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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대하 2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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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에 어느 한인 교포 교회 목사님께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석 전도사님의 아버지 목사님께서는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정말 훌륭하시고도 큰 사역들을 해 내시는 분으로 한국 교계에 잘 알려져 계시는데, 전도사님은 아들로서 아버지 목사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버지 목사님의 좋은 것, 훌륭한 것들이 참 많겠지만, 그 중에서 단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석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처럼 하나님께서 남달리 크게 쓰시는 목사가 되도록 만든 제일 큰 이유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만난 목사님으로부터 의외의 질문을 받고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그 목사님께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남다른 사명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사명 의식, 다른 말로 바꾸어서 ‘과연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제 아버지 목사님만큼 철두철미한 분을 저로서는 그 때까지 본 적이 솔직히 없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그처럼 뚜렷한 의식과 확신을 가지고 목회하신 것이, 바로 아버지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이처럼 크게 쓰임 받는 목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제 나름대로는 그 당시 그렇게 판단이 되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역대하 24장의 말씀을 읽다가 제가 이처럼 생각하는 아버지 목사님의 생애와 꼭 들어맞는 내용을 발견했었습니다. 바로 남조 유다의 제사장 여호야다를 두고 본문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라고 두 번 말씀하면서 그의 생애를 두 가지로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악명 높은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남조 유다의 정권을 찬탈하고 나라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할 때, 그에 단호히 맞서서 결국 다윗 왕조를 복위시키고 유다의 종교개혁을 성취해 내었던, 능력 있고도 신실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 주일, 제가 아들임을 떠나서 그저 한 후배 목사로서 그렇게 존경하는 아버지 목사님, 그리고 경향교회의 모든 성도들께서 아마 저보다도 훨씬 더 존경하고 사랑하시고 계실 당회장 목사님께서 이제 이 경향교회의 목회 사역을 은퇴하시게 될 날을 한 주일 남겨 두고 있는 오늘에,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이 때에, 제가 생각하는 아버지 목사님, 여러분께서 기억해야 할 당회장 목사님을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살았던 모든 날’을 통하여 이 시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하는 제사장의 사명을 다한 생애였습니다.

본문 역대하 24장 2절에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아스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남조 유다의 여러 왕들 가운데서 오히려 성군의 명단에 들어갈 만한 업적을 남겼던 왕이었습니다. 그 요아스가 왕위를 얻게 된 것부터가 순전히 여호야다 제사장 덕분이었습니다. 요아스의 아버지 아하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 즉 요아스 왕자의 외할머니가 되는 아달랴는 아하시야 왕의 아들들, 즉 자기의 손자들을 다 죽여 버리고 스스로 유다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 아달랴가 그처럼 왕권을 잡기 위해서 「유다 집 왕의 씨를 진멸」할 때, 제사장 여호야다는 당시 젖먹이에 불과했던 요야스 왕자를 구출해 내어서 육년 동안을 숨겨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요아스가 자라나서 7세가 되었을 때, 여호야다는 충성스러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족장들을 규합하여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거사를 일으킵니다. 그 결과 아달랴는 왕좌에서 쫓겨나서 죽임을 당하게 되고 요아스가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 제사장 덕분에 생명을 건지고 왕위까지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개인지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제사장 집에서 숨어서 자라는 동안에 그 여호야다 제사장으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또한 왕이 된 이후에도 역시 여호야다 제사장의 영적 권위와 영향력이 요아스 왕의 개인 신앙생활과 동시에 국정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하 12장 2절에 보면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아스 왕이 유다의 다른 왕들에 비해서 선한 군주이기는 했지만 그의 생애도 완벽한 것은 또한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미비한 것도 있었고, 또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우상숭배에 다시 빠져 버리는 죄를 범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요아스가 ‘평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 동안만큼은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살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야다가 제사장으로서 요아스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행사했던 영적 영향력은 강력했습니다. 유다의 대부분의 왕들이 그들의 통치 기간 내내 악정과 우상숭배만을 일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오던 시기였지만, 적어도 여호야다가 제사장으로 살아 있던 기간만큼은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드려 성전 정화 운동에 앞장서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실로 여호야다는 정말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만드는 이 사명을 참으로 능력 있게 완수하는 데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들고 신앙생활 잘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목사의 당연한 사명이기는 하지만, 우리 당회장 목사님께서는 이 사명에 있어서 여러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또 더욱 특별한 은사를 받으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토록 뚜렷하게, 이토록 강력하게 가르치신 분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마 다른 목사를 만났더라면 예수 믿기 참 어려웠을 사람이었지만 당회장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 믿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참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목사를 만났더라면 그럭저럭 구원받을 신앙 정도만 간신히 지켰을 것 같은 성도들 가운데서, 유독 이 당회장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에 훨씬 더 뜨겁고 충성스러운 신앙생활을 살게 된 사람들도 아주 많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평생을 엉망진창 인생으로 살았을 사람들 가운데서도 바로 우리 당회장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대로 붙잡힘을 받게 된 까닭에 그 생애가 별과 같이 빛나게 된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도 참으로 많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교인들도 그렇지만 저와 같은 후배 목사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당회장 목사님께로부터 배우고 지도를 받았던 교단의 훌륭하신 목사님들을 뵈올 때에도, 저의 이와 같은 생각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목사를 목사답게, 신학교수를 신학교수답게, 신학생을 신학생답게 만드시는 능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한 특별한 은사를 받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을 가리켜 어느 전직 대통령이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있는 훌륭한 선배 목사님이며 저 역시 존경합니다. 