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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예수 믿고 운명을 바꿨다 (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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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알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태어날 때 타고난 운명, 피할 수 없는 운명 이것을 숙명이고 말하고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힘, 자연적인 힘을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family name' 다시 말하면 성씨를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집 아들로 태어나야지' 하고 생각한 일도 없는데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고, 그 성씨에 따라서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부모를 만나므로 우리의 용모가 부모를 닮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질과 성격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육체적인 체질 때문에 병까지도 부모에게서 유전이 됩니다. 이것은 운명적 만남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이 내 일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두번째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만난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물론 내가 선택해서 만났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났든, 부모의 중매로 만났든 일단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만나는 것도 운명적 사건입니다. 양가의 가문에서 성장해서 기질과, 체질과, 성격이 형성한 두 사람이 만나서 갈등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평생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좋은 부모를 만나서 좋은 용모와 좋은 체질을 받아서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부모 만나서 고생하면서 힘들게 삽니다.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까다로운 배우자를 만나서 눈물로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일생을 편안하게 살 것을' 그러면서 한번 살다 가는 인생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통한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배우는데 보냅니다. 적게는 20여년, 박사 과정까지 하려면 24-5년에 걸쳐서 공부를 합니다. 그 많은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생을 만나지만 그 관계는 모두 학생과 선생의 관계로 끝납니다. 그런데 내 일생을 좌우할만한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그것은 스승과 제자의 만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기 때문에 큰 운명적 사건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가슴이 설레이도록 감동을 주는 스승을 하나 만나게 되면 내 인생에 큰 사건을 이루게 됩니다.
저도 20여년동안 공부를 하면서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내게 스승은 딱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국사를 가르치신 선생님입니다. 그 분은 내 마음속에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이라는 말이 좋아서 한국신학대학을 들어가게 되었고, "한국 민족을 신자화 하자"는 한신교회를 탄생시켰으며, '민족을 살리는 비전'이라는 설교로 대통령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이북 땅을 밟으면서 이북에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슴이 설레이도록 감동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 생에 놀라운 스승이 또 있습니다. 그 분은 제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그 분들은 학문적으로 나에게 지성을 가르칠만한 실력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에 수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감동을 주면서 나를 이끌어준 하늘이 보낸 스승이 바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스승까지 된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어놓는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보통 부모는 혈육을 물려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공부시키는 후원자로서 끝납니다. 그러나 부모가 들려준 한 마디가 나에게 감동이 되었다면 이것은 엄청난 운명적 사건이고 축복의 사건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이 세상에 다시 살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보고, 또 좋은 스승도 만나서 살고 싶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또 태어난다고 해서 좋은 부모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모도 나에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도 내 생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또 좋은 성적을 가지고 좋은 대학을 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간다고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을 만날 뿐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손자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를 했습니다. "조부님께서는 민족을 사랑하셔서 '경찰서 100개를 짓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짓는 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위대한 그 비전과 정신을 담으셔서 교회 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용모에 만족하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성격에 만족하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학력에 만족하지 못합니까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떤 열등의식이 있습니까 오늘 한번에 해결해버리십시다. 그것 때문에 일생동안 괴롭게 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를 영접하면,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60년 전 가난한 시절에는 아이들 간식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씩 엿장수가 와서 엿을 팔면 그것을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엿을 한번 먹으면 너무 맛있어서 손가락까지 빨아먹었습니다. 엿을 사먹는 것도 그때 당시에 누가 용돈을 줍니까 궁핍하던 시대라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까 용돈으로 엿을 사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엿장수가 오면 "깨진 양재기, 부러진 숟가락, 어머니가 잘라놓은 머리카락, 고무신 떨어진 것 가지고 오십시오." 하면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집에 가서 엿으로 바꾸어 먹을만한 것은 다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엿을 한가락 떼어 주면 그것 먹기가 아까워서 조금씩 아껴먹고 또 누가 빼앗아 먹을세라 얼른 침을 발라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들은 집안의 못쓰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새 물건으로 바꾸어 갑니다. 엿장수는 깨지고, 부서지고, 못쓰는 것을 다 받아서 새 것으로 바꾸어주고 가위질을 하면서 돌아갑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교회는 바꾸어주는 집이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처난 인간들을 치유해서 건강한 인간으로, 불행한 인간들을 행복한 인간으로 바꾸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땅에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병든 것 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뭐하러 오셨습니까 우리를 고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어떤 배우자를 만났든, 어떤 학교를 나왔든 그것은 불행한 운명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것으로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해 아래 어떤 사람도 만족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지고만 오너라. 병을 가지고 오라. 상처난 것을 가지고 오라. 깨어지고 부서진 것을 가지고 오라. 그러면 내가 바꾸어주리라"

"영접하는 자" 영접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모신다'는 말입니다. 문을 열고 모시는 것이영접입니다. 문 닫아놓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영접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정중하게 안방으로 모시는 것이 영접입니다.
