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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가 능히 건지겠느냐 (사 3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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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전시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대단한 효과를 내는 것이 바로 기만적 선전입니다. 우리는 바로 얼마 전에 서해상에서 북한군의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침입해 왔을 때, 오히려 북한군 쪽에서 “지금 그 수역에 있는 배는 중국 어선이다.”, “귀측 함정이 북침했으니 변침하여 되돌아가라.”는 따위의 말도 안 될 소리들을 무슨 ‘핫라인’인지 하는 것을 통해 보내어 왔습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 정부는 그것 때문에 무슨 ‘기밀 누설’이니 ‘보고 누락’이니 하는 죄목을 달아서 해군 장성들을 줄줄이 징계하면서도, 정작 북한측에 그 경계선 침범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 항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은 스스로 도발행위를 저질러 놓고도 그저 거짓말 교신 하나 띄워 보냄으로써, 총 한방 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우리 해군 지휘관들의 목을 날려 버린 셈이 된 것입니다. 적군의 기만전술에 넘어가도 어쩌면 이렇게 잘 넘어가는 것입니까?

유다 왕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성에 살던 그의 백성들도 바로 그런 적군의 기만전술 앞에 테스트를 받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앗수르는 이미 쇠퇴하고 있던 애굽을 대신하여 고대 근동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한창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 앗수르 제국이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의 형제 국가인 북조 이스라엘을 멸절시켜 버린 후에, 이제는 그 칼끝을 남조 유다의 마지막 남은 명맥인 예루살렘 성을 겨누고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격에 앞서 산헤립왕이 파송한 장관 랍사게가 「세탁업자의 터의 대로 윗못 수도구 곁」이라 불린, 예루살렘 성 서쪽 바깥의 어느 장소에서 엘리아김을 위시한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 몇 명을 만나 그들에게 항복하라고 위협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섬기는 백성으로서의 또 하나의 시험(test)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그들이 그들의 생사가 걸린 그 중요한 판국에서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산헤립의 기만전술에 넘어가느냐’ 하는 테스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위험스러운 상황을 통과하면서, 바로 그와 같은 사단의 선전방송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정말로 여호와가 능히 너희를 건지겠느냐’라고, 사단이 하나님 의지하려는 신자의 사기를 죽여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탈주하도록 만드는 기만전술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1.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강해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도록 만들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이사야 36장 4~6절 및 8~9절의 말씀에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모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 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나는 네게 말 이천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립왕은 여기서 유다 백성들의 아픈 데를 정곡으로 찔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3장 7~9절을 보면 여호와만 의지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는 당면하고 있던 사마리아와 아람의 위협을 앗수르 제국의 힘을 빌어서 벗어나 보고자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앗수르 제국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위협이 되어 버렸고, 그런 가운데 유다는 또 한번 눈을 돌려 애굽을 의지하여 앗수르의 위협을 막아내 보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애굽은 이미 쇠퇴의 단계에 들어 있었고 유다에게는 전혀 도움이 못 될, 여기서 랍사게 군대 장관의 비꼬는 말 그대로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나라였지만, 유다 백성들은 그 같은 애굽을 하나님보다도 더 강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 같은 유다의 모습은 불신자인 앗수르왕 산헤립이 보기에도 경멸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백성들이 정작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하나님은 간 곳 없고 여기저기 세상 세력에 빌붙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 꼴을 보고 산헤립이 이처럼 조롱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이와 꼭 같은 기만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강하게 보이는 것을 우리 앞에 내어 놓고 거기에 헛되이 의지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런대로 하나님 섬기는 사람처럼 살다가도, 정작 정말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분만을 의지해야 할 순간에 와서는 그만 하나님보다 더 강하게 내 인생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에 넘어가고 마는 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중국을 의지해야 나라 경제도 살리고 ‘미제국주의’의 입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어느새 국회의원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 흔히 입에 오르내리던 말 중에, “미국을 믿지 말라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은 일어난다 조선아 조심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왜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중국은 과거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항상 받들어 모시던 나라였으니까, 은근히 그런 사대주의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중국이 우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할 만한 나라이겠습니까? 