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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일꾼 (눅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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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오늘 본문 가운데 “말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절 앞부분을 보세요.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성경에는 이 말씀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 1,575번, 신약에 425번, 모두 2,000번이 나옵니다.

우리말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의 뜻은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높일 때 말씀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요.
때로는 자기의 말을 낮출 때 이 말을 쓰기도 합니다.
‘제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하지요.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라는 말이 거의 무한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원어로 말씀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럿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다바르, 에메르, 밀라, 네움, 콜, 헬라말로는 로고스, 레마, 많습니다.
영어성경 가운데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임스 왕의 번역(KJV: 흠정역)은 이 말이 여든다섯 개의 용례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 “말씀” 하나로 번역되었는데 그 속뜻을 보면 설교, 예언, 명령, 교훈, 메시지, 연설, 진술, 경고, 이렇게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릴 때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을 이룰 때도 말씀을 통해서 이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부활도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그 분이 곧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고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족장들, 모세, 제사장들, 특히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이 전달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히11:1~2)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의 2절을 다시 봅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말씀의 일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우리는,
‘아, 그 때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여럿 있었구나!’
‘말씀의 일꾼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록하려고 했구나!’
‘누가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구나!’
이렇게 아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합니다.
‘나도 말씀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해야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바로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 가운데에 어떤 엄숙한 것이 느껴져야 합니다.
말씀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힘써 알려드렸는데 그것을 맡은 내가 그것을 맡은 말씀의 일꾼이라는 사실 앞에 숙연해지지 않으면 이상하지요.

말씀의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다른 번역들은 “말씀의 일꾼”을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 14절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의 일꾼은 말씀을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전문적인 또는 직업적인 교역자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만 말씀의 일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일꾼들이 되어야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40명 가까운 교인들이 호남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에 갔습니다.
먼저 전도를 하였습니다. 조를 짜서 전남대학교 부근에서 거리전도와 축호전도를 했는데 낯선 곳인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참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일꾼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줄 때 이상하게 전도지를 거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부하는 사람을 꼭 하나 보았습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저 위에서 받았어요!’ 였습니다.
그 곳 주민들의 심성이 착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구동성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또 하나는 그 먼 곳까지 가서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고 성령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호남선교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전국에서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와서 입장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감리교회의 단결된 모습과 선교의 열의를 잘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일꾼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새 언약의 일꾼도 말씀의 일꾼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주일저녁예배에서 골로새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복음의 일꾼” 이 말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의 일꾼은 곧 말씀의 일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꾼들은 곧 말씀의 일꾼입니다.

성도들은 ‘나는 말씀의 일꾼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하는 의식을 강하게, 뜨겁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하고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일꾼, 말씀의 일꾼으로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파선의 위험, 강도의 위험, 자연의 위험, 사람의 위험, 굶고, 춥고, 헐벗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는 사도가 아니다.’ 하는 공격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배웠다는 것이 기본조건인데 너는 그런 체험이 없다. 너는 무자격자다. 뿐만 아니라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한 부끄러운 과거가 있지 않느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먼저 들고 나오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웬만한 사람이면 이 정도가 되면 기가 죽었을 것입니다.
좌절하고 중도포기 했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는 ‘나는 말씀의 일꾼이다!’ 하는 의식이 방패가 되어 이런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은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성경들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부분입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 사도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고 세금을 잘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때 권세 있는 자들은 로마 당국자들이었는데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은 참 궁금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4절에는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6절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권세를 잡은 이들이 ‘나는 하나님의 시역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일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권세 잡은 이들이 그런 의식을 갖고 그렇게 일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나는 말씀의 일꾼이다!’ 하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말씀의 일꾼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합니다.

말씀의 일꾼으로 합당한 자격은 어떤 것들입니까?

