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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받는 사람들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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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5개로 묶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마태가 이렇게 5개의 가르침을 모아서 기록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Torah, Pentateuch)을 의식하고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5개의 가르침의 첫 번째가 오늘 보게 되는 5~7장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5~7장까지의 말씀을 흔히 “산상수훈”이라 하여, “산에서 가르치신 훌륭한 교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복을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는 5:1-12의 말씀은 어떤 가르침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복을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1절에 나타나는 “앉으시니” 라는 단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앉으시니”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앉는다(sit down)”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앉으시니”와 같은 의미로 다른 곳에서 쓰인 용법으로 마 13:48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여기서 “앉아서”의 의미는 심판자의 모습을 대신하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좋은 물고기와 못된 것을 가르는 권세자의 모습을 이렇게 “앉아서”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올라가 앉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임금, 심판자의 자리를 의미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마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여기서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라는 표현은 바로 심판자의 권세의 모습을 상징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앉으시니”라는 표현은 “권세의 오른 쪽에 앉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권세 있는 자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앉아계신 주님 앞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절에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권세자의 앞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나아오는 모습”인 것입니다. 제자(마쎄테스)라는 말은 “추종자(Follower)”의 의미입니다. 즉 스승의 뒤를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는 훈련을 잘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자라는 영어 표현인 disciple이란 단어는 훈련한다는 뜻의 discipline이란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앉아 계신 분”과 그 앞에 “나아가는 제자들”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는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성스러운 말씀이요, 듣고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모습이요, 말씀인 것입니다. 2절의 “입을 열어 가르쳐” 라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상상을 하게 해 주는 표현입니다. 이 “입을 열어 가르쳐”라는 헬라어의 표현법은 바로 “신(神)의 말씀” 혹은 “왕의 성스러운 발표”등을 표시할 때 서론적으로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바로 “나아가는 자세” 곧 예수께로 향하는 자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아온 제자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듣기 위해 나아간 자체에 이미 복이 있음이 선언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온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복을 선언하신 후에 가르침을 시작하시려고 하였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많이 읽고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잘 압니다. 문자 그대로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인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훌륭한 말씀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한편,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이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느냐?”하는 부담입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살 용기나 자신이 없고,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렇게 사는 것 같지는 않다”는 부담입니다. 한 마디로 “훌륭한 가르침이긴 한데, 실현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진실한 크리스천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이 산상수훈을 실현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이 사람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누구보다도 마음아파 하리라 봅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다니 ···”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잘 믿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고민에 더 깊이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군대 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바로 위의 고참이 내리는 명령이 있고, 아주 높은 상관이 내리는 명령이 있습니다. 바로 위의 고참이 내리는 명령을 준행하지 못하면 몇 대 맞으면 됩니다만, 높은 상관이 내리는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영창(군 감옥)에 가게 됩니다. 군대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 사병일수록 바로 위의 고참의 명령을 높은 상관의 명령보다 더 지키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요? 매 맞기 싫으니까. 하지만, 군대가 어떤 곳인가를 잘 아는 군인일수록 높은 사람의 명령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자 하면 할수록 주님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어느 다른 일보다도 더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한 신앙인일수록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때 주어지는 부담이나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에 빠질까봐 이렇게 복을 선언하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약간 어려운 표현이지만,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모든 윤리적인 명령을 표현하면서 “구원의 사실이 전제된 명령(Indicative가 전제된 Imperative)”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비록 주님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신 구원의 그 사실을 도로 물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기독교의 윤리적 명령은 못 지키면 벌을 받는 “율법적인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로운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성경의 가르침은 안 따라도 되는구나”하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진지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오는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소중하게 여김으로 꼭 지키고자 하는 성실함을 지닌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말과 성실이란 말의 헬라어 단어는 “피스티스”라는 같은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즉,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의 명령에 성실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명령에 성실한 자가 곧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3절부터 나타나는 복의 자리에 들 수 있는 사람이란 1절과 2절의 의미를 잘 깨닫는 사람에게 은연 중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산상수훈의 끝부분에서 다시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7:24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렇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복되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화가 크되, 오히려 안 들은 사람보다 크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8복의 말씀은 가르침을 듣고 따르고자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복된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음에 있어서 반드시 복과 함께 그 가르침을 받고자 해야 합니다. “복이 없는 가르침”이나, “가르침이 없는 복”은 둘 다 잘못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15장에 나타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 나타나는 큰 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열심히 일은 합니다만 조금도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큰 아들의 모습이 바로 “가르침은 따르는데 복은 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을 뛰쳐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은 바로 “가르침이 없는 복”만을 추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둘 다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침과 복을 함께 지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한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복을 선언하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깊으신 배려를 우리는 꼭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 복의 말씀에 들어가 보십시다. 