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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 우리의 기도제목 (왕상 18:36 - 왕상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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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김성덕 목사

오늘 본문말씀을 가지고 엘리야의 기도를 중심해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는데 문득 어릴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3년고개> 동화가 생각 났습니다.
어느 곳에 신비한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에서 넘어지면 누구든지 삼 년 안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 고개에서는 조심해서 걷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실수로 그 고개에서 넘어졌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3년 안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까 몸이 한 군데 한 군데 아파지기 시작하더니
다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자에게 찾아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 현자님! 저는 곧 죽을 것 같습니다. 3년 고개에서 넘어졌습니다. ]
그때 현자가 말했습니다.
[ 여보게! 걱정 말게 3년 고개에서 한번 넘어지면 3년을 살지만,
두 번 넘어지면 6년을 살 수 있고, 열 번 넘어지면 30년을 살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그 고개에 가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넘어지게. ]
그 현자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일어나 3년 고개에 가서
데굴데굴 구른 후에 집에 돌아와서 기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3년 고개가 우리의 기도와 같구나 싶어요
우리의 삶에 어떤 고난과 환난이 다가와 생명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넘어 지세요
넘어 지더라도 뒤로 넘어지지 마시고 앞으로 엎드려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살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불을 내리시고 비를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 즉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지금 우리 시대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바알 우상이 득세를 하고 온 나라에 가뭄이 들어 경제적 파탄이 이르렀으며 지도자들은 영적 피곤에 지쳐있는 모습들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과 너무나 동일합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도의 제목을 붙들 수 있는 내일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다스리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입니다.
암울했던 시기 정도가 아니고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아합 왕 시대의 극한 상황은
1) 종교적 타락입니다.
그 단면을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 19절 [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 ]이라 합니다.
온 백성들과 왕실이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2) 21절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런 기록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종교가 바알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교회마저도 기독교라는 간판 아래
돈과 향락을 좇는 바알종교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다 ] 라고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패역의 피가 다시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2) 기근의 현상입니다.
왕상18:2절에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기근이란 굶주림을 뜻합니다.
이 기근은 한발의 결과입니다.
하늘이 문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발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기록되었습니다.
신11:16-17절
[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데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징치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이러한 기근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적 타락은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도덕적 타락은 곧 경제적 파탄과 도산으로 이어진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대구교회의 유산은
바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기독교인 비율 전국 최하위, 세계최대 불상이 자리 잡고 있는 우상의 도시 나아가 향락 문화는 전국에서 최고입니다.
향락문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 사업이 있습니다.
목욕문화와 가무문화입니다.
목욕과 노래 - 전국에 어디 가더라도 대구만큼
사우나 시설 값싸고 잘 되어 있는데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노래방 전국 1위입니다.
이건 무얼 말합니까? 바로 타락한 도시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대구 경제가 어떻습니까?
대구 사업의 상징이 직물과 안경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사양길에서 침체일로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대구는 최악의 불경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대구 교회라도 정신을 차리느냐?
전국에서 연합집회가 제일 안 되는 곳이 대구라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조용기 목사님도 대구만큼은 집회 사절이라는 소문이 나있을 정도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21절 말씀처럼 대구교회 마저도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언제까지 머뭇머뭇하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여호와의 편에서는
3절에 나오는 궁내대신 오바댜 같이
19:18절에 나오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명같이
여호와만 경외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다행히도 그래도 교회 가운데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여호와의 신앙을 지키겠다고 몸부림치는
진실된 교인들이 있음에 희망을 걸어봅니다.

기독 사이트에서 펴온 글입니다.
서울 어느 교회에 대학부 부장으로 봉사하는 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포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춰 돌아오려고 했는데
짙은 안개로 비행기가 뜨지 않았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대구 비행장에 전화를 해 보니까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면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구 비행장으로 급히 차를 몰고,
비행기가 뜨기 1분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직원이 무전기로
비행기의 이륙을 막아 간신히 비행기를 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간증을 하면서 그때처럼 감격적인 예배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지금은 유력한 대기업 사장으로 승진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복을 받을 만한 모습이 아닙니까?
[ 오늘은 비행기가 못 뜨네! 다음 주일에 가자! 하나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 라고 해도 큰 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반드시 우리 손을 붙잡아주십니다.

