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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일생(13) : 다윗이 성군이라 불리는 이유 (삼하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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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어떤 사람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답니다. 식당 한 귀퉁이에 그림이 하나 걸려있는데,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아예 때가 되어 찌들어버렸습니다. 너무 심해서 형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조상 적부터 내려온 것이라 마음에 걸려서 때를 벗길 요량으로 화랑에 갖고 갔습니다. 그림에 찌든 때를 벗기던 화랑 주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그림은 18세기의 유명한 화가의 원본이었던 겁니다. 거액을 호가하는 걸작인데 그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찌들어 그 아름다운 가치가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으면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의 축복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下 11장에서 본 것처럼 그는 엄청난 죄를 범했습니다. 유부녀를 범하고, 더 나아가 그 남편까지 살해했습니다. 그는 엄연한 간음자요 살인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죠. 조금도 뉘우치는 빛이 없었습니다. 완전 범죄를 꿈꾸고 죄를 은폐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그토록 사악할 수 있는가?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로 읽으니까 그렇지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군(聖君)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성군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질고 덕스러운 왕, 위대한 왕, ... 그런 뜻 입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왕이면서 동시에 성자(聖者)라는 겁니다. 아니, 그런 사악한 인간이 성자라니!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 그를 성군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를 아브라함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메시아 족보가 나오는데, 이것은 또한 유대인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그 타이들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마1:1)

그러면 과연 악한 죄를 저질렀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됐는가? 한 마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사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됨으로 성군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죄의 먼지를 털어내자 그 진가가 나타난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죄 많은 인간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손길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셔서 다윗처럼 거룩한 인생,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1] 다윗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 : 언약의 사랑

다윗이 그 무지막지한 죄악을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벌레 본 듯이 피해 버리고, 절대 가까이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므로 조건이 바뀌면 얼마든지 변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한번 선택하셨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경고하고 때려서라도 변화시킬지언정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극악한 죄를 범했어도 그와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삼하7:14~15 보면 다윗 언약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그 후손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징계해서 변화시킬지언정 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히13: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다윗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거의 1년 이상이나 ... 왜 그랬나요? 그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하여 둔해질 대로 둔해진 그의 영혼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2]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경책 :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래도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고 그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경책하십니다. 나단은 참 담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다윗은 절대 군주입니다. 그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다윗을 찾아간 그는 처음에는 지혜롭게 비유로 말씀을 전합니다. 삼하12:1절~4절 보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집에 양과 소가 많이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암양 한 마리만 갖고 있습니다. 애지중지하면서 온 식구가 함께 먹고 마시고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부자의 집에 방문합니다. 자기 것을 아까워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집에 가서 암양 새끼를 강탈해다가 요리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다윗은 제3자의 위치에서, 또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왕의 입장에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삼하12:5절~6절 보니까, 화를 버럭 냈습니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 ! 하며 격노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4배를 보상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같은 것이라도 이중 잣대로 봅니다. 자기는 슬그머니 빠지고 남에게는 엄격합니다. 그때 나단이 호통을 치며 직언합니다. 7절.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것은 나단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범죄하고 곁길로 가면 돌이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첫 단계로는 신사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해 줍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통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여러 가지 고통을 줘서라도 돌이키게 합니다.

[3] 다윗의 철저한 회개 : 통회자복

다행히 다윗은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 말씀이 비수처럼 다윗의 마음을 찔렀고, 마치 써치 라이트처럼 다윗의 어두워진 모습을 벌거벗기듯 비춥니다. 그 앞에 고꾸라지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13절.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눈물 흘리며 통곡합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의 엄청난 능력입니다.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 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 하냐” 그 말씀이 다윗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그가 쓴 참회시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51:3~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그 이전에 근본적인 원죄에 관해 통회합니다. 자기 속에 악한 죄의 본성이 있기에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정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여러분, 바로 이게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사실 그가 계속 죄를 은폐하려고 했다면 나단을 그냥 죽이면 끝납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지위도 내려놓고 부복합니다. 그리고 눈물로 통회 자복합니다. 사람이 안 그러면 좋지만 대개 지위가 높아지고 이것저것 조건을 갖추게 되면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집니다. 핑계대기 쉽습니다. 다윗도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밧세바가 유혹해서 그렇게 됐다는 둥, 주변 나라 왕들은 더 한데 자기가 한 짓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둥 ... 그러나 다윗은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차별성이 바로 그겁니다. 다윗이 사울보다 인간적으로는 나을 게 없습니다. 사울은 남의 아내를 빼앗거나 그 남편을 죽인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은 버리고 다윗은 끝까지 축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성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 봐도 동일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못지않게 베드로도 야비하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변화 받고 수제자로서 초대 교회 창설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겁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현대인들에게 죄에 대한 정직함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합리화하고 핑계대고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망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정직히 자신의 모습으로 내놓고 회개할 때 오히려 복된 인생이 열리는 것입니다.

미국 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방탕과 갈등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날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골목을 누비며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던 중 어느 교회당 앞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 교회당 벽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이런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순간 그 말씀이 비수처럼 마음을 찔렀고, 그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날 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는 당당히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바로 그날 한 사형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옛날 내 친구였는데 ... !” 비슷한 두 친구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차이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 사죄와 징계

처절하리만치 통회자복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사죄의 은총과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① 하나님의 사죄 은총 : 나단 선지자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는 다윗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13절(하).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어 당연히 사형감이지만 하나님이 사죄의 은총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은 큰 기쁨을 맛보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있던 1년 동안 어떤 상태였을까요? 들통나지 않았으니까 마냥 즐겁고 희희낙락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남 모르는 영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후일 그가 회개하고 사죄의 기쁨을 맛본 후 뭐라고 회고합니까? 시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부둥켜 안고 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년 전 뉴코아 백화점 영업부에 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그 안에는 편지 한 통과 더불어 1만5천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 적힌 사연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16년전 그 곳에서 고급비누를 한 세트를 훔쳐 나왔습니다. 갖고 나올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행인 줄 알았는데 그후에 나는 도둑이라는 죄의식에 계속 시달렸습니다.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용기를 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죄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 중에 가장 큰 것은 사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입니다.

다윗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와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 기쁨을 놓치지 않고자 하나님께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시51:11~12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도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며 혹시라도 걸리는 죄악이 있다면 회개하고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사죄의 은총으로 인한 큰 기쁨을 맛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② 사랑의 징계 : 다윗은 이 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밧세바와 사이에 태어난 갓난 아이가 죽어버립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단이 이미 예언한 대로 그 집안에 끊임없는 칼부림과 비극이 줄을 잇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셨다면서 이건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근친상간(암논과 다말), 알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롬의 반란 등 ...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죄값이 아닙니다. 죄값이라면 그 정도로 그치면 안 되고 다윗이 죽어야죠. 그러므로 죄값은 아니고, 단지 그에게 징계를 주셔서 죄를 그토록 철저히 경계함으로 성화되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이런 징계는 다윗으로 하여금 늘 경성하게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인간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선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히12:8 보면 징계가 없으면 오히려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징계들을 통해 비록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갈수록 성화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 이치를 알았던 다윗은 고난을 달게 받으며 잘 이겨냈습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 묘한 것은 후일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후계자가 될 솔로몬이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겨우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법적으로만 의인이요 성도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성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성자입니까? 다윗처럼 비록 실수가 많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통회자복함으로 변화 받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화됨으로 우리는 다윗이 성군 된 것처럼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화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감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 영광스런 성자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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