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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 주를 사랑하십니까?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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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까이, 곁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번영케 하다, 번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성공하는 자가 되었더라. 그러니까 요셉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번영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번영케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만 번영했던 것이 아니라 요셉이 머물고 있었던 보디발의 집과 애굽이 번영했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게 나아졌습니다. 그가 손만 대면 나아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그 삶의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가는 곳마다 번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도 그랬고, 야곱이 가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가도 번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번영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번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이 번영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떨어지지 마시고 주님을 꼭 붙드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가는 곳에 번영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을 번영하게 했던 복이었습니다. "요셉은 우리 집의 복이다" 이것은 요셉을 아는 사람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요셉은 축복이었습니다. 요셉이 바로왕 앞에 섰을 때에도 그는 애굽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곳을 번영하게 했던 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심으로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당신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가정에 복이 되고, 직장과 사업에 복이 되고, 우리 나라와 민족 앞에 복된 존재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수필 작가가 한국 사람은 보자기 사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보자기는 가방에 비해서 크고 작고, 희고 검고를 가리지 않고 두루 감싸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인은 본심을 포장해 가지고 다른 사람이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감정 노출을 잘 하지 않습니다. 보자기처럼 두루두루 싸 가지고 남이 잘 보지 않도록 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간에도 감정의 표현이 매우 인색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매우 쑥스러워합니다. 심지어는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좀 경솔한 사람처럼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답을 듣는 자리에는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의 고백 한 마디로 병석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눈물로 지새던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오는 아름다운 모습도 있습니다. 이만큼 사랑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에만 사랑의 위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가는 그 자리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을 열고 주 앞에 엎드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말 한마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고백 한 마디에 굳게 닫혔던 완악한 마음이 열리고, 잃어버렸던 꿈과 비전을 회복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은혜로운 경험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 노래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칭찬도 많이 받으면서 따랐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충성을 가장 많이 한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주를 향한 신앙고백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감람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연약한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다던 그의 맹세는 헛된 맹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제자로 끝났습니다. 3년 동안 신앙고백으로 칭찬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열정에서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이제 주님을 부인하는 수치스러운 제자라는 과오를 남긴 채 좌절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 부르셨던 소명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 옛날 고기를 잡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배를 띄웠습니다. 비린내 나는 그물을 다시 바다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여러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그 결과는 없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낯모르는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 가운데는 처음 주님께서 자기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합니다. 그 날도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빈 배로 돌아오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했을 때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던 일을 말입니다. 그 순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이시다는 말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본문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뱃사람, 그래서 비린내 나는 그물을 만지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위대한 사명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했습니다.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한 번 이상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나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자책감에 빠집니다. 그 자신이 예수님을 대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면목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에도 부끄러워서 그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에 묶여서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지난날의 아픈 잘못을 기억하면서 제자됨을 포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얽매여서 오늘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향한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표를 끝없이 추구하고 바라보면서 오늘을 사십시오. 사도 바울도 뒤엣 것은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지나온 날들은 다 잊어버리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야겠지만 그러나 과거를 붙잡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거는 어떻게 하시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붙잡고 일을 이루시지도 않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한 과거를 묻고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실패가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로 인한 좌절된 마음이 힘들게 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마음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간 과거의 실패는 잊어버리십시오. 아픈 상처도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거의가 다 실패의 경험을 뼈아프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를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인생의 파멸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 기회로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시몬은 주님을 알기 전에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 시절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의 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상급으로 주시듯이 내리신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의 베드로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이제는 사명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돌아온 그는 반석은 고사하고 작은 돌맹이도 되지 못한 시몬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낭패와 실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베드로가 아닌 시몬을 보십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결과가 없는 시몬을 보십니다. 그리고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생과 수고로 지쳐있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질문은 본문 그대로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방금 잡은 신선한 고기들과 배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베드로야,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 번씩이나 하십니다. 이 어색한 질문을 주님께서는 왜 세 번씩이나 다잡아서 물으셨을까?
주님께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것은 영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버리겠다"고 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때 베드로는 요한복음 13장 37절에서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얼굴을 감싸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나는 부인했었네 죽을지라도 맹세치 않겠다던
나의 헛맹세 나의 헛맹세 무릎꿇고서 용서를 비나이다"♬

여러 날을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병든 그는 갈릴리 바다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를 떠난 인생은 성공 같아 보이지만 실패입니다. 주를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과 육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베드로 앞에 자기가 부인했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고기를 구워서 "배고픈데 먹어라"고 하시면서 자기 앞에서 섬기고 계십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호통을 치면서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했다면 오히려 속이 후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시지 아니하고, "배고픈데 먹어라. 추운데 불 옆에 오라."고 하시니 우리말로 말하면 환장할 노릇입니다. 베드로가 어디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떨군 채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숯불은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던 자리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장작불을 상기하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기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기에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 나 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처절하게 지쳐 있는 그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질문은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깨닫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보고 사랑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철면피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니?"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에는 나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심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베드로의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속에 남아 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나무 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는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에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고 어색하지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이 질문에 세 번씩이나 대답을 하면서 베드로는 치유 받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힘은 강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여러분,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그 후로 다시는 자기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씨름하고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모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위대한 사명자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베드로를 치유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치유의 손을 내미십니다.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실패한 심령에게 용서와 사랑의 손을 펴서 그를 다시 한번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사랑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래서 지나온 과거의 아픈 상처들이 아물고 치유되기를 축복합니다. 죄책감과 상처로 멍들고, 분노와 원한으로 신음하고, 깊은 내면의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차 있는 심령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처럼 세상에 나가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세상을 살아 보려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베드로처럼 남이 모르는 죄를 범하고 마음에 죄책감과 고통을 안고 너무나 아픈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앉아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마음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를 않습니다. 생각은 온통 사방으로 흩어져서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아마 마음은 더 텅텅 빌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 주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병든 심령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듣는 자가 깨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자가 일어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 속에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나음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던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던지, 어떤 나락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던지 간에 주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다 치유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헌신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해서 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헌신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은혜가 넘치고 부흥하는 교회는 한결같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분들이 안내 위원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 차량도 운전합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주저하지 않고 기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도 주를 향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이 고맙고 감사해서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좋은 교회, 은혜로운 교회, 부흥하는 교회는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은 우리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자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분량을 확인하고자 물으십니다. 얼마나 섬길 수 있는지,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믿고 이 일을 맡겨도 될 만큼 사랑하는지, 죽음의 자리에서도 부인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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