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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의 후예들 (창 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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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창세기 4: 8 ~ 16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4:7 ~ 12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 복음서 6:1 ~ 4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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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미래를 바라보고 그 미래를 어떻게 대비할까 하는 데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인지, 미래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과거 이야기만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벌어진, 독도 영유권 분쟁이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지금도 우리의 속을 상하게 합니다. 또 요즘에는 옛날 옛적 이야기, 고구려의 역사를 놓고서 시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과거는 그냥 묻히는 게 아니고 다시금 우리 앞에 되살아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현재와 미래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도 다시 살아올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경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외적으로는 이런가 하면, 국내적으로는 조상 행적 캐기가 한창입니다. 조상도 캐고 과거도 캐고 자꾸 캐는데, 그에 따라 불안이 가중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건지, 경제는 나쁘다고들 하는데 과거 캐기는 계속되고, 미래 지향보다는 과거 지향의 역사가 지속되고,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한번 성서에서 과거 역사 혹은 조상 캐기를 한번 해보십시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아온 조상들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신앙의 역사와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과 역사는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된 간략한 역사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두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성서에 보면 아담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각자 야웨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기에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창세기를 다 읽어보아도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거부하셨는지 명확한 해명이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 히브리서 4장 11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은 이유는 제사상에 놓인 물건의 종류 때문이 아니라, 아벨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을 보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말을 바꾸면 가인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을 바쳐도 받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는 헌신은 사람의 일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헌신만을 받으십니다.

요한1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벨은 의로웠기 때문에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졌고, 가인은 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하나님의 피조물답게 진실하게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으로 드린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가인은 동생한테 악하고 하나님한테도 악했기 때문에 그 악한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헌신의 정도가 얼마인지, 종류는 무엇인지, 액수는 얼마인지, 얼마나 비싼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은 단 하나, 그걸 헌신하고 또 바치는 사람의 진실의 깊이가, 사랑의 폭이, 믿음의 견고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십니다. 외형적인 물건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아벨과 가인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벨의 진실을 받으셨고, 진실한 아벨이 바치는 헌물까지 함께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물건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세상의 아무런 재물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뭐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는 진실한 인간의 모습,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원하십니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고에 많이 쌓아드리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인간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가인은 히브리서와 요한1서의 해석대로 악하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제사를 거부당하자, 자기 동생을 들로 데리고 가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을 찾으십니다. 가인에게 “네가 죽였지?” 하지 않고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가인이 대답합니다. 신문에 실리는 살인자들의 변명과 다를 바 없는 대답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인 동생의 피가 네가 농사짓고 살아야 할 그 땅에 스며들었고 그 피가 땅에서 나한테 울부짖고 있다. 이제 피를 마신 땅은 저주의 땅이 될 것이다. 밭을 갈아도 소출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는 이 땅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닐 것이다.” 농사짓고 살아야 할 가인에게 이것은 엄청난 저주입니다. 가인은 두려움에 싸여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성서를 보면 가인은 적어도 세 가지를 두려워했습니다. 첫째는 땅에서 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을 피로 물들여 놨으니 땅 어디에도 쉼과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평생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 스스로의 결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사람, 창조주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이 땅 어디에 가서 안전과 안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는 사람들이 가인을 보면 죽이려 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완전히 저주받은 삶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가인이 살인자라 하더라도 생명만은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없고 하나님의 보호도 없는 상태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형제끼리의 갈등, 살인, 형제살해의 이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서 다 낭비한 다음에 돈이 다 떨어져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반가이 받아들였는데, 큰아들은 반발하며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들들의 관심은 아버지가 아니고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이라는 물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자식 자체에, 인간 자체에 있었습니다. 큰아들도 자기 자식이고, 비록 허랑방탕하였지만 돌이키고 집으로 온 작은아들도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두 아들이 다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어떤 모습이든지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고 부모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탕자와 큰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차이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이 누구입니까? 이제 아벨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혈육을 남기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유일하게 남은 조상은 가인뿐입니다. 살인자 가인! 살인자가 우리의 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아주 재미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족보는 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5대 때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족보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담과 하와가 셋째 아들을 낳고 새로운 족보가 시작됩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셋,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셋을 통해서 그리고 노아를 거쳐서 이스라엘 족보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가인과 아벨은 상징적인 조상이긴 합니다만, 하나님은 둘의 역사를 일단락 지으시고 제삼의 조상을 통해서 역사를 여십니다. 셋이라는, 살인자도 살해당한 자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역사에는 셋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이 존재합니다. 지금도 가인과 아벨은 제 개인의 족보 속에, 이 민족과 세계의 족보 속에 여전히 갈등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성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가인의 피도 아벨의 피도 다 받았습니다.

인간은 권력을 쥐면 그것을 휘두르면서 자꾸 아벨을 만들어냅니다. 과거 청산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과거를 청산한답시고 분노와 좌절을 만들어내면 어떡합니까? 힘이 센 나라는 그 힘으로 작은 나라를 희생자로 만듭니다. 지금 이 세계에 전쟁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가인이 저지른 과오와 범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양산되는 것은 아벨의 피입니다. 그 피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오는 걸 보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결단을 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일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의 역사를 종식시키기로 하셨습니다. 더 이상 아벨의 피가 이 땅위에 흐르지 않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심으로 아벨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아벨의 피는, 억울한 피는 예수의 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가인의 역사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 청산이라는 이름으로도, 역사 회복이라는 이름으로도, 무슨 이름으로도 가인의 역사는 안 됩니다. 아벨과 같은 좌절의 역사도 안 됩니다. 억울한 역사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렸으므로 이제 가인도 아벨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거 역사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역사 청산은 살기 위한 것이어야지 죽이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인간의 손으로 인간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폭력의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민족들에도 해당하고 사회들에도 해당하고 우리 가정에도 해당하고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다거나 형제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화목재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계 역사는 이런 사랑의 역사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냥 철학적인 이야기, 윤리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벨의 희생과 가인의 심판을 끝내기 위해서 스스로 가인이 되셨고 스스로 아벨이 되셨습니다. 스스로 희생을 당하셨고 스스로 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도 사랑을 베풉니다. 이 사랑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역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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