먼저 말씀을 체험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누가는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목격자는 체험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말씀의 힘, 말씀이 주는 기쁨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일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소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체험을 해야, 목격자가 되어야 픽션, 꾸민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넌 픽션,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체험을 해야, 목격자가 되어야 참된 증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증언이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저는 중국성도들의 신앙이 얼마나 뜨거운지, 중국교회가 얼마나 부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을 할 때는 말이 좀 많아지고 신이 저절로 납니다.
절제를 하기 위해 힘써야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교회는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중국이 개방정책을 쓰면서 교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중국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관 안에 여러 부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전도국을 책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오는 편지를 받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성경이나 전도책자들을 보내고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감격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중국에서는 1920년대부터 비기운동(非基運動)이라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어서는 선교사들이 다 추방당하고 교회는 정부의 통제 밑에 놓이게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 때는 적극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그런 시련들을 이기고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서 ‘신앙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정말 깊이 깨달았습니다.
중국을 통해서 신앙의 힘에 대해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온전히 성령의 역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스가랴서 4장 6절 하반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니니라”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강해했는데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중국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내가 중국에서 선교를 해서 이런 성과를 거두었고…’ ‘우리 기관은 중국 선교에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하는 분들을 만나면 속으로 ‘당신은 중국선교에 대해 아직 미숙합니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은 ‘성령이 역사하면 막을 세력이 없다.’는 확실한 깨달음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이슬람권도 복음화 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북한도 복음화 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성도 여러분의 가정도 복음화 될 것입니다.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리교가 벌이고 있는 3대 운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운동입니다. 구체적으로는 3백만 총력전도운동입니다.
하나는 사회봉사운동입니다.
구제, 최근에는 나눔이라고 하지요, 이것을 활발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호남선교대회도 감독님들이 당일 오전에 나주지역의 수해현장을 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남지사에게 수재의연금 1억 원,  광주시와 전라남도에 사회복지기금으로 각기 5천만 원씩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정직운동입니다.
이 정직운동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점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이 사회에 정직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고 저 자신부터 정직하지 못한 때가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감리교 본부에서 나눠준 ‘정직하겠습니다’라는 스티커를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정직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설교원고를 넣어 가지고 올라오는 파일에도 이렇게 붙여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바깥쪽에다 붙여 놓았는데 떨어져져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쉽게 떨어지지 말라고 안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도 정직하기 힘들지요.
‘정직하겠습니다’는 ‘정직하기 위해서 힘쓰겠습니다’ 하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체험하지 못한 것을, 목격하지 않은 것을 체험한 것처럼, 목격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첫 부분입니다.
복음서의 시작 부분들은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인의 습관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행동적입니다. 
다른 이야기 다 생략하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론적입니다. 로고스 이론이라고 하지요.
누가복음은 ‘나는 이런 목적으로 이렇게 기록하겠다,’  목적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설계도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이런 누가복음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도들에게 무한대의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말에 대해서 1장에서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37절을 보세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37절을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말씀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20절 뒷부분을 보세요.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말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마리아는 놀랐으나 곧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하였습니다.

요셉의 어머니이며 마리아의 친족인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절)

라고 축복했습니다.
자기가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으나 주의 사자가 남편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고 이름까지 정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아기를 갖고 있기에,  체험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장이 말하는 말씀에 대한 교훈, 하나님의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
는 것, 말씀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는 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목격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의 힘을 목격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이 주는 기쁨을 체험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을 통해서 깊이 깨달은 분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274장의 가사 가운데

  주 예수 복된 말씀 생명과 진리요
  내 맘의 갈급함을 다 채워 주시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가사 그래도 말씀이 생명과 진리이고. 내 마음의 길급함을 다 채워주시고,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이 기쁘고, 말씀은 구원의 복된 말씀인 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찬송의 후렴은

  예부터 전한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나 항상 전파하기 참 좋아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원래 가사에는 이 후렴이 없었다고 합니다. 작곡자가 그 가사를 받아들고 작곡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잘 되지 않아 기도하며 애쓰는 가운데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이 후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 후렴을 붙여 작곡했더니 훌륭한 찬송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후렴처럼 말씀을 전하기 좋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일꾼으로 합당한 자격은 또 어떤 것입니까?
신실해야합니다.

두기고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과 함께 일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이 첫 번째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 동행했고 에베소서를 에베소교회에, 골로새서를 골로새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여러 가지로 칭찬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두기고만큼 칭찬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1절에서는 두기고를 “사랑을 받은 형제요 진실한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7절에서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진실한 일꾼, 신실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두기고를 그와 같이 신뢰하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일꾼은 신뢰를 받습니다.
열왕기하 12장에는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때 성전을 수리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아스는 일곱 살에 왕이 되었는데 제사장 여호아다의 도움을 받아 좋은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데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이 돈을 받지 않고 궤를 가져다가 제단 옆에 두고 거기에 사람들이 직접, 자발적으로 연보를 넣게 했습니다.(왕상 12: 9)
오늘날 저희 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서 봉헌상(奉獻箱)에 직접 헌금을 넣는 제도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12장 4절을 보면 이와 같은 돈을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거룩한 돈입니다.
요아스 왕은 그 돈을 가지고 성전을 수리했는데 그 돈을 받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회계 감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15절: 「표준새번역 개정판」)
열왕기하 12장 15절은 그 이유를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성실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요아스 왕은 믿고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말씀의 일꾼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믿고 더 많은 일을 맡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 받은 자가 되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딤후 2: 15)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우리 모두에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이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말씀의 일꾼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나의 충성스러운 일꾼이다!’ 인정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셨습니다.(마9: 37)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꾼이 적다는 예수님의 탄식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말씀의 일꾼으로 삼아주소서!‘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일꾼들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말씀이 더욱 풍성해지는 복이 주어집니다.
말씀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은  말씀을 통한 확신과 기쁨이 더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오묘한 비밀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일꾼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장 10절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일꾼에게는 이와 같이 생명의 관이 주어집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받는 선수들에게 모두 월계관을 씌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멋있어 보이고 그 우승이 더욱 값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말씀의 일꾼들이 받는 면류관은 그 월계관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관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말하면서 25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일꾼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는 사탄의 일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탄의 일꾼들은 마지막에 그 행위대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탄의 일꾼이 되어서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말씀의 일꾼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 가지 새로운 계획을 많이 세우고 계실 줄로 압니다.
‘나는 말씀의 일꾼이다’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며 일꾼다운 일꾼이 되기 위해 힘쓰겠다는 계획을 먼저 세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일꾼이라는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들이 되어 말씀이 주는 기쁨과 힘을 더 풍성하게 체험하고 나아가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말씀 그 자체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청년부 예배(청년 담당 박명호 전도사)
제목  고기 낚는 사람과 사람을 취하는 사람
본문  누가복음 5:1~11

