첨이 됩니다. 바다에 던짐을 받자마자 큰 고기가 삼켜버립니다. 그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일 동안을 지냅니다. 말이 좋아 고기 뱃속이지 사실은 고기 똥집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삼일을 살았다는 것은 죽지 못하니 살아 있은 것뿐이지 살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죽을 고생 다 한 것입니다. 삼일만에 제자리로 돌아와서 토해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허송세월하고 고생한 보람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받은 교훈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은 가고야 말 것을 불순종하니 고생만 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올 때는 감당을 못합니다. 요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엄청난 재산 전부를 바다에 던져야 하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이 망하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쓸데없이 죽을 고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정해준 장소에 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가야하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공하게 되고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제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순종하고 갔습니다. 보내심을 받고 순종했다는 데 정말 참된 제자의 도리를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② 함께 순종하였습니다(32중반절)

두 번째로는 함께 협력한 순종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아”라고 했는 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나귀새끼 한 마리 풀어오는데 뭐가 두 사람씩이나 필요 하느냐 너 혼자 갔다 오라”그렇지 않았으면 “너는 여기 있어라 나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이 가라하니 두 사람이 가서 한 사람처럼 협력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혼자 해도 될 적은 일도 둘이서 협력할 줄 아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일을 협력하기 위해서는 적은 일에 협력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큰 포도원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실상은 너를 위해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너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두고는 포도원인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맏아들이 “예”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 둘째아들에게 가라고 했더니 “아니요”하고는 곧 뉘우치고 갔습니다. 이 비교의 교훈은 “예”하고 안간 맏아들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아니요”했지만 곧 뉘우치고 간 둘째 아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이야기를 일고 아쉬운 것 세 가지를 느낍니다. 첫째, 맏아들이 “예”했으니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하고 안 갔으니 아쉽습니다. 거기서 아쉬운 것은 기왕 갈 바에 “예”하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것입니다. 셋째,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고 단 두 형제뿐인데 함께 협력해서, 힘을 합해서 일했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혼자 해도 될 일을 둘 다 시킨 것은, 너희들이 이렇게 협력하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적은 일부터 협력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③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32하반절)

그 다음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말씀대로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보내시는 때에, 주님이 보내시는 곳에,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나귀새끼를 만났다, 즉 일감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미국 위싱턴 시에 노스웨스트 대학이 있는데 그 대학 설립자가 버드필드라는 사람입니다. 이 버드필드라는 사람은 목사이며 박사이고 부흥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부흥회에 갔습니다. 그 때만해도 부흥회를 꼬박 일주일씩 할 때입니다. 지금처럼 삼 사일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부흥회를 위해 그 교회에 가서 머물고 있는데 어떤 노부부가 간청을 하며 강사를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낸 후에 제직들이 가보았더니 대접이 너무너무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강사님을 보고 집을 옮기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강사님이 “좀 더 기도해 보고 마음이 움직이면 옮기겠습니다”대답했습니다. 대접을 아주 잘하는, 서비스가 좋은 집으로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옮기지 않고 그 날 밤에 한참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뜨거워지고 머리에 번갯불같이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전도하라고 보냈을 적에 말씀하시기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떠나기까지 그 집에 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집에 정하고 머물기 시작했으면 거기서 떠나기까지 머물 것이요 이 집 저 집 옮기지 말라는 그 말씀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옮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불편하고 대접이 소홀할지라도 그곳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일 째 되는 날 그만 봉사 잘한다고 하는 그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이 걸리더니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전염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당국에 신고가 되어 격리 수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장티푸스 한 번 걸렸다하면 집안을 쓸어내고 동네를 쓸어낼 때입니다. 그러니 그 때 그 집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때 갔더라면 장티푸스에 걸렸을 것이고 부흥회는 중도에 파탄이 났을 것이 뻔합니다. 내가 불편하지만, 괴롭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더니 이런 좋은 결과가 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괴롭더라도 주님의 말씀 그대로만 순종하면 처음에는 괴로운 것 같아도 종래는 정말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귀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2) 열심 있는 제자들(33∼34절)

두 번째로는 열심 있는 제자가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시킨 대로 대답했습니다. 열심 있는 제자라는 제목처럼 열심히 참 귀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가대원은 누구나 악보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악보만 척 갖다대면 연습해 볼 것도 없이 척척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니까 자기 실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연습하는 시간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또 찬양하는 시간에도 종종 빠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은 있는데 열심히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실력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렇게 때문에 실력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 열심입니다. 사업을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공부를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믿음생활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못 당합니다 그래서 열심은 어떤 면에서 신앙의 생명입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은 주일 낮 시간, 저녁시간 빠짐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견줄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열심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푸는 일에 열심히 있습니다(33상반절)

첫째는 푸는 일에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건너편 마을 에 가서 매여있는 나귀를 풀었습니다. 나귀새끼는 매여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자기가 원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쓰려고 매어놓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푸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풀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때 주님이 마음대로 쓰도록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푸는 데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만 꽁꽁 묶어두었던 주머니를, 나의 필요를 위해 묶어 두었던 것을,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틈없이 짜놓았던 나의 하루 계획, 주님이 들어오시고 싶어도 발붙일 틈이 없던 나의 시간도 이제는 풀어놓읍시다. 시간표를 주님 앞에 갖다놓고 주님 마음대로 고치도록 말입니다. 내 마음, 나를 위해 꼭 닫아두었던 것, 다 주님께 열어놓고 풀어야 합니다. 주님 마음대로 주장하시도록 푸는 열심히 우리 제자들에게 있어야 되는 귀한 열심입니다.