우리는 이 복의 선언을 “여덟 가지의 복”이라 해서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 “팔복”의 내용을 다 살필 수는 없습니다. 이 “팔복”의 내용에 대해서는 2년 전인 지난 2002년 7월부터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이 “팔복”의 구조와 관련하여 전체적인 내용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한번 이 “팔복”의 구조를 잘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의 커다란 구조적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여덟 개의 복 중에서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의 복에 대해서는 “~~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장차 --을 받을 것이라는 미래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첫 번째와 맨 마지막의 복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리고 미래적 표현의 복은 다양한 모습인데 비해서, 현재적 표현의 복은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라는 공통된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적 표현과 현재적 표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래적 표현이라 함은 우리의 노력이 어느 정도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애통할 수 있어야 하며, 온유하도록 해야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어야 하며,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마음이 청결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화평케 하도록 하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하는 자에게 거기에 합당한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애통할 수 있는 자에게는 위로받음의 복이,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복이, 의에 주리고 목 말라하는 자에게는 배부름의 복이,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뵙게 되는 복이,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복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적 표현으로 되어 있는 복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적 표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일방적인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이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강권적인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고 안 주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임하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자리만 마련하면 임하게 되는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몸에 있는 공기를 내쉬는 호흡을 통해서 다 내어 보내면 절로 숨을 쉬게 되어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모습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모습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모습이란 자기 자신에게 국한된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는 개인적 차원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모습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차원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다른 존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모습을 한 마디로 비어 있는 모습과 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비어 있는 모습 속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는 복을 이미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게 되는 만큼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그 비결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질 때, 그리고 의를 위한 삶 속에서 따라오게 되는 핍박을 받게 될 때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 복의 현실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3절에 복은 그런대로 사모하는데, 10절의 복은 외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개인 구원 없는 사회 구원 없고, 사회 구원 없는 개인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기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면, 이는 심령이 가난해지는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 그리고 동시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셔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하시는 모습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셨습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 바울도 이런 경험을 하면서 살았지요. 그래서 이런 말을 하였잖아요.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현재적 표현으로 되어 있는 복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현재가 없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복,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이 없이는 미래의 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삶 속에 먼저 임하시는 귀한 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팔복”의 말씀에서 살필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은 네 번째 복의 말씀과 여덟 번째 복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두 복의 말씀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바로 “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사회를 향하신 가장 기본적인 바램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복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의로운 세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하기 어려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기본적이 바램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힘쓰는 복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방해와 핍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어렵고 힘든 일을 하는 가운데 필요한 자세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러한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이미 받은 자들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일임을 예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에 이 많은 가르침을 시작하시면서 무엇보다도 복을 주실 수 있는 권세의 자리에서 바로 이 복을 선언해 주심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들을 준비와 자세를 지닐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과연 복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지침으로 삼아 지켜 행하고자, 그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오는 모습 속에 복의 현실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눅 10:23-24,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복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이렇게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팔복”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규정하시는 복된 모습이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자 나아오는 그 모습 속에 바로 복된 모습이 있음을 꼭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복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로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왔던 제자들처럼, 저희들도 주님의 말씀으로 나의 삶의 원칙과 지침으로 삼고자 나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아오는 제자들에게 복을 선언해 주심으로 복의 자리에 초대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주님의 복으로 채움 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순응함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에 동참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전하기 위해 순간순간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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