예수님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돌아가지 마십시오. 교회당에서 만났다가 돌아가지 마십시오. 마음문을 열고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운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운명을 바꾸어놓은 효자가 누구입니까 부모에게서 외모를 받는다든지, 성씨를 받는다든지, 재산 상속 받는 것으로는 운명을 못바꿉니다. 그 부모를 가슴에 모셔들인 자식이라야 운명을 바꿉니다. 아내와 수 십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운명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내를 가슴속에 모시고 '눈물이 나도록 소중한 사람, 하늘이 보낸 사람이구만' 이렇게 만날 때 운명을 바꿉니다. 선생님을 수십년 만났으나 교실에서 만나고 헤어진 선생님은 운명을 못바꿉니다. 그 중심의 마음 문을 열고 눈물을 흘리는 감동으로 만나면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접하는 자" 예수를 내 안 깊은 곳에 영접해서 어떻게 모십니까? 주님으로 모십니다. 주님은 내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부모를 잘 만났어도 사람 만난 것입니다. 아무리 배우자를 잘 만났어도 사람 만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승을 잘 만났어도 사람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내 안에 모시면 내가 사람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요, 죄인이 아닌 하나님의 의인으로 바꾸어집니다. 죽음의 사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천국의 사람으로 바꾸어집니다.
저는 예수 믿고 언제나 스릴을 느낍니다. 내가 예수를 안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어쩌다가 내가 예수를 믿어 이 복을 받았나' 생각해보면 온통 이 세상이 신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자녀가 되는 것은 운명적 사건인데 내가 어느 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집니까 성씨도, 가문도, 인물도, 부모의 애정도 다 바꾸어집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손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봐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내가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 우리나라 말로 하천풍언은 위대한 성자요, 전도자요, 저술가였습니다. 얼마나 유명한 성자였느냐? 간디, 슈바이처, 하천풍언을 20세기 3대 성자라고 말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점령할 때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최초로 만난 사람이 하천풍언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태생은 아버지는 시장이었지만 어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첩이었습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시절 '첩의 자식'이라는 놀림과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는 첩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얼굴에서 웃음을 잃었습니다. 어느날 울적한 기분으로 담 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 악대가 지나가면서 나팔을 붑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때 그 음성이 하천풍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나같은 기생의 아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사랑한단 말인가'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기생의 아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나요?"  "아, 그렇지요. 하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합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주님을 위해서 일생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빈민굴에 들어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의 운명이 바꾸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내면에서 분노하고 불만하는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이러한 모든 운명은 순간적으로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러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부모도 사랑을 떠나는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사랑하지만 나이가 들면 부모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운명을 바꾸어주십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혈통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자식을 낳기 위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하면서 가정을 바꿔가며 역사를 이룰 정도로 혈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수양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안됩니다. 죄인의 자식에게서 의인이 나오는 수도 있고 성자에게서 악한 자가 나오는 수도 있지만 결국 유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 자식이 부족하게 되는 것도 아니요, 또 부모가 잘났다고 해서 그 자식이 잘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이 있는 것처럼 내 자식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저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생의 노다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no touch'를 했습니다.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자식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던거죠. "너 언제 학교 가느냐, 언제 졸업하느냐, 점수는 몇 점이냐, 공부는 잘하냐" 물어본 일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폐병이 들어서 각혈하는데도 우리 부모님은 "어디 아프냐"고 한번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자식이 병들었는데도, 얼굴을 보면 병이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금방 알 수 있는데도 물어보지를 않았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제가 결혼할 때도 "누구랑 결혼하느냐 결혼은 어떻게 할거냐 앞으로 직업은 뭘 가질거냐" 한번도 물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no touch'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no touch'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부모가 아무리 인정이 없다한들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대들은 'no touch'해라" 그러신 것 같습니다.

'no touch'라는 말은 옛날에 금광에서 우리나라 말로 '노다지'라는 말로 바꾸어졌습니다. 어느 금광에서 바위를 뚫다가 금이 쏟아지니까 현장 책임자인 서양 사람들이 금을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no touch'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귀에는 '노다지'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no touch'가 '노다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no touch'로 말미암아 내 인생은 '노다지' 인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이 속에 '노다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므로 내 인생은 모든 것이 다 복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원망한다는 말은 'touch'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간섭하는 것입니다. 'no touch' 하십시오. 내게 노다지 인생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또 나에게 이런 은혜를 받게 하신 부모님을 'no touch' 하십시오. 터치하면서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노다지 아버지' 그렇게 보십시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보화를 담은 노다지 아버지다. 나를 보화로 만들어준 아버지다." 그렇게 믿으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운명이 바꾸어지니까요. 아내를 'no touch' 하십시오.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보기도 아까운 노다지 아내입니다. 남편을 'no touch' 하십시오.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의 보화로 받으십시오. 자식을 'no touch' 하십시오. 예수를 영접하게 해서 하나님의 노다지가 되게만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노다지 인생으로 만드십시오. 노다지 직장을 만드십시오. 노다지 가정을 만드십시오. 노다지 천국을 품에 안으십시오. 그래서 운명을 바꾸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은 상관없다. 그 속에서 노다지가 나온다. 네 가문이 어떤 가문이냐 묻지 마라 네 부모가 어떤 부모냐 묻지 마라 현재 살고 있는 네 배우자가 어떤 사람이냐 묻지 마라 예수가 노다지로 바꾸어줄 것이다. 이 은혜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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