지난주 수요일, 8월 25일  오마이 뉴스에 7년 동안 감옥살이를 마치고 형사에게 달려간 납치범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7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다 가석방된 이 출소자는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검거한 형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석방된 이 사람이 형사를 찾아간 것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7일 오후에 서울 강서구 발산역의 한 커피숍에서 출소자를 본 신동선 경사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 몸은 괜찮니?" 하자 이 출소자는 "네, 형님. 보고 싶었습니다." 대답했습니다.

이 출소자는 살인미수, 납치강도 등 14가지 죄목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7년 간 옥살이를 하다 올 8ㆍ15 특사로 가석방된 손지태씨입니다.

손씨는 지난 97년 카드 빚 2000만원을 갚기 위해 다른 공범과 함께 부녀자를 납치 한 후 암매장을 하려다 검거돼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를 검거한 이가 바로 신동선 경사였던 것입니다.

신경사는 평소에도 범인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신 경사가 조사 과정에서 손씨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손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결혼시킨 후, 유흥과 도박에 빠져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돈이 떨어진 손씨는 2000만원의 카드 빚을 지게 됐고 이 빚을 갚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빚만 더 늘어나 결국 그 당시 유행하던 막가파와 지존파의 범행을 모방해 부녀자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연을 알게 된 신 경사는 구치소에 수감된 손씨를 위해 피해자와의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해 주었습니다.
또 수감생활하는 7년 간 수시로 영치금을 넣어주었고 지난해에는 치아 치료비 70만원과 교양서적을 사들고 교도소로 직접 찾아가 넣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동안 자활의 의지를 북돋아주기 위해 7년 동안 300여 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애정 어린 신 경사의 도움으로 수감생활 중 예수를 믿게 되면서 손씨는 나날이 변해갔고 고등 검정고시 합격, 한자 3ㆍ4급 및 워드 프로세스 2급 자격증을 따는 등 부지런히 삶을 일궈갔습니다.
그 결과 모범수로 선정돼 1년여의 형기를 남겨두고 지난 14일 특사로 가석방된 것입니다.

손씨는 고백합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세상을 증오하다 더 큰 범죄를 저질렀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맘밖에 없습니다."

손씨는 신 경사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기 위해 1년 전부터 교도소에서 나오는 노역비 월 일 만 원씩을 꼬박 꼬박 모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출소하면 형님께 맛있는 저녁 한 끼 대접해 드리려구요. 처음 저를 잡았을 땐 형님이 미웠지만, 지금은 형님처럼 고마운 분이 없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신 경사에게 "제가 오늘 저녁 사드릴게요" 했지만 손씨에게 돌아온 것은 반대로 신 경사의 애정 어린 걱정과 십만 원이었습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 나중에 잘되면, 그때 더 비싼 걸로 사. 이건, 적지만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신경사가 전해준 것은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소망과 예수까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기 잡기에 집착해 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삶을 구속하여 주시는 주님이 나옵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를 노크하며 찾아오시어 고기잡기에서 사람을 취하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찾아오시는 예수님

