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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들의 보편적인 착각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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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숭의교회)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의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 할수록 옳은 말입니다. 절망과 낙망의 끝은 포기이고 그 삶의 포기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행한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적인 상황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절망적인 상황은 왜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요?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 그리고 무능력을 잊고 살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죽고 망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망과 실패 필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정말 필연적으로 사망하고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필연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사망과 실패로부터 구원을 얻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고, 우리 인간은 나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강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한계가 있고 나약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게 될 때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은 극복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됨으로 소망을 갖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확신 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고 망하는 것은 절망 때문이지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과 그 구원의 뿌리가 되는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삶은 밝아지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면 멀어지게 될 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어두워지게 되고 절망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삶의 성패는 하나님과의 거리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사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관계와 사이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전여 모르는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거의 관계가 없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 보다는 조금 더 잘 아는 사이이어서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적인 지식이 있고 점심 정도 나눌 수 있고 기쁜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축의금과 부의금을 낼 수 있는 정도의 관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죽고 못 사는 관계가 있습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와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입니다. 그와 같은 사이와 관계는 축의금과 부의금 정도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관계입니다. 물질은 물론이고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다. 과연 여러분과 하나님은 어떤 사이이십니까?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냥 좀 알고 지내는 사이이십니까? 그보다 좀더 친하게 지내시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가족과 같이 뗄 레야 뗄 수 없는, 내 것과 네 것의 구분과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저는 그 관계와 사이의 차이에 따라 우리 삶의 명암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가까이 올 수 없는 거리와 사이로 닥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하여 때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도 하시고 성령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one way가 아니라 two way 입니다. 사이와 관계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이 되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와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만 하나님을 선택하면 됩니다. 구원과 소망과 축복은 그러므로 이제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남군의 지도자는 리 장군이었고, 북군의 지도자는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리 장군과 링컨 대통령은 다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리 장군보다 링컨 대통령이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집무 중에 기도를 많이 한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때때로 그의 사무실 앞에는 ‘기도 중’이라는 팻말이 붙곤 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 씩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대답을 통하여 링컨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대부분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와 사이이냐에 따라 구원과 소망의 명암이 바뀝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과연 어떤 사이이십니까? 그냥 좀 아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죽고 못 사는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큰 아이가 작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대전 가까이 있는 계룡대라고 하는 곳에 장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결혼 전에 저희 부부가 미리 그곳에 내려가 전셋집을 하나 계약해 주었습니다. 그 전세금은 3천 만 원이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제가 내었습니다. 3천 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내는데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 며느리와 저는 그런 사이입니다.

저와 여러분 사이도 제법 가까운 사이입니다. 여러분은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이시고 저는 그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의 사이는 3천 만 원을 쉽게 아무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와 관계는 아닙니다.

