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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멀찍이 따라간 사람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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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송기현 목사

  가끔 믿는 사람들에게서 "난 교회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신앙생활하렵니다. 난 목사님과는 먼 거리를 유지하며 신앙생활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하다가 상처를 입은 모양입니다. 믿었던 교회로부터 믿었던 목사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좀처럼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중에는 나쁜 교회가 있을 수 있고 목사님 중에는 아주 질적으로 나쁜 삯꾼 목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가까이 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분별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두번 겪어보아서 아니다 싶으면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도 무슨 의리지킨다고 계속해서 가까이 하다가는 정말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영적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나중에는 교회 때문에 목사님 때문에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신앙은 어쩌면 교회보다도 목사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신앙을 잃고 지옥에 떨어지고서야 어찌교회가 소중하며 목사님이 소중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신앙을 잃어버린 일은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올림픽의 하이라트는 머니 머니 해도 마라톤입니다. 마라톤을 끝으로 해서 경기가 종료되고 폐막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번 마라톤 경기에서 참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전체코스 88% 지점까지 홀로 1등으로 달리던 선수을 한 종말론자가 그 앞길을 가로막고 그를 길가로 끌어내어 넘어뜨려버렸습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수습이 되어 곧장 다시 일어나 달렸지만 지치고 괴로운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리듬은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 때문인지 5분 뒤 그는 2위와 3위 선수에게 추월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늦은 시간에 내가 텔레비젼을 보게 된 것은 우리나라 이봉주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봉주는 내 안중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남의 나라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젼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그가 혹시 완주를 포기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가 끝까지 달려 금메달을 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불안감과 관계없이 끝까지 열심히 뛰었습니다. 또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열심히 달려 결승점인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에 들어섰고 새처럼 양팔을 편채 트랙을 지그재그로 달리는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며 3위로 골인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리마! 리마!"를 연호했습니다. 리마는 그 멕시코 마라톤대표 선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입맞춘 두 손을 관중에게 보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날 완주시킨 것은 올림픽 정신이었다"고.
  결국 그에게는 금메달보다 더 값진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의 이름을 딴 "피에르 쿠베르탱 메달"이었습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경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고 메달 수여 취지를 밝힘으로써 리마를 금번 올림픽의 진정한 영웅으로 대접했습니다.
  나는 성도들에게도 이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이 우리를 넘어뜨리지만 결코 우리가 넘어진 것으로 인해서 신앙의 경주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벌떡 일어나 결과와는 관계없이 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등이나 2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난 완전자라" 하십니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와 같이 완전한 자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가까이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를 가까이 하면 오히려 어려분들은 마음에 평강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를 가까이 하면 위로를 받습니다. 주를 가까이 하면 그 지신 십자가로 능력을 받습니다. 주를 가까이 하면 흘리신 보혈로 정결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어려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했습니다.
  여호수아 22:5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48:14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몇절은 더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이만큼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친근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며 하나님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신앙생활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면 반드시 신앙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기업가가 시대와 소비자를 멀찍이 뒤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가 스승을 멀찍이 따라가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기자가 사건을 멀찌기 따라간다면 그 기사가 어떤 기사가 되겠습니까?
정부나 정치가가 여론을 멀찌기 두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 남이 연구한 기술만 멀찍이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기술자를 둔 나라는 언제나 후진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멀찍이 떨어지니까 애초에 앞서가는 선수를 따라잡을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코아가 비슷비슷할 때, 가까이 따라잡아갈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앞서갈 수도 있는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멀찍이 뒤떨어져 따라가면 기회를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 더러는 부모가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고아로 자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한눈을 팔면서 멀찍이 따라가면서 장난짓하다가 붙잡고 가던 부모님 손을 놓쳐버리고 부모님의 족적을 놓쳐버려서 일평생을 고아로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한순간에 부모를 멀찍이 따라가다가 고아로 살아가는 그 운명이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항상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던 제자중에 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가 오늘 따라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니라"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서의 기자인 누가가 무엇인가 해야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멀쩍이 따라간 자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저주까지 하며 심한 부인을 하고만 것입니다. 사실 스승이 붙잡혀가면 나도 잡아가라고 앞에 나서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해버렸고 그리고 베드로마져도 멀찍이 따라만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찬스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가려면 바짝달라붙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 만큼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닮을 려고 하면 빼박도록 담아야 합니다. 모창 가수들이 있습니다. 나훈아나 조용필이나 이들의 노래를 모방해서 부르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얼굴도 비슷하고 노래하는 제스쳐나 음색도 음정도 모두 비슷합니다. 그것은 끝임없이 따라가는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만큼 되는 일이 우선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가까이 따라가는 것이 최우선되어야 합니다. 시작부터 멀리서 시작하는데 스승의 근처에도 못미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목표를 세웠든지 그것을 이루려고 하면 멀리서 구경꾼과 같은 자세로 임하시면 안 됩니다. 바짝 따라붙어서 힘써 좇아가므로 목표치에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고백하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목표와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복음입니다. 예수사람이되는 것이며 복음인이 되는 것이며 복음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와 목적을 이루려고 하면 예수를 친근하고 예수를 가까이 하고 결국 예수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일치와 합일을 통하여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공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꾸 수비하고 뒤로 물러가고 도망치고 눈치나 실실 보며 하는 신앙생활은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지금까지 침노하는 자에게 침노를 당하느니라(마 11:12)하셨습니다. 침노하는 공격적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부간에는 친근함이 있어야 합니다. 친근함이란 둘 사이에 끼여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친구사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도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는 친구사이인 것입니다. 둘 사이에 무엇이 끼어드는 순간부터 친금감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자기 믿는 신에 대해서 친근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 역시 신앙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것도 끼여들지 못하도록 여유를 남겨 놓지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고 끼어들어 우리를 하나님과 멀찍이 떨어지게 만든 것들을 이시간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아무리 버리기 아깝고 소중한 것들일지라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멀찍이 좇은 신앙생활을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님을 친근히 함으로 주가 주시는 능력을 새롭게 힘입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가까이 느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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