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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삼상 12: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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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그저께는 우리 평안의교회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한정금성도가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었는데, KBS 2TV의 VJ 특공대에서 혈액 수급이 비상이라며 특별취재를 나왔다가 우리 성도들이 자매를 위하여 너도너도 헌혈하는 모습을 감동이 되었습니다. 헌혈자를 찾는 일부터 헌혈하는 장면,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장면까지 아주 감동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아쉬움이 있다면 자매가 아침 일찍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30분 가량 예배를 드렸는데 PD와 카메라멘이 와서 열심히 찍었으나 정작 방송에서는 예배 장면은 보여주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어제 남편되시는 이성수형제께서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렸는데 어떤 전이도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육신의 연약함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오히려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사랑의 공동체임을 재확인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도마청장년선교회는 그동안 회원 가족 중에 여러번 크고도 어려운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오히려 그런 일들로 인하여 선교회가 단합하고 기도하는 등 하나됨의 큰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어제는 15명인가 16명이 함께 병원으로 위로심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에는 속회에 서너명 모이기도 벅찼었는데 말입니다. 역경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사무엘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길갈이라는 곳에 모이게 한 후, 아주 중요한 선포식을 갖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6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선지자는 역사적인 하나님, 다시 말하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확인시키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셨고, 너희 열조를 고난의 땅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신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여호와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엔 모태신앙도 있고 몇 십년씩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그런 분들 가운데서 속상하거나 화가 나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흥회를 할 때 강사님이 물어봅니다. ‘구원에 확신을 가지신 분들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이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그러한 모습을 보면 복장 터지는 사람은 담임목사이지요. "아니, 저런 사람을 집사, 권사로 세웠나........"

지난 번 어린이 부흥회 하는데 제가 굉장히 속상했어요. 강사님이 ‘주님 만나지 못한 사람 손 들어봐요.’ 그러는데 보니까 오래 믿은 집사님 , 권사님 자녀들이 손을 들더라구요.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어쩌면 우리 어른들처럼 겸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이나 주님과의 동행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든지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겠습니다" 등은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는 고백의 내용들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기쁘셨으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하시며 축복하셨겠습니까? 주님은 믿음의 고백을 너무나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조차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이 임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언약갱신을 통하여 너희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11절은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이 곳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요, 사사 시대에 하솔 군장 시스라와 블레셋 사람들, 그리고 모압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에 백성들이 두려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여룹바알이나 베단, 입다나 사사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나 사무엘까지도 이 땅에 보내셔서 너희를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제도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내일에 대한 고백도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0절 중반에 보면,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고백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우리가 바알들과 아스라롯을 섬겼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9절입니다.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 하나님 중에 한 하나님이 아니예요. 우리 하나님은 신들 중에 내가 선택한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가 대학에서 종교를 배우는데 종교철학 그런 과목이 있어요. 종교철학은 종교다원론에 빠지기가 쉬워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이런 많은 종교 중에 하나를 내가 믿고 있는 거예요.

또 많은 신학의 현장에서 종교다원론적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어요, 신앙의 열정과 확신을 가진 젊은이들이 기독교대학에서 예배를 드리다보면 굉장히 화가 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가 떨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믿음 떨어지는 불신앙의 이야기나 다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믿음없이 억지로 채플 점수 때문에 와 앉아 있는 그들에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신학대학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느 교수는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는데 종교다원론적인 엉뚱한 소리만 계속하자 뒤에서 목사님들이 듣다가 도저히 계속할 수 없어서 도중에 하차시키고 말았답니다. 그런이들이 주의 종이 되겠다는 신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물론 신학의 다양성은 우리가 학문적인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백은 달라야지요.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평안의 교회는 황요한목사가 복음주의적 신학의 노선을 가지고 목회하는 현장입니다. 여기서 종교다원론을 이야기하고, 여기서 종교철학을 이야기 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신앙의 노선을 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곳으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이 지적하는 시대적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많은 종교와 우상 속에 빠져 살다보니 결국은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에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질병에서 고통 받을 때에 치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외로워서 눈물 지을 때 위로하시며 다가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너희가 잊었다는 거예요. 언제 잊습니까? 대체로 두가지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잊어버립니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다른 새로운 것에 내 삶이 빼앗겼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 있어요. 지금 이스라엘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떠난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그들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무엇입니까? 농사에 필요한 풍요의 신입니다. 풍요의 신을 섬기는 그들의 이유는 분명하지요. 잘 되기 위해서, 형통하기 위해서, 축복받기 위해서입니다. 돈벌이만 된다면 귀한 사명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 돈벌이만 된다면 예배의 자리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 쾌락과 즐거움만 있다면 예배의 자리는 그저 지루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하실 일이 없어서 쾌락의 장소가 없고, 여러분을 풍요로 이끌 어떤 또다른 유혹의 자리가 없어서 이 자리에 나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할 때에 고백처럼 지금 사무엘은 길갈에서 새로운 언약 갱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씀을 증거했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스스로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었습니다. 우리가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는 풍요의 신을 따라서 우상을 숭배했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예배를 커녕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취미생활을 위해서, 토요일 저녁이면 낚시가고, 등산가고,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는 사람, 그래서 사명이 있어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런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주일 예배를 멀리하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연락이 오지요. 달려갑니다. 아이고, 죽을 뻔 했네요. 자동차는 다 구겨져서 폐차합니다. 수리도 되지 않습니다. ‘집사님, 경찰관이 그러는데요. 이렇게 차가 망가진 상황에서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 기적이래요.’ 저는 그렇게 확신해요. 하나님께서 교통경찰관의 입을 통해서 집사님에게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사님이나 전도사님이나 우리가 심방을 갈 때, 실수 하는 것이 하나 있지요. 평소에 집사라는 분이 주일예배를 밥 먹듯이 빠지지, 봉사의 자리에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지, 육신의 정욕과 즐거움을 위해서 그저 바쁜 인생, 그러다가 사고가 꽝 났어요. 가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얻어 터졌구만. ‘김집사, 이건 말이야.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거야. 알고 있지?’ 본인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은 반발심이 생겨요. 이상하지요? 심방 가서는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면 안 됩니다.