문제는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방관하거나 아니면 동화되어 살아가야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때에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17:1절에
[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
디셉 사람이란 말은 가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영양사람이라고 하듯이
출생지로 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섬길 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엘리야는 30절 이하에서 가멜산상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 생명의 대결을 벌리면서
무너진 여호아의 제단을 수촉하여
그 위에 송아지 각을 떠서 재물로 올려 놓고
불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우상 바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며 불의 응답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36절에 <5>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
뭘로? 여호와의 불로서

오늘 이 시대에도 엘리야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여호와야 불로 응답하소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이 땅의 우상의 재단을 태워주시고
이 땅의 황무함을 고쳐주소서
아니 그 이전에 여호와의 불로, 내 마음의 우상을 태워주시고
내 마음의 황무함을 고쳐 달라고 먼저 부르짖어야겠습니다.

이 땅에 황무함을 고치기 위하여 여호와의 불로 우상의 재단을 헐어버린 엘리야
또 한가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기근을 해결하는 하늘의 비를 내리는 일입니다.
41절 봅시다.
[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3년 6개월 매마른 땅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신다면
더 이상 가뭄으로부터 회복될 수 없는 경제사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비를 내려 주시겠다고 하시고는
바로 비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엘리야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이 땅에 비를 내려 주소서입니다.
신28:47절에는
[ 풍족한 가운데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필절하겠다 ] 고 했지만
그러나 솔로몬의 봉헌 기도에서 언약했듯이
대하6:26절 이하에
[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
이 시대 오늘 우리도
하늘의 비를 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아니 3년 6개월 메마른 땅 이전에
영적 기갈로 마르고 굳어저버린 내 심령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이 땅의 경제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할 때

그럼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엘리야의 기도의 모습 가운데 우리의 기도의 모습을 찾아야 겠습니다.
1) 41절 비 내려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4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엘리야는 비가 오기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이미 큰비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기도할 때
그 기도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21:22절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믿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경제가 회복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2) 42절 간절히 기도합시다.
어떤 분이 정기적으로 산꼭대기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대기에만 하나님이 있겠나? 중턱에도 있겠지."
그래서 다음 번에는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중턱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꾀가 났습니다.
"중턱에만 하나님이 있겠나? 골짜기에도 있겠지."
그래서 다음 번에는 골짜기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꾀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골짜기에만 있겠나? 우리 집에도 있겠지."
그래서 그 다음에는 삼각산에 가지 않고 집 거실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꾀가 났습니다.
" 거실에만 하나님이 있겠나? 안방에도 있겠지."
그래서 안방에서 기도하는데 또 꾀가 났습니다.
"안방에만 하나님이 있겠나? 이불 속에도 있겠지."
그래서 이불 속에서 누워서 기도하니까
마귀가 금방 찾아와서 자장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귀의 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기도하면
꼭 두 가지 편안히 기도해라 아니면 잡념을 가지고 방해합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엘리야는 기도할 때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로 넣고 기도했습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로 집어넣는 일은 체조 선수가 아니면 못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많이 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그처럼 우리는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해야
그 기도가 문제를 해결하고 축복을 가져다주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3) 43-44절 끈질기게 기도합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꼭 하나님의 때에 축복해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때가 차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43-44절에 보면
엘리야가 비올 징조, 조그마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축복 받는 사람들은 참 끈이 질긴 사람들입니다.
끊이 질긴 사람 즉 끊 질기게 기도하는 사람
끊 질기게 전도하는 사람
끊 질기게 봉사하는 사람 축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비속을 달려가는 엘리야 얼마나 힘이 펄펄 넘쳤든지
마차 타고 가는 아합 왕 보다 앞서 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은 사람은
비속을 달려가는 엘리야처럼 그 힘이 넘쳐날 줄 믿습니다.

