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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에 미친 사람 (행 26: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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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설교 : 유흥준 목사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들 때 미쳤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재물을 너무 사랑하면 재물에 미친 사람이 됩니다.
권력에 미친 사람도 있고,
외모를 치장하고 가꾸는데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술 중독자는 술에 미친 사람이요,
게임 중독자는 게임에 미친 사람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말이 좋은 면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미친 경우입니다. <예수에 미쳤다, 교회에 미쳤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요, 정말 부러운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기도에 지친 한나는 나중에는 기도가 길어지면서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면서 기도하고 그런 모습을 본 엘리 제사장은 술 취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술에 취하고 술에 미친 게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취하고 기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기도에 미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사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기도에 미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요? 기도하는 척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에 미쳐 버릴 때 응답해주십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또 몸은 없는 것 같고 정신만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에 몰두할 때 기도에 미치게됩니다.

예수님께 미치는 것도 똑같습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입술 벌려서 <예수! 예수! 예수님 사랑한다>고 자꾸 말한다고 해서 미친 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만 나타나는 사람>이 예수님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겐 예수님만 소중합니다. 예수님만 귀하고 예수님만 값어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 영광을 받아야하고, 예수님의 이름만 높여야합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천국이 확장되는 일이라면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 나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든 다음에 악기 소리가 나면 누구든지 그 금신상 앞에 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약 절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던져 넣어 태워 죽이겠다고 합니다. 악기 소리가 나자 모두들 엎드려 절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3친구는 절하지 않았고 그래서 왕 앞에 잡혀왔습니다. 그들이 사느냐 죽느냐의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즉 이제라도 절하기만 한다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왕의 그런 태도가 긴장된 주변 분위기를 완화시키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3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처음보다 더 큰 긴장이 조성됐습니다. 풀무 불 속에 들어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절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했을까요? <미친놈들, 하나님께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겉으로만 절하는 척 흉내내고 속으로는 하나님 믿으면 될 게 아닌가>
3 친구가 어리석어 보입니까? 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적당히 믿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믿을 바엔 확실하게 믿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미칠만한 값어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재판중 입니다. 천부장,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고있습니다.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재판 받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계속해서 재판을 받고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적당히 믿었다면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적당히 믿었다면 목숨의 위험 앞에서 믿음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안 믿는 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미친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에 철저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한낮에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더 이상 나를 핍박하지 말고 나의 사환과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전파하여야 하리라>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1. 첫째 바울 자신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전한 것뿐임을 항변합니다(19-23).

1) 바울은 이러한 주의 명령을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 선교의 사명을 담당하
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 된 것임을 새삼 지적합니다(19-21)

19절 보세요.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거스리지 아니하고>의 뜻은 <내가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단 말인가>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명령을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①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②타인의 압력에 의해 수행된 것도 아니고, ③<하늘이 보여주신 거역할 수 없는 사명>에 근거한 것임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20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 만난 이후로는 바울은!
<먼저 다메섹에서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선전하므로>.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선포한 내용입니다.
①회개하고(마음을 빠꾸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②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그릇된 행실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옮겨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③ 합당한 일을 행하라(실행하라 행동하라, 계속해서 행위라는 열매를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고 전했습니다. 이게 참된 회개와 합당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면 잘 받아들입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거스리지 않고 순종합니까?
바울은 복음 전파하라는 사환과 증인의 사명에 목숨 바쳐 충성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또 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역시 전도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알면서도 감당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배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대표 축구 경기가 나를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예배시간에 TV앞에 앉아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국가대표 경기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 그 분들이 바로 바울과 같은 사람이요 예수님에 미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다 오직 예수님만  유일한 관심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을 거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거스리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자는 말씀이 들려질 때 순종하지만, 우둔한 자는 매를 맞아야 후회하면서 돌이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명령을 받은 다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실력 있는 축구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상대방의 혼을 빼어 놓는 것처럼 바울은 종횡무진 대 활약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고 그 결과로 가는 곳마다 믿는 자가 더해갔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21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바울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을 전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21:28절에서 바울의 죄목을 <율법과 성전 훼방죄>라 주장함은 가짜였음이 들어 납니다. 바울은 이런 죽음의 그늘에서 늘 무사했습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증거해 온 것은 구약 성경에 예언한 것 외에는 없음을 주장합니다(22).