지금 조금 나라가 힘을 얻고 잡혀 간다 싶으니까, 당장 주변의 약소국들에 대한 통치권과 영토권들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고구려사까지도 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중국은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이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나라가 되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강대국이니 뭐니 해도 조금만 정신 차려 생각해보면 정말 「썩은 갈대 지팡이」에 불과한 것들을, 마치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처럼 믿고 의지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인이나 나라는 그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결국 「자기 손이 찔려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것, 지금 당장은 하나님보다 더 내 인생에 훨씬 유력하게 보이는 것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게 꾀어가려는 사단의 유혹인 줄 깨닫고, 오직 ‘일평생 주만 바라면 너 어려울 때 힘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만을 끝까지 의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 따르는 것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생활’을 선택하게 하려는 사단의 기만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이사야 36장 11절과 12절에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 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 랍사게가 가로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라고 기록했읍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의 항복 선동을 유다 백성들이 듣고 동요할까 두려워하여 그에게 「아람 방언」으로 대화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랍사게는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여 전쟁한다면 결국 성 안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자기 자신의 대변 소변을 먹고 마시게 될 모든 유다 백성에게 말해 주려고 내가 왔다.’고 실로 모욕적이고도 위협적인 언사를 여전히 ‘유다 방언’으로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3절 이하 17절에 기록된 대로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가로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는 것을 받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붙임이 되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 히스기야를 청종치 말라 앗수르 왕이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산헤립왕은 두 가지 거짓 선전방송을 띄우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주변 국가의 위협 가운데 유다 백성 대부분의 민심이 애굽을 의지하고자 함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 백성들을 향하여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헤립왕은 그 같은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고 선동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만방송은, 만일 항복하면 평안히 살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자기에게 항복하면 당장 그 시간부터 이전처럼 평안히 잘 먹고 잘 살도록 보장해 줄 뿐 아니라, 이 유다 땅과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땅에 이주시켜 줄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산헤립왕의 말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히스기야왕의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만 계속 의지한다는 것은, 실패할 경우 죽음 아니면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할 두려움이 포함된 지극히 위험해 보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저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는 것은 훨씬 쉽고 편해 보이는 선택이었습니다.

오늘도 이 같은 유혹이 꼭 같이 우리들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만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자는 말은 여러 가지로 당장 어렵고 고생스러워 보이는 반면, 그저 세상과 짝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해 보이는 유혹입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는 말은 편안히 쉴 수 있는 하루를 더 피곤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로만 들립니다. 경건한 생활에 힘쓰고 선한 일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은 내 여가를 더 재미있게 만끽할 수 있는 자유와 정력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헌금을 약속대로 다 바쳐야 한다는 말은 내 여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저금통장의 돈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만 들립니다. 현세와 내세의 전 인생을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구원과 축복에만 의지하고 이 땅에서는 오로지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목사의 설교는, 지금 당장 듣기에는 요즘 같이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며 요즘 같이 문화와 여가 생활을 즐기는 시대에는 도무지 말도 안 될 억지 강요처럼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아예 불신 세상 쪽에 항복하고 거기 들러붙는 것은 더없이 편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주초 생활하고 정욕 이끌리는 대로 연애 생활하고 정말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는 평안이 불신 세상 쪽에서 기다릴 것 같습니다. 일단 하나님에게서만 벗어나면, 일단 교회만 떠나면, 일단 신앙생활만 포기하면, 저쪽 세상에는 이제 더 이상 부담스러운 생각으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조금도 없는, 정말이지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진짜 목숨과 영혼을 노리고 있는 사단이 오늘도 세상에 던지고 있는 낚싯밥인 것입니다. 불신 세상 속으로 손들고 들어가는 것은 지금 당장 더 행복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야말로 바로 오늘날도 사단이 유혹하는 거짓 선전인 줄을 간파하고, 오직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라고 찬송하면서 금세와 내세의 진짜 ‘웰빙’을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종교’를 따르도록 하려는 사단의 작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이사야 36장 7절 말씀에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고 랍사게의 말을 기록했습니다.

