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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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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대식 목사

우리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중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당신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완전히 변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뭐 세상에 변한 것이 없나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찾고 텔레비전 뉴스를 듣습니다. 현대 사회는 급변하는 세상이라서 변화의 정보에 둔하면 뒤로 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다 해도, 내가 그냥 이 자리에 머물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이런 세상의 변화가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변하면 우리는 세상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아마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 적이 한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암울한 잿빛으로만 보이던 하늘이, 어느 날 아침 홀연히 푸른 하늘로 보입니다. 누렇기만 하던 잔디가 생기가 넘치는 푸른 잔디로 보입니다. 새의 울음소리가 노래 소리로 들립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나무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며 내게 속삭이고,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변화를 내가 체험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세상이 변했을 때였습니까? 계절이 변했을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간밤에 내가 변한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변하고, 내 삶의 가치가 변하고, 내 존재됨이 변했을 때, 이 세상도 진정 변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메시지는 나는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사랑과 은혜로 역사하시는 뜻에는 이런 인간 변화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떻습니까? 내일이 없이 살던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내일을 개척하기 위한 인생 여정을 떠났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씨름하는 중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이름 없는 목동이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모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 대로 다윗이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으며 바울이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과의 만남은 곧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놀라운 사건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런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못 주변에는 각종 병에 걸린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누워있는 이유는 그 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의 병이 어떤 것이든 낫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그 못가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못가를 한바퀴 둘러보시고 나서 그들 중 가장 병이 오래된 사람을 골라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물음은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38년 된 병자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38년이나 병으로 누워있는데 그 병이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방식대로 대답한다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물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참 뜻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병이 나아 새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네 병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병에 익숙해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느냐, 아니면 새로워지고자 하는 의지가 아직 너를 움직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 중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짜 병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그의 마음 깊이 들어있는 ‘만성 의욕 상실증’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병명대신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초점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거기 누워있는 많은 병자들이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병을 고쳐보겠다는 당초의 절실했던 소망은 슬며시 접어두고, 타성에 젖고, 나태의 늪에 빠져 차라리 못가에 누워 지내는 것을 즐기게 된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 온 사람을 골라 정곡을 찌름으로 충격과 도전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의 38년 된 병자가 오늘날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자신 속에서 이런 만성 의욕 상실증의 요소를 찾아내고, 그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38년 동안 병들어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나와 같은지 모릅니다. 나는 그동안 돈병에 걸려서 38년, 허망한 것을 좇는 병에 걸려서 38년, 그저 인생을 낭비하고 하루하루 살아오는 것에 습관화되어서 38년을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나도 변할 수 있는가 묻지도 않고, 변화의 노력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왔다면 나도 그 환자처럼 만성 의욕상실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38년 동안이나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드나들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도 닮지 못했다면, 나의 믿음은 못가에 의미 없이 누워 있었던 그 환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교회, 평화 교회가 오늘에 만족하고 여기에 머무르며, 우리 삶의 자세와 신앙의 태도를 한걸음 더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고 그저 한 주일 한 주일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가 바로 이 38년 된 환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올 해 교회 표어를 “넘치는 은혜로 성장하는 교회”로 정했지만,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우리 신앙과 선교의 열심을 품고 내일에 도전해 나가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 교회는 만성 무기력증에 걸린 이 환자와 같은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가슴 속에 진정 낫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 그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변하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롭게 살기를 갈망하느냐? 너희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내일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느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느냐?”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물음에 대한 그 환자의 대답은, 예나 아니오 중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확한 의사는 밝히지 않고, 엉뚱하게 그동안 병이 낫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부터 댑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의 말 속에는 두 가지 생각, 즉 불평과 핑계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38년 동안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불평이고, 둘째는 항상 자기보다 한발 앞선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겼다는 핑계입니다.

그는 곧 의욕상실증 뿐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와 매사에 불만 불평하는 병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에게 사랑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깨달았으면 훌훌 털고 일어 나거라. 그 나태함, 그 의욕 상실증, 네 속 깊이 박혀있는 그 핑계 병으로부터 과감히 떨치고 일어나 새사람으로 살아 가거라.”

그리고 놀라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38년간 누워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 한마디 말씀에 일어날 염두를 내겠습니까? 그러나 그 병자는 자신이 영혼과 육체 속에 남아있는 온 힘을 다하여 일심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일어섰습니다. 그는 나아서 자리를 메고 걸어갔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변화의 역사가 발생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메시지는 “당신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변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소생할 가망성이 없어 보였던 그 병자도 예수님의 말씀에 부딪쳐서 새사람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라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게 말씀합니다. “당신은 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다시 일어나 뛰기 위해서는 새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 주님이 나를 변화시킨다는 확신과 나도 변할 수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새롭게 만나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영은 바로 나에게 이와 같이 말씀 하시면서, 머무르지 말고 변화하라고 외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변한다는 실재는 무엇이겠습니까? 진정 변화한 나는 어떤 내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실 일찍이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변해서 새 사람된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안목이 바뀐 것이라고 체험자들은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매달렸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아주 큰 새로운 체험을 하고,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생활의 최고의 기쁨이요, 보람이었던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더 귀한 일을 깨닫는 안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유대의 율법이 인생 최고의 가치요, 삶의 지침이라고 생각하던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로 구주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신앙의 새로운 안목을 뜨게 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수고하고, 땀 흘리고, 바쁘고 분주하게 살았으나, 어느 날 그 모든 생활 태도가 허무한 것으로 느끼는 순간, 허무를 뛰어넘는 영적인 세계, 영원과 이어지는 세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때 비로소 신앙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적이고 감정적이며 정신적인 존재인 줄 알았으나, 또 다른 나, 새로운 차원의 나를 발견하여 영적인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변화 체험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변한다는 것,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단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져 있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나, 그것은 내가 이 세상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 됨의 긍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의 가치, 하늘나라의 가치대로 내가 변하고, 그 가치대로 사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의 말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 40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애굽을 떠난 해와 가나안에 도착한 해를 빼면 광야 생활은 38년이란 계산이 나옵니다.

이렇게 38년 동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매며 지치고 때로는 포기하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다시 말하자면, “너희들이 진정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느냐, 너희들이 진정 변화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미래에 살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는 이에게 “이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거라” 우리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베데스다 못가의 환자를 생각하며, 나를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하시고, 신앙 안에서 긍정적이며 능동적으로 살게 도우시는 우리 주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 인생의 남은 세월을 변화된 모습으로 힘차게 사는 축복받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9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늦더위가 물러서려고 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과 신앙의 옷깃을 여미면서, 새로운 자세로 우리 인생의 길과 믿음의 길을 달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며, 오늘 우리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걷고 뛰는 생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인도하시고자 하는 교회의 내일, 우리 민족의 내일을 바라보면서 진정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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