22절 보세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유대인들의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오늘 이 시간까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하나님께서 바로 바울의 동맹자 조력자가 되어주셨다)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협에 처할 때마다 돕고 구해준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도움을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돕는 손길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제가 이날까지 목회 해 오는 동안 여러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광성교회가 여러분의 희생과 도움을 통해 이날까지 든든히 설 수 있었고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구로 사용하셨고 하나님께서 돕도록 명령을 내리셨기에 여러분은 순종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물질로 도울 수 있고, 기도로 또는 기타 방법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 때 목이 세워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세울 게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시니 주인 되신 주님이 영광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일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금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이날까지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이날까지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험한 세상, 악한 세상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은 오늘까지 만의 도우심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의 도우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제를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우리의 과거는 승리였습니다.
오늘을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우리의 현재도 승리입니다.
그리고 내일도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우리의 미래도 100% 승리입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행복하지 않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행복과 축복을 주신 주님께 늘 순종하며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바울 자신이 모함 당하는 이유는 구약에서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말씀의 성취를 전한 것 밖에 없다고 22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께 미쳐 쉬지 않고 전했는데 구체적인 예언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3) 곧 자신이 전한 바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부활하심으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는 종교적 신앙이었을 뿐임을 항변합니다(23)

23절 보세요.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구약성경의 예언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①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와 ②부활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과,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을 전파했다고 변론을 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2. 둘째 바울의 변명을 들은 베스도의 반응과 바울의 답변입니다(24-26)

1) 베스도가 바울의 변론을 다 듣고 나서 바울이 너무나 많은 학문으로 인해 미쳤다고 단정합니다(24)

24절 보세요.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베스도는 로마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은 미친 자의 말로 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을 수 있고, 또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베스도의 반응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믿는 자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베스도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미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요10:20)

2) 바울은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답변합니다(25)

25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베스도의 말에 대한 바울의 반응입니다. 
<나는 미친 게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참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반격합니다.
여러분 과연 누가 미친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예수님 위해 생명 건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아니면 전도할 기회가 주어져도 피하고 전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까?
예수님 믿으라고 강하게 외치는 바울이 미친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베스도 총독이 미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했습니까? 불신자의 눈에 여러분이 예수님께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진짜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 차린 사람이요 참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해 구원의 길을 주셨는데 그걸 믿어야 정상이지 믿지 않는 게 정상입니까?
하나님의 그처럼 크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미쳤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미쳤기에 못 믿고 재물 욕심에 미쳤기에 못 믿는 것입니다.
3) 배석한 아그립바왕 역시 자신이 지금가지 변론한 일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26)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예언과 성취는 세상 한편 구석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단언의 근거를 밝힙니다. 
3. 셋째 아그립바 및 청중들을 향하여 바울의 담대한 신앙 권고를 합니다(27-29)

1) 바울이 이번에는 아그립바 왕을 향해 선지자를 믿지 않느 냐고 확신에 찬 어조로 반문합니다(27)

27절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보다는 바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마찬가지로 거부합니다.