이 산헤립의 말은 ‘히스기야는 너희더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해 놓고도 그 하나님의 제단들 중에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 버려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니, 너희들이 그 하나님을 의지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많은 신들이 있고 그들은 결국 다 같은 신이라는 범신론 사상에 젖어 있었던 산헤립으로서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참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산헤립은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너희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뜻 역시 분명히 너희를 멸하는 것이다.’라는, 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헤립왕의 이 말은 사실상 전혀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인간의 의지와 판단만 최고로 높이는 인본주의 사상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인 자기의 뜻을 따라 맞장구쳐 주는 존재밖에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어쩌고 함으로써 그 신들이 자기네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종교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이란 무조건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랍사게는 18절부터 20절에서 또 말하기를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꾀임을 받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그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산헤립의 인본주의 종교관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칼날 앞에 자기 백성도 지켜내지 못하는 힘없는 신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도 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장담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이처럼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의 능력 앞에서는 때로는 신이라 할지라도 꼼짝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이란 개념은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헤립은 이처럼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유다 백성들에게 기만선전을 퍼부었습니다. 그의 종교는 유다 백성들이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 왔던 신앙과는 전혀 다른, 철저한 인본주의적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그 어떤 대상도 필요에 따라서 신이 될 수 있다는 범신론적 신관으로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겨야 한다는 유일신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신을 믿는 것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본주의적 종교관으로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받들기 위한 것이라는 신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오늘날에도 꼭 같은 수법의 유혹 선전방송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종교를 믿든지 간에 결국 다 같은 것이고, 아니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자기 마음에 무언가 의지하는 바나 확신하는 것이 있으면 그 자체가 바로 종교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얼마나 쉬워 보이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또한 얼마나 듣기에 마음 편한 말입니까? 거기에 비하면 성경 말씀을 따라 한 하나님만을 믿어야 하고 그 앞에서 회개해야 하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야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따르기도 피곤한, 아주 복잡하고도 어려운 종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단의 선전방송 속에 숨겨져 있는 속임수입니다. 바로 그것, 그 훨씬 쉽고 편하고 부담 없어 보이는 종교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먹이를 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사단의 교묘하기 짝이 없는 기만전술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예수를 더욱 의지합니다.’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비록 바른 신앙생활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생명 있을 동안에, 천국 올라가도록’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끝까지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단은 세상이 시작되던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사람의 마음에 혼란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유언비어를 살포했습니다. 이제 그 사단은 또 다른 기만방송, 바로 ‘여호와가 능히 건지시겠느냐?’라는 소리를 이 세대를 향하여 요란하게 틀어 놓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경우에도 한 분 주님만을 믿고, 그 주님만을 섬기며, 그 주님의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신자들을 ‘과연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정말 영생 구원을 해 주겠느냐?’라고 우리에게 거짓말로 교란 통신을 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단의 선전방송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이 세상에 많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 섬기지 않고 더 편하게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거짓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보다 더 쉽게 믿을 수 있는 길도 얼마든지 있다고 또 감언이설을 속삭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거짓말에 또 넘어가면 이제는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는 멸망뿐임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적군이 총알 한 방 쏘지도 않고 그저 거짓말 선전만 늘어 놓고 있는 데도 그것에 넘어간다는 것은, 정말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휴전 상태에 있을 때에 적군의 선전방송에 당할 정도라면, 진짜 시험과 환난이 닥쳐서 예수 신앙을 자기 생명과 바꾸어야 할 자리에 서게 될 경우에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까지 ‘할 수만 있다면 택한 자들까지 미혹하기 위하여’ 사단이 보내고 있는 이 교묘한 기만전술에 결코 넘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뢰하는 자」들이 되어서, 모든 시험을 이기며 끝까지 승리하고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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