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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5 분이면 거룩해집니다 (빌 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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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금성 목사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체조 경기의 오심 사건이 뽑혔습니다. 우리나라 양태영 선수가 멋진 철봉 연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심판이 착오로 기술 점수를 낮게 매겼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의 폴 햄 선수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나중에 점수가 잘못 채점된 것이 밝혀졌지만 폴 햄 선수는 자기가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우겼습니다. 물론 금메달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폴 햄은 뜀틀 연기 때 엉덩방아를 찧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전하는 방송사들은 저마다 폴 햄 선수가 때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큰 실수를 하고도 금메달에 욕심을 내는 모습이 추하게 보입니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기 중에 또 하나의 엽기적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뛰어나와 선두를 달리던 브라질의 리마 선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관중 쪽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결승점 통과 15 분을 남기고 있던 리마 선수는 이 황당한 일 때문에 우승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리마는 떠밀렸다가 다시 뛰었지만 다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심리적 충격에 밸런스도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동메달을 딸 수 있었습니다.

이 술 취한 관중은 전직 가톨릭 신부였던 호란이란 아일랜드 인이었습니다. 그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신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장소를 알리기 위해서 이런 사고를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리마 선수는 결승점을 통과하면서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는 비행기처럼 두 팔을 벌리고 지그재그로 자축하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나를 밀친 그 관중도 용서합니다.”

리마는 이런 넓은 아량 때문에 브라질에 돌아갔을 때 영웅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그를 진정한 승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폴 햄 선수와 리마 선수가 대조적입니다. 한 명은 욕심으로 추하게 되었고, 한 명은 용서하고 양보하는 넓은 마음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그런 넓은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고통 위에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17 절을 보면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판결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나타나면 불안합니다. 누군가 불리한 증언을 하면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 바울의 석방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이 갇힌 것이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바울을 더 괴롭게 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너무 큰 악재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주 안에 형제들에게 이런 배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결단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죽음으로 인해 복음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교회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상황을 크게 걱정했습니다. 목자인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믿음이 약하면 바울이 제시한 복음에 회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없으면 이제 복음 선포도 불가능해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바울 자신이 처한 상황이 복음의 패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부터 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 1:12-14>

바울은 오히려 감옥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가이사에게 반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의 직할 부대인 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평상시 같으면 로마 황제의 시위대에게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시위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재판을 받으면서 복음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로마의 관리들과 병사들에게 복음을 변증하고 확증할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벌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들은 병사들 가운데 여럿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죽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패배가 아니라 복음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목숨을 건 복음 사역에 재를 뿌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시기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5 절부터 17절 까지 읽어보면 이들이 어떤 자세로 바울과 복음을 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빌 1:15-17>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착한 뜻으로, 사랑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전합니다. 착한 뜻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구원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다툼으로 전하는 자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괴롭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끄럽게 선포함으로써 로마 관원들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불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입니다. 옳지 않는 동기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생각하는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18 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8>

바울은 자신이 고통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화를 내고, 야단을 쳐야 할 상황입니다. 저주하고 경계케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자리하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못나고 잘못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행한 일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들로 인해 오히려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의 훼방꾼들이지만 그리스도는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18 절에서 기뻐한다는 말을 두 번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앞에 있는 문장과 연결됩니다. 기뻐한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위에 있는 문장과 연결됩니다. 앞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뒤에 있는 문장은 19 절과 20 절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19-20>

문장이 좀 복잡합니다. 풀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여러분들을 기도하게 만듭니다. 또 성령께서 도우시게 됩니다. 결국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는 무죄 석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훼방꾼들 때문에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화 낼 일인데 거기서 기뻐할 일을 찾았습니다. 기뻐할 일이 두 가지나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무죄 석방될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힘입니다.

저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바울의 이 넓은 마음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다듬어지면 이정도의 경지까지 다다를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미 죽음을 이겼습니다.

바울은 20 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21 절에서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죽음을 이기면 담대해집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미 복음을 위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고린도후서 11 장에 바울은 이 죽을 고생한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정말 죽은 적도 있었습니다. 1 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이고니온이란 동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들고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로 피신했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고니온 사람들이 그곳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결국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시신을 쓰레기처럼 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바울은 목숨을 건져 일어났습니다. 그런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이 꺾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곧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언젠가 죽게 되리란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러니 바울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17 말씀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생명을 걸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러시아에서 테러 인질 납치극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테러범들이 몸에 폭탄을 차고 버텼기 때문입니다. 자살 테러범들은 천하무적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덤비기 때문에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9.11 테러이후 테러는 오히려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 NBC 방송에서 자체 집계 분석했습니다. 9.11이후 모두 2천929건의 테러가 세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그 중 58%인 1천709건이 올해 일어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라크에서만 테러공격으로 약 1천500명이 숨졌으며, 러시아에서 약 700명, 이스라엘에서 350여명, 스페인에서 약 200명, 필리핀에서 100여명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NBC방송은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각오했다고 테러범이 되진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히려 원수를 품었습니다. 용서했습니다. 그 억울함 속에서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위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리는 참 기쁨입니다.

여러분! 어떤 억울함 속에서 이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바울을 통해서 이 기쁨을 배우십시다. 원수를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본받으십시다. 누가 나를 지치고 힘들게 만들 때, 그 중에도 건질 수 있는 좋은 일들을 찾아냅시다.

마라톤 테러를 당한 브라질의 리마 선수는 남은 15 분을 달렸습니다. 그 15 분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처구니없고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골인하면서 하늘을 향해 키스를 날렸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올림픽 마라톤 완주를 허락하심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저는 테러를 당하기 전에 달렸던 2 시간 보다, 테러를 당한 후에 리마가 달린 15 분은 참으로 거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15 분에 1 등으로 달리다가 2 번이나 추월을 당했습니다. 1 등이 2 등이 되고, 2 등이 3 등이 되는 순간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약이 오르는 순간입니다. 원망하고픈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리면서 감사한 일들을 찾았습니다. 테러범을 용서했습니다. 15 분은 그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5 분 후 리마가 골인 지점에 나타났을 때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비행기가 되었습니다. 좌우로 날개를 흔들며 축하 비행을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먼저 1 등으로 골인한 선수를 찾아 악수를 청했습니다. 하늘에 키스를 날리고, 땅에 엎드려 키스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사와 용서의 말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인의 갈채를 받는 진정한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15 분이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상황일지라도 마음을 넓히고 기도하십시다.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속상하면 내 속만 상합니다. 화를 기쁨으로 돌리면 우리는 영적으로 챔피온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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