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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매일 새롭다 (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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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한신교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는 우리의 일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날들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잡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되풀이 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하루의 삶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루는 살고 하루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산 날인 동시에 죽어간 날입니다. 매일 매일 삶과 죽음이 교차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마다 죽어가는 것만 생각하며 허무하게 일생을 끝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날마다 새로운 삶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삶에 집착하지만 죽음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죽음을 보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것과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는 고백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매일 자기 죽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매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낙심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낙심은 의욕을 상실해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낙심은 인간을 죽음으로 휘몰아갑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욕망을 성취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꿈이 깨지고 어떤 욕망의 성취를 이루지 못할 때 좌절하고, 실망하고, 자기 인생이 끝장이라도 난 것처럼 낙심하게 됩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그렇게 일생을 날마다 지친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가운데서도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사업을 성취하고, 학업을 이루고, 이 땅에서 물질의 부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굶주리면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면 신음하고, 역경이 휘몰아치면 고뇌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았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스승은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주는 분입니다. 사는 것을 가르쳐주는 분입니다. 부모도 인생을 가르쳐주면 스승이 됩니다. 목사도 인생을 가르쳐 주면 스승이 됩니다. 스승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스승을 하나 만날 수 있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성경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있지만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쳐 준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천년 교회사에서 우리에게 삶의 진리를 가르쳐 준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삶을 가르쳐준 스승으로 만났습니다. 그가 성경에 기록한 모든 증언들은 모두 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약한 것 같았으나 강했습니다. 그는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탄식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인생을 희망적으로 살아갔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든,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 내가 무슨 직업을 가졌든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난이 휘몰아치면 그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는 찬란한 미래를 보는 영롱한 빛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난에 처할 때는 가난을 하늘의 부요로 바꾸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날마다 자기 존재를 새롭게 보면서 살아가는 신비한 비밀이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는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 보배가 뭘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사도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가진 것이 그가 지닌 보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기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9)라고 했습니다.
"내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은 낙심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겉사람이 후패하는 것 때문에 낙심한다.' 인생이 가고 있다는 것,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환란 때문에 낙심하고, 셋째는 세상을 보면서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사도 바울은 환난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18절). 그는 영원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서 새로운 존재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새로운 것을 느끼려고 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꽃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어린 아이를 통해서 새롭게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식물 속에서 새로운 움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존재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러분은 무엇 하느라고 늙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 버느라고 늙었습니까 밥 먹고 사느라고 늙었습니까 세월이 가니까 늙었습니까 인생이 다 늙어가고 있습니다. 청년들도 말은 않지만 늙어가고 있습니다. 대개 14세까지는 젊어지고 15세부터는 늙어간다고 그럽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수염이 슬금슬금 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인생은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에 변화 좀 주었다고 '젊어졌네' 그러면 거기에 속지 마세요. 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사람을 육체적으로 나약한 질그릇으로 보았고 속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거듭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속은 날로 새롭다' 이것은 속사람을 말합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겉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육체에 속한, 육신에 속한 인간이요, 속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날로 새롭다는 말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육적 자아가 후패하는 것과 반비례해서 영적 자아는 날마다 갱신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물의 세계도 땅에 심겨진 씨앗은 겉껍질이 썩어지므로 새 움이 틉니다. 달걀은 껍질이 깨져야 병아리로 탄생됩니다. 감은 홍시가 되어 과육이 물렁해질수록 생명이 담긴 씨앗은 단단해집니다. 대리석은 조각가의 손에 깎여 나갈수록 그 속의 조형물이 살아납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이 80이 되고 죽음이 가까웠을 때 "내 늙은 몸속에 새 생명이 움터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늙으면서 허무만 얘기만 하고 있다면, 맛사지 바르는 데만 힘쓰고 있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 이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고백해야 됩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내 인간됨이 무엇인가 새로운 면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으면 안됩니다. 늙으면 뼈도 굳고, 몸도 굳고, 생각도 굳고, 모든 것이 다 굳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자꾸 새로워지고, 생각이 새로워지고, 자기 존재가 변하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의 환경

우리는 환경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자기 속에서 발견해야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현실을 눈으로 보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을 당할 때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환난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합니다. 환난은 내 인생의 화려한 꽃들을 다 떨어뜨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에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함이니" 사도 바울은 환난을 잠시 받는 것으로, 가벼운 것으로 봤습니다. 그것은 환난을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대한 것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에서 잠시와 영원, 환난과 영광, 경한 것과 중한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잠시 받는 고난에서 영원을 보며 그 영광의 중한 것을 생각할 때 '어떤 환난도 가벼운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에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보화를 얻고, 새로운 미래를 보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환난의 연속입니다. 누구도 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고통, 이별, 슬픔, 배신, 경제적인 손실, 사업의 실패, 가정의 어려움 연속되는 환난의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난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으로 끝나는 비참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영광을 현실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생만 하면 고생독이 들어옵니다. 실패만 하면 실패독이 들어옵니다. 또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환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그 환난에 시달리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한가지를 해야 됩니다. 환난 속에서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시련 속에서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고생을 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함이니"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별세의 신앙을 통해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고생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고생을 통해서 예수를 얻어내야 됩니다. 예수의 인격을 얻어내야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은혜를 얻어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환난은 자기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자기만 실패하는 것 아닙니다. 더 많은 실패자가 있습니다. 병들었다고 하지만 자기만 병든 것이 아닙니다. 병원에 가면 죽을병 걸린 사람도 많습니다. 가난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자기만 가난하게 사는 것 아닙니다. 서울에 250만 세대가 살고 있지만 그 중에서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이 30만 세대나 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잠시 받는 환난이 경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는 환난을 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죄인 됨으로 봐서는 환난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죄인됨을 생각할 때 자신이 받는 환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영원한 소망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18절)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현실로 매일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 감옥을 별장으로 만들어 살았습니다. 환난이 올 때 환난에 매인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거야'  '육체는 썩고 후패하는거야 이것은 소용이 없어 예수만이 최고야'  '이 세상은 모두 죄악된 세상이야'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겉사람을 통해서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봅니다. 허무한 것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환난으로 나는 망했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둘째, "환난은 피해야 돼 환난 없이 살기 위해서 복을 받아야 돼 환난 없이 사는 사람이 복이지" 이것은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쫓아서 환난을 통해 영원한 영광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셋째, "보이는 것은 허상이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가 있지" 이것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옛날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을 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말은 성철 스님이 한 말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큰 스님들이 한 말을 조금 인용해서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에 무슨 굉장한 진리라도 있는 것처럼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그럽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처의 도를 깨달으면 산과 물은 이미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 속에서 창출된 것이니 산 속에서 물을 보고 물 속에서 산을 보는 그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단계를 넘어가면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데 물 속에서 산을 볼 수 있고 산 속에서 물을 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는 그런 삶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득도해서 견성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작을 패면서도 구도를 하고, 우물을 길으면서도 그 속에서 신비를 보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그 속에서 불성을 채운다."

사도 바울은 육체 속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환난에서 영광을 보고, 보이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면서 죽으나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깊은 경지로 인생을 승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롭다' 이것은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나는 날마다 새롭다.' 이 신앙이 동시적으로 함께 어우러져 오늘 한 날도 내일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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