이제 하늘에 큰비가 내렸습니다. 상황 끝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면 반드시 사단의 방해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아합과 이세벨의 독무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알의 세력들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아합이 그 아내 이세벨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본래 이세벨은 이스라엘 땅에 바알 종교의 전도사입니다.
시집 올 때 바알과 아세라 신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꼬시고 백성들을 미혹한 것입니다.
그러니 아합과 이세벨은 사탄의 대명사격입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찾아서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을 것이다 하고 작심하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엘리야의 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 생명의 두려움을 느끼고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이런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 도망하여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심한 영적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4절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합니다.
[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영적침체에 빠진 엘리야는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이처럼 무력한 영적침체에 빠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이라는 것 아무리 강한 것 같을지라도
하루아침에 흔들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엘리야의 영적침체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1) 육체적 피로입니다.
영적침체는 때로는 피로에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지치고 피곤하면 육체가 우리를 지배하여 영적침체에 빠지게 합니다.
육체의 피로는 자기집착을 일으키게 하여 신앙을 쇠잔케 합니다.
육체적 피로는 자신에 대한 이기적 집중을 강화시켜 자학과 비탄을 낳게 합니다.
과도한 피로는 마치 치통을 앓는 사람이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듯
자신이 겪는 괴로움에만 관심을 집중케 하는 부정적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자기 외에는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여 영적침체에 빠지게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살아갑니까?
무엇이 우리를 바쁘게 하고 지치고 피곤하게 합니까?
균형 있고 조화 있는 시간관리로 하나님 만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휴식으로 영적충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잘못된 시각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상에서 바알과 아셋라 선지자 850명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가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신앙이 회복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이세벨이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결국 그는 심한 좌절과 허탈감 속에 죽기를 구하는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서
이세벨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잘못 된 것입니다.
영적침체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불리한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3) 자기 혼자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내가 바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나만 수고하고 고생한다며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자기 관점에서 판단하기에 찾아오는 부작용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으며,
자신만이 아합왕과 이세벨과 싸웠고,
자신만이 바알과 앗세라에 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에
19:10절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는 저희가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 ]
사실은 나만이 아닙니다.
나만 고생하는 것 같고 나만 충성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9:18절에
[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내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영적침체에 빠져있는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바알과 싸우고 하늘의 문을 열고 축복의 소낙비를 내리며
큰비 속을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적침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의 손으로 일으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인 것입니다.

영적침체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생활환경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환경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비록 광야요 고독한 형편이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입니다.
5절-6절 말씀을 보면
로뎀나무 아래에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천사가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어라 합니다.
그래서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기로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습니다.
7-8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합니다.
그래서 또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40일 불철주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고로 죽은 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 장례식을 하면서 당신이 관속에 들어 있을 때,
친구나 가족들이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는 아주 유능한 의사였으며 훌륭한 가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두 번째 사람은
[ 저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
마지막 사람이 말합니다.
[ 저는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 ]
오늘 영적침체에 빠져 있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 어~! 김 집사 살아났다 ] 할렐루야 !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침체된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침체에서 벗어나려면 엘리야 처럼
1) 하나님의 어루만짐이 있어야 합니다.
5절 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짐이 있어면 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목회에 있어서 Touch 사역이라고 합니다.
사49: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초라한 모습이라도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쭐떡 미끄러져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쫄딱 망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대상29:12절 다윗은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은 그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떡과 물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6절 이하에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한 떡과 물을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한 번만으로 단번에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또 먹고 마셔야 합니다.
사방에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상황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은혜 받고 또 받으면 됩니다.
어떤 아빠는 아들이 고 3때 매일 밤 11시 30분에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리다가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면 책가방을 대신 받아주었습니다.
아들이 더 힘이 세지만 아들의 피곤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도 그렇게 아들의 짐을 맡아주기를 원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침체에서 벗어날 위로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혼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형편이 어렵다고, 신앙생활 힘들어 못하겠다고
넋두리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어루만짐을 기대하며 말씀을 통해 은혜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만이 아니라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새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40주 40야를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또 받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결론 >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아합 왕 시대는
바알이 난무하며 극도의 경제적 공황이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와 같은 상황입니다. (특히 대구의 상황과 같습니다.)
이럴 때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기도의 내용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1) 불로 응답하소서
여호와의 불로 바알 우상을 태우시고 이 땅의 황무함을 고쳐 주소서
2) 비를 내려 주옵소서, 이 땅의 경제적 불황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3) 영적침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200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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