② 바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33하반절)

다음에는 바치는 열심입니다. 제자들이 풀고 있을 때에 임자들이 나타나서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푸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 주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때에 쓰려고 둔 나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라면 좋다는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고, 그러면 즉시 보내리라(마 21 : 1∼11, 막 11 : 1∼11)고 제자들에게 미리 일러 주셨습니다. 정말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임자들이 즉시 보내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주경 신학자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과 나귀주인이 벌서 약속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쓴다면 보내기로 되어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추측입니다. 두 번째 해석을 저는 좋아합니다.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벌써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귀새끼 가진 사람이 베다니 그 집 뿐 이었겠습니까? 그 집 나귀를 써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나귀주인의 신앙자세는 내 나귀지만 주님이 쓰겠다면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주님을 위해서 푸는 일이라면 두 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은 주님을 위해 바치는 일에 열심히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한번 연보궤에 마주 앉아서 지켜보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헌금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많이 넣었고 가난한 과부는 두렙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돈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물론 현금을 조금해야 칭찬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부자는 자기가 실컷 먹고 쓰고 남은 것 중 일부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액수는 많았다고 할지라도 어느 구석이 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두렙돈이 하루 생활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퍼센트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주님은 지켜보셨고, 비교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천하에 공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공포하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공포하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바칠 줄 아는 것이 제자된 도리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을 천하에 공포하는, 축복의 본보기 또는 성공의 본보기로 삼으십니다.

③ 대답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34절)

다음에는 대답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왜 푸느냐고 물을 때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내서 풀어라 해서 풀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대답하라 하시니 그대로 대답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을 위한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나귀주인이 비위나 주인의 기분 맞추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대답을 분명히 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비위 맞춰주기를 원합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여러분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좋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여러분들의 비위를 맞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비위만 맞추어 가지고는 믿음이 좋아지질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때때로 여러분들에게 아주 큰 소리도 합니다. 괴로운 소리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사명이 아니라면 제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을 바르게 가르쳐주고,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역장 권찰들의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사람이 바르게 하도록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을 잘 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귀합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시키는 방법대로 딱 부러지게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하는 일이요, 바치는 일에 열심이요, 대답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3) 성공하는 제자들(35절)

마지막으로 성공하는 제자들입니다. 나귀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제자들이 세 가지 성공을 합니다.

① 끌어오는 데 성공했습니다(35상반절)

첫째로는 끌고 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건너 마을에 가서 이런 일 저런 일 제 딴에는 잘한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오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 중에 최고의 실패입니다. 근본적인 실패입니다. 예수님에게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는 것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이 쓰실 도구를 끌어다 놓았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쓸만한 사람을 끌어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갔다가 맨손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을 성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주님이 귀하게 쓸 사람을 데리고 나오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베드로의 형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나 크게 은혜 받은 것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큰 은혜를 받고 먼저 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뻤던지 즉시 이름을 게바라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를 키워주시니 기독교 역사에 남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안드레도 그 형이 그렇게 유명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일꾼을 주님 앞에 데리고 오는 것, 끌고 오는 것이 우리의 성공 중에 첫째가는 성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② 준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35중반절)

둘째는 준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귀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놓고 타면 그 옷은 다시 입을 수 없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옷을 두 벌, 세 벌 가지고 살지 못했습니다. 겉옷 하나 가지고 평생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것을 나귀새끼 위에 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편히 모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겉옷은 뭐가 됩니까?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고생해서 끌어오는 데 성공한 그들이 그 다음에는 주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쳐서 주님을 모실 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즉 준비한 데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공중 재림할 때 주님 모실 준비가 된 사람은 다 들림 받지만 준비가 안된 사람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주님 모실 준비를 해놓고 주님 모시고 예루살렘 성에 당당히 입성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 모실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주님 영접하고 새 예루살렘 성에 당당히 입성하는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③ 예수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35하반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수를 태우니라”하신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어다가, 예수님 앞에서 보란듯이 자기가 올라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인 중에 그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가 애썼다고 자신이 타버립니다. 오늘날 교인 중에는 성공했다고 영광의 자리를 예수님 앞에서 보란듯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하시지를 않습니다. 제자들은 온갖 성공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만을 그 자리에 앉으시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공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통해 받는 영광을 전부 예수님께 돌려서 예수님이 높아지게 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성공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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