저는 오로지 그 어느 전직 대통령이 그 목사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나게 되는 순간 자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게 만들어 주는 목사 - 이것이 그 불신자인 전직 대통령이 받은 인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목사를 만나게 될 때 정말 받아야 할 인상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목사는 사람을 만날 때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자신의 인격에 감동받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 목사가 믿고 따르고 증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어야 목사를 만나도 제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저는 목사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보다는, ‘그를 만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훨씬 더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사를 만나서 그 인격에 감동받았다.’라는 말보다는 ‘그 목사를 만나고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었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야말로 목사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평가인 것입니다.

이제 당회장 목사님께서 그 따갑게 외치시는 소리를 더 이상 못 듣게 되는 때가 오면,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다 그 소리가 그리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소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소리 때문에 게을렀던 신학생들이 새벽기도 시간에 일어나게 되었고 그 소리 때문에 불충했던 목사들이 회개하고 더욱 열심히 설교 준비하고 심방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소리 때문에 다른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우리 속에 있던 교만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지고 주님을 더욱 겸손히 섬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제 아버지 목사님, 여러분의 당회장 목사님에 대하여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게 된다.’라고, ‘그 분을 만나면 예수님을 어떻게 똑바로 제대로 믿을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인생을 그 분 섬기는 수단으로 삼아 사는 신앙생활’ - 지난 31년 동안 당회장 목사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신 것은 이것 하나뿐이었고, 여러분께서 당회장 목사님께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 역시 이것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실로 ‘세상에 사시는 모든 날’에 당신의 그 강력한 영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도록’ 이끌어 오셨던 이 경향교회 1대 당회장 목사님, 이 특별한 ‘사명자’이셨던 제사장을 기억하면서, 계속하여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바로 섬기는 법’ 하나는 더욱 철저히 훈련받고 실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은 자신부터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사는 제사장의 경건이 충만한 생애였습니다.

역대하 24장 14절 끝에 보면 여호야다 제사장의 생애를 또 한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바로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비단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만 지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한 예배자의 삶을 지키고 살았던 것입니다.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삼대 절기 때 드리는 제사들로부터 시작하여 매달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와 안식일마다 드리는 특별 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드리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상번제’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이 이런 제사들을 집례한다는 것은 사실상 제사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임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어느 목사의 일생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거기에 ‘이 목사는 아무 교회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목회했다.’라는 말 뒤에다가 ‘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주일마다 예배를 인도했다.’라고 기록을 첨가한다면,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목사로 살았으니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게 뭐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대하의 말씀은 이 위대한 제사장의 일생을 단 두 절로 요약하면서 그 중에 한 절을 ‘여호야다는 평생토록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라는, 일견 평범해 보이기 짝이 없는 내용을 아주 특별한 사건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로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매일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남이 보기에는 심상한 일처럼 여겨질지 몰라도, 적어도 여호야다 제사장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매일 드리는 제사였지만, 그 제사들 중에 단 한번이라도 습관적으로, 직업적으로, 무의미하게 드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하여 제사드릴 뿐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하여 바로 자기 자신의 영혼부터 채우면서 살았습니다. 아침의 상번제를 통하여 그날 하루를 살아갈 뜨거운 영력을 공급 받았고, 저녁의 상번제를 통하여 그날 하루의 경건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여 바쳤습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그리고 매절기에도 역시 그 드리는 특별제사를 통하여 자신이 먼저 특별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여호야다 제사장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제사 하나하나가 다 특별한 제사였으며, 자기의 평생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하나님 잘 믿도록 인도하는 일과 꼭 같이 중요한 일과였던 것입니다.