어느 날 베드로와 그의 일행은 배 두 대를 이용해 밤새도록 고기를 낚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패하여 돌아옵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한 사나이가  베드로의 배에 올라탑니다.
이 사나이가 배에 올라탔을 때의 베드로의 정황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그물을 다 씻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베드로와 그이 일행들은 아마도 이미 고기 잡기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배의 정리를 끝나가는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이름 모를 사나이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서 자리를 잡고 앉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여러분에게 펼쳐졌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매우 불쾌하지 않을까요?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 것도 화가 나고 힘이 빠질텐데….
정리하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앞설만한데….
바로 그때 배에 올라타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 이름 모를 사나이의 요청에 응해줍니다.
이 요청과 그 응함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볼까요?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이를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로 밀려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지금의 상황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로 밀려오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 무리를 보시지 않고 고기잡기를 실패하여 돌아온 베드로의 배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오는 그러한 상황, 그리고 실패하여 돌아온 베드로의 마음 아파하는 그 상황을 모두 보시며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중에 그것도 배 두척 가운데 하나인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이며 부름이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중 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많은 교회 중에 목양교회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그 많은 사람 중에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지금 바로 인생의 한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배 처럼 실패하여진 모습으로 비추어 질지라도,
그것이 베드로가 그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여러분이 모든 사안을 결정한 후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바로 그 실패와 결정한 자리에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명강사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세미나에서 그 강사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사는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돈을 갖고 싶지요? 어디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그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10만원 짜리 수표를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구겼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 수표를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사의 그 행동에 놀라면서도 역시 거의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좋아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10만원 짜지 수표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으며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 10만원 짜리 수표를 집어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또 다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때 강사는 힘찬 어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아무리 10만 원 짜리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했을 지라도 그 가치는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10만원 짜리 수표는 항상 10만원 짜리 수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허나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단지 여러분의 가치에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배에 올라타도록 인정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배를 조금만 띄라는 그 요청에 응하는 것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작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실패의 자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이루어지는 자리로 변화되는 축복을 경험하는 자리로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주님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의 자리인 배에 올라타셔서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은 신앙과 거리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바다의 소금이 3%만 있으면 바다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국회의원들 중 기독교인이 3%만 될까요?
우리 나라의 기독교 인구가 3%만 될까요?
아닙니다.
그 10배이거나 그 이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현실을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 자신의 방법, 자신의 자랑은 실패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모든 것보다 주의 말씀을 우선시 합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기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였다.

여기에서 ‘얻은 것이 없지마는’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러나’ 인 것입니다.

나의 모습, 나의 경험, 나의 지식을 앞세우고 싶을 때 ‘그러나’를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러나’까지 접근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나의 생각, 경험이 우선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러나’를 부정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롭다. 그러나 저 사람은
야 좋다. 하며 감탄사가 나오지만 어느새 “그러나 저 건…”
우리의 청년부가 좋다. 그러나…
하얀 백지 위에 ‘그러나’라는 자기 판단이 앞서게 됨으로 부정의 까만 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양궁을 할 때, 정신집중을 하여 과녁을 보면 그 주위보다 과녁에 커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의 판단과 경험만이 앞서게 되면 그 주위의 하얀 바탕은 온통 까만 세상으로 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말씀이 우선시 됨을 통하여 축복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은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예수를 통해 가능함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6절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실패하는 베드로,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자신의 방법을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던졌을 때, 바로 실천했을 때 그는 많은 고기를 낚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에 의지하여 고기 잡은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배도 채우는 놀라운 영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베드로가 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회개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지만 여기서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은 이사야서 6장에 나타난 이사야의 모습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나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단순한 회개의 모습이 아니라 그 회개의 모습이 만군의 여호와를 만나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갔던 베드로는 이사야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위엄 앞에 놀람과 회개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대면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청결하게 보여진 삶은 자신의 실패의 자리인 작은 배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인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합니다.

‘고기를 낚다’ 또는 ‘잡다’라는 말 대신해 주님은 베드로에게 ‘취(取)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고기를 낚는 일에서 사람을 취하는 제자의 길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오후 3시에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됩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자 그에게 구걸을 합니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하자
앉은뱅이가 어떻게 합니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보거늘’이라고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우리를 보라 했을때 앉은 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합니다.
그의 관심사도 오직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한때 고기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먹고 사는 일, 일반적인 세상 것에 대하여 집착하여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승천 후, 예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들어오면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남에게 영향력을 주기 보다는 자신의 배에 채워지지 않는 고기로 말미암아 실패를 맛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들어옴으로 금과 은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난 주님은 베드로에게 고기를 낚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취(取)하는 사람으로 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고기를 낚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기잡이를 통하여 낚는 사람이 아니라 취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고기를 낚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고기가 아닌 예수로 말미암아 취하는 영향력을 가지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에 이용규 집사님과 최주연 집사님이 고기 낚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취하기 위해 몽골로 가십니다.
이 취하는 자리에 여러분이 마음을 모아 함께 동역하는 자리가 우리 청년부에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고 함께 마음을 가지면서 두분의 자리에서 은과 금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땅을 일으켜 세우시는 자리가 되도록 함께 하는 여러분과 이용규 집사님 그리고 최주연 집사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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