몇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반복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과 재산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 돈은 그 중에 1/6 뿐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은 6명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고 그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한다면 가족은 이미 가족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제 계산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돈과 재산을 1/6이 아닌 1/7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음으로 당연히 하나님에게 가족의 몫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때도 매달 수입의 1/7 이상은 최소한 하나님을 위하여 쓰고 있었지만 저는 그 때 처음 재산의 1/7도 최소한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을 돈과 재산을 함께 나누고 쓰는 가족으로 영접했습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돈과 재산을 함께 나누고 쓸 수 있는 가족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말고 저 자신만을 놓고 생각할 때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그와 같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살게 된 이유를 저는 압니다. 언제부터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저는 압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제가 하나님을 돈과 재산을 함께 쓰고 나눌 수 있는 가족으로 영접하고 받아 들였을 때부터였습니다. 저는 아직 ‘주여 삼창’(?)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 질러 기도하는 사람 못지 않게,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는 소리로 결정되는 것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조금 미신적이지 않은가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와 같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그와 같은 위험성(오해를 받는)을 무릅쓰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은, 아니 저보다 더 큰 복을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중요한 헌금을 작정 할 때 언제나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제 가족이기 때문에 축의금 내듯이, 조금 많은 축의금을 내듯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전세금 지불하는 수준과 마음으로 결정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전세금 보다 더 크고 많은 것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전세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그냥 전세금만큼의 돈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승동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 할 때 그것이 기뻤습니다. 우리 아이 전세금 지불하고 집을 얻어주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승동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되었을 때 정말 거의 그런 마음으로 기뻤습니다. 진심으로 잘 하고 싶었고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은행에서 빚을 얻었습니다. 2년 동안은 정말 경제적으로 쪼들릴 각오를 할 만큼의 빚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빚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갚았습니다. 아주 쉽게 갚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35인가 36인가 였는데 참으로 많은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흠이 될 이야기 일 수도 있으나 그 많은 강의에서 받은 강사료로 일년도 되지 않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제법 알아주는 유명강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게 된 이유가 승동교회 건축헌금에 담긴 제 믿음의 마음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영락교회에서도 건축헌금을 하여야 했습니다. 퇴직금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헌금을 하고 동안교회로 왔습니다. 동안교회는 예배당이 좁아서 예배당 건축을 생각하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동안교회로 부임하려고 할 때 어떤 목사님이 왜 힘들게 건축하려는 교회로 가려고 하느냐며 이왕이면 건축이 끝난 교회로 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몇 년 동안 경제적으로 쪼들린 생각을 하고 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3년을 생각하였었는데 결국 6년 동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액수가 그렇게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헌금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저금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헌금을 하면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건축헌금 한 만큼, 꼭 그만큼 저축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안교회 건축헌금을 할 때 지금 제가 주로 책을 출판하고 있는 규장문화사에서 출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출판 제의를 해 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제 책이 팔려서 인세를 받게 되리라고는 정말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20여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적지 않는 인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승동교회 건축헌금을 하면서 유명강사가 되었고, 동안교회 건축헌금을 하면서 유명작가가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식의 말을 특히 설교를 하는 것이 제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들도 그 같은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늘 장지갑을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절반으로 접는 지갑으로는 넣기가 좀 불편할 만큼의 돈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접는 지갑을 가지고 다닙니다. 접는 지갑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작정한 건축헌금 때문입니다. 3년 정도 접는 지갑을 가지고 다닐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첫 주일 이삭줍기 헌금을 내는 것이 빠듯합니다. 이삭줍기 헌금 낼 정도의 현금은 언제나 장지갑에 있었는데, 이제는 신경을 쓰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첫 주에 못 내고 다음 주에 내는 일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달 23일은 제 통장에서 선교비가 빠져나가는 날입니다. 전에도 여유 만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23일에 대하여 조금 신경은 써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많이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장지갑을 가지고 다닐 때도 좋았습니다. 웬만한 지출은 큰 부담 없이 언제나 할 수 있는 때가 좋았습니다. 지금 절반짜리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습니다. 여유 없이 좀 빠듯하게 사는 것도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여유 있을 때도 좋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좀 여유 없는 요즘도 아주 좋습니다. 저와 하나님은 어떤 사이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저는 하나님 때문에 조금 여유 없이 사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성전에 남아 계셨는데 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 하는 줄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씩 성전에 가는 길을 마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 여행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함께 있는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착각했다는 것이 것입니다. 다행이 그 착각이 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정도의 고생을 한 후 다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착각이 좀 더 길어졌다면 더 많은 고생을 하여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겠지만 평생을 착각하며 살았다면 평생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았겠지요.

그와 같은 착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와 같은 착각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는 아주 보편적인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이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자신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을 줄로 대부분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축의금 좀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관계이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하여서는 어리석은 설교를 오늘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오늘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저를 흉보고 비판할는지 압니다.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과 승리와 성공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 거리에 그 구원과 승리와 성공 그리고 축복과 은혜의 명암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평생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따라 다니는 삶을 청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저와 여러분의 축복임을 제발 깨달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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