여호야다가 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요아스 왕 앞에서 항상 영력과 권위가 넘치는 제사장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이처럼 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경건 생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백성들 쪽을 향하여 자기의 얼굴을 보여 주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몸을 돌렸으며, 백성에게 교훈하기 이전에 하나님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자기가 먼저 그 말씀을 들었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대하의 기자는 여호야다의 생애를 종합해 볼 때 모든 백성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바로 그 장면,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라는 그 장면을 또렷이 이 본문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같은 목사라 할지라도, 예배를 인도하고 강단에 서는 일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직업처럼 여기는 목사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 목사는 예배를 인도할 때 항상 사람 쪽만 보고 있는 자입니다. ‘예배 순서를 어떻게 짜고 어떻게 인도해야 교인들이 좋아할까?’, ‘어떤 주제의 설교를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재미있어 하고 내가 설교 잘 하는 목사라고 칭찬을 할까?’ - 순전히 이런 생각만 머리에 꽉 차 있는 가운데 강단에 서는 목사가 이 지상교회 가운데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정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예배자들은 그런 목사의 설교와 예배 인도에 결코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은혜라는 것은 예배를 사회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 자신이 먼저 그 예배의 모든 순서 하나하나를 통하여 은혜를 충만히 받고 있어야만이, 그 은혜가 자연히 회중들에게도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목사가 항상 하나님 쪽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자신이 먼저 드리기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고, 하나님께 먼저 물어서 그 응답하시는 말씀을 교인들에게 전하여 주고자 할 때, 그런 목사의 ‘영적 뒷모습’이야말로 교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당회장 목사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오셨으며 또한 크고도 많은 주님의 일들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근거와 원동력은 당회장 목사님께 특별히 다른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신의 그 진실하고도 뜨거운 경건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께서 어떤 일을 시작하고 추진해 나가시는 방법이나 무슨 사건을 두고 대처해 나가시는 자세만 보아도, 이 분께서 얼마나 오랫 동안 기도로 미리 준비하고 하시는 일인지는 누구의 눈에도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당회장 목사님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항상 제일 먼저 두시고 매사에 최우선으로 여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당회장 목사님은 교회 일이나 복음 사업을 어떤 사람을 상대해서 처리하거나 해결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목사를, 장로를, 집사를 상대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과 먼저 대면하시고 이미 결론을 다 내리고 나오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당회장 목사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게 될 때 그 동기와 기준은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라는 이 단 한 가지에만 집중되는 것을 저는 평생 목격했었습니다.
아버지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인물을 가리켜 스스로 평하시기를 ‘대한민국 남자 표준형’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정말 제 아버지 목사님의 모습 중에서 진짜 제일 멋있고 잘 생긴 모습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목사님의 뒷모습입니다. 바로 사람을 대하기 이전에 항상 하나님 쪽을 먼저 바라보시면서 계시던 그 뒷모습입니다. 강단에서의 뜨거운 말씀 선포나 주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추진해 나가시는 강력한 리더십이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저는 때로는 아들에게, 때로는 다른 목사에게, 때로는 장로에게 등을 돌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 응답을 찾으며 기다리시던 그 ‘영적 뒷모습’이 제게는 잊혀질 수 없는, 아버지 목사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사시는 모든 날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당신만의 경건의 제단을 쌓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해 주려 하시는지를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부지런히 찾으시던, 제 아버지 목사님, 그리고 여러분의 당회장 목사님, 그 경건한 ‘예배자’의 뒷모습을 보여 주시던 제사장을 본 받아서, 여러분께서도 이 경향제단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 쪽을 먼저 바라보고 그 앞에서 사는 ‘신전 인격자’의 삶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15절과 16절에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 삼십 세라 /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지만 백성들은 그를 ‘다윗성 안에 있는 열왕의 묘실’ 즉 원래 임금들만 묻힐 수 있었던 왕실 묘지에 장사했습니다. 왜 여호야다는 유다의 왕과 백성들에게 그렇게 존경을 받았습니까? 16절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가리켜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했던 선한 일은 곧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바로 믿고 살도록 지도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행했던 선한 일은 곧 성전에서 매일 끊이지 않고 번제가 올라가도록 섬겼던 일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행했던 이 두 가지는 정말 일국의 왕과 맞먹는 존경과 대접을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실로 위대한 생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향교회에 당신의 귀한 제사장을 세우셔서 그와 꼭 같은 31년의 사역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외치는 자의 소리’로 뭇 영혼들을 일깨우셔서 하나님 똑바로 믿도록 인도하셨던 생애, 그 ‘하나님 쪽으로 돌아서 계신 신전 인격’으로 교회와 목사들과 직분자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지도하셨던 생애였습니다. 제 아버지 목사님, 여러분의 당회장 목사님께서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보여 주신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런 목자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진정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우리 각자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여호와의 전에서 항상 번제를 드리는’ 가운데 경향의 다음 시대를 더욱 큰 은혜와 축복으로 열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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