2)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적은 말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끔 설복하려 드느냐>고 힐난합니다(28)

28절 보세요.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지금 총독과 왕에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생 일대 최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가온 축복을 차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의 지위가 총독이 아니고 왕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세상의 잘난 것 때문에, 세상의 자신 만만함 때문에, 세상의 성공 때문에 그들은 가장 중요한 영생의 문제에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의미에서 감사해야합니다. 재물을 달라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하지만, 또 부자가 되면 더 이상은 소원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분의 가난함 때문에 믿게 됐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혹시 본인이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 믿고 나서 부자가 되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애초부터 부자였다면 약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구원시킬 수는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 응답의 기회를 주십니다. 능력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주십니다. 물질 축복의 기회도 주시고, 사명 감당하여 상급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주십니다.
교회 부흥의 기회도 주십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 살리는 기회도 주십니다. 주신 기회는 꼭 붙잡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붙잡아야 될 게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무엇을 붙잡아야 더욱 부흥될까요? 여러분이 무엇을 붙잡아야 될 것 같습니까? 찾았다면 그것을 절대로 놓치지 말고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이 자신의 말이 적든지 많든지 아그립바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자들이 결박 된 것 외에는 다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권고합니다(29)

29절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말이 많든 적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고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결박한 것 외에는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청문회 자리에 나올 때에 여러 겹으로 된 포박 줄에 결박되어 나왔습니다. 이 포박 줄에 결박 된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자가 자기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죄수인지 모를 것 같습니다. 죄수가 오히려 총독과 왕을 향해 호통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죄수가 최고의 권세자에게 큰소리 치면서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담대함과 생명을 내걸고 전도하는 열정 앞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담대함과 복음 전파의 뜨거운 열정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바울과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목숨 부지하겠다고 비겁하게 아첨하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주시면 능히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특히 우리광성교회의 강단이 담대한 강단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듣기 좋고 거부감 없는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죽이는 결과가 됩니다.
설교자인 제가 여러분에게 욕을 먹고 비난받는다 할지라도 복음은 복음답게 선포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대하게 선포되는 곳은 생수가 흘러 넘치는 곳이요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바울의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한국 교회 모두의 담대함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9절에서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처럼 예수님 믿고 영생을 누리기를 바란다. 나처럼 예수님 믿고 열심히 전도하기를 바란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의 앞에는 호화스런 옷을 입고 영화를 누리는 최고의 권세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서 있습니다.
즉 한쪽은 최고의 조건으로 또 한쪽은 최하의 조건으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하의 조건인 바울이 최고의 조건을 향해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큰 소리 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찔리는 게 없습니까? 솔직하게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많은 재물을 가지고 호화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적은 없었습니까?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큰 평수와 호화스럽게 꾸며진 광경 앞에서 부러워했던 적은 없습니까?
아는 사람이 좋은 직장에 취직했을 때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잘 생긴 연예인들 부럽지 않던가요? 그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지 무엇을 누리고 있던지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세상 사람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왕 중의 왕이요 모든 것의 주인이며 심판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을 깨닫는 날은 그들의 심판의 날일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자신 있는 외침 앞에서 여러분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나를 본 받으라, 나처럼 되라>는 말이 쉬운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평생동안 해볼 수 없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말을 했습니다. 바울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처럼 예배 드리라, 나처럼 기도하라, 나처럼 전도 열심히 하라, 나처럼 충성하라, 나처럼 순종하라, 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나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라, 나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라, 나처럼 교회를 위해서 눈물 흘려라, 나처럼 이웃을 용서하라, 나처럼 좋은 교사가 되어라>.
여러분 모두 다 그와 같은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4. 넷째 청문회의 종결 및 바울의 정치적 사법적 무죄를    인정받습니다(30-32)
30-32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다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재판이 끝났습니다. 왕과 총독을 비롯해 재판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전도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 가족 중의 누군가가 전도하겠다고 나설 때 반대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게 무죄라면 전도를 반대하는 것은 유죄에 해당됩니다.  바울은 무죄요 이제 그의 앞엔 로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예수님에 미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21세기의 새로운 로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곳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서야만 하고 여러분은 그 곳을 점령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라면 두려울 게 무엇이며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가 여러분을 부르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뛰어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여 놀라운 천국 확장을 이루어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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