‘이야기를 주욱 들어보니까 세상에, 차가 폐차가 되도록 된 사고였는데, 집사님 어떻게 살아나셨지? 하나님께서 집사님 너무 사랑하시는가봐.’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 드려야 되요. 시간이 가면 스스로가 깨닫습니다. ‘아, 아직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붙드시고 계시구나.’ 두 번 세 번 심방 갔을 때, 자기 스스로 ‘전도사님, 권사님, 제가 이 병상에서 생각해 보니까,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아요. 회개합니다. 정말 잘못된 내 신앙 회개합니다.’

예배를 빠지고 어디를 갔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그 행위가, 그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거지요. 그것을 스스로 고백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제일 좋은 것은 본인 스스로가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본인이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 구원 받았잖아? 너 거듭났잖아?’ 아무리 옆에서 어머니가 아버지가 이야기 해도, 모태신앙이라고 본인이 확신이 없으면 말 못 하는 거잖아요. 내가 고백하는 것이 중요해요. 회개의 자리도 내가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미 급한 사람이 다그치려고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나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실치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우상을 숭배했음을 인정하는 이 고백을 기초로 하면서 새롭게 하나님 앞에 언약이 갱신되어지는 새출발이 된 줄로 믿습니다.
16절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그들의 고백을 듣고 나서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이제 새로운 갱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 이제는 거듭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사무엘선지자는 새로운 선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목전에서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지금이 밀을 베는 때가 아니냐. 지금은 건기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지금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실 우기라고 해도 지금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루 비오는 것만치도 하루 강우량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땅을 적실 정도, 그래서 들에 있는 풀들이 겨우 꽃을 피울 정도에 그런 정도에 비가 우기에 내리는 거예요. 건기는 비 한 방울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그 비가 조금 오는 우기도 아니고, 건기에, 밀을 추수할 건기에 내가 너희에게 우뢰와 비를, 다시 말하면 폭우를 쏟아 부어주겠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승리한 후에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면서 큰 비가 내릴 터이니, 빨리 이스라엘 평야를 지나가야 한다고, 아합왕과 백성들을 재촉한 것처럼 그 때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큰 비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밀을 베는 때, 건기 때 더구나 비와 우뢰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출발하려는 자녀들에게 내가 언약갱신의 증거로써 내가 너희에게 큰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못 된 부분들을 우리 스스로 고백하는 고백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내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섬기는 이유는 있었겠지요? 내게 유익이 된다고, 풍요의 신을 따라가서 사업이 잘 되고, 내 건강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새벽기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약수터로 가지 않았습니까?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아스다롯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 시간에 돈을 벌면 잘 벌거라는 풍요의 신의 유혹에 따라갔기 때문에, 그런데 아니었잖아요.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늙어서 이제야 깨달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봉사하고 회개할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자신을 고백하고 오는 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 앞에 큰 일을 행하리라. 그럼으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행하시는 일을 보아라.

이제는 전심으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언약을 갱신하고, 새롭게 주님의 자녀로써 출발하기를 원하는 길갈평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이시대에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주님 앞에 언약 갱신을 통한 새로운 신앙의 출발에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연을 주관하시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도 주님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며, 돌아와 주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기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시간 길갈 평야에서 언약을 갱신하기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우리들 자신이 다시금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며 우리의 잘못된 삶의 부분들을 회개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능력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다짐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권능으로 함께 하시고,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우기에도 상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들을 밀을 베는 때에 건기에 역사하시며 증거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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