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사랑 (요 21:15-17)

  • 잡초 잡초
  • 442
  • 0

첨부 1


- 설교 : 서해원 목사

  구약성경 미가서 6장 6절에 보면, 이런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 말씀은 미가 선지자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늘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요? 무슨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결실의 계절에 나는 어떤 열매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언젠가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때, 나는 어떤 열매를 보여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통해 맺어지는 열매를 알려주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아십니까?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열매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앞으로 이 열매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사랑’입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소녀 앞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한 것입니다. 새벽닭이 울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앞으로 새로운 삶을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3번이나 질문하신 주님 앞에 3번 동일하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여기 주님께서 양을 먹이라는 말은 곧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말에는 여기 ‘양’이란 말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내 양, 어린양으로만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을 분석해 보면 명확하게 양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3종류의 양을 말씀하셨고, 그 양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프로바톤’입니다. 17절에 나오는 양을 헬라어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프로바톤을 먹이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프로바톤은 신약성경에서 양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양은 성장이 완전히 끝난 양을 가리킵니다. 양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성장에 있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양을 말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양을 먹이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관점에서 프로바톤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입니다.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높다는 것에서 적어도 두 가지의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아부나 굴종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프로바톤에서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이 존경과 예의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존경은 하되 굴종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앞에서만 잘 하려고 하고, 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존경과 사랑을 겸한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이런 일로 얼마나 곤욕을 치렀습니까? 높은 사람 앞에 얼마나 굴욕적인 자세를 가졌습니까? 많이 가진 자 앞에서 얼마나 손을 비비며 살았습니까? 얼마나 윗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게 했습니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잘 압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대부분 꼭 그런 사람들이 뒤에서는 비판합니다. 앞에서는 아부하고, 뒤에서는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 사회에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질시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처럼 지역색깔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는 남쪽사람과 나사렛을 중심으로 사는 북쪽 사람의 갈등이 대단했습니다. 당시 잘 사는 사람, 권력을 갖고, 힘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남쪽사람들이었습니다. 북쪽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두 계층의 사이에서 남쪽 사람이 북쪽 사람을 업신여긴 것도 문제였지만, 북쪽 사람이 남쪽 사람을 향한 비난은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남쪽 사람들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열등감으로 좀처럼 화합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당대에는 그리 쉽게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승천하신 뒤 초대교회가 부흥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북쪽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시 많은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남쪽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삶을 안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핍박을 주어 눈물을 머금고 예루살렘을 떠날지언정,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프로바톤을 그들은 용서와 사랑과 이해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랑의 대상, 프로바톤, 주님은 이들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굴종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배우는 대상으로 삼으로 사랑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프로바티온’입니다. 16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양을 치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양의 이름입니다. 프로바톤과 비교해서 프로바티온은 성장과정에 있는 양을 말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청소년기에 해당되는 셈입니다. 주님은 이 양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관점에서 프로바티온은 누구일까요? 자기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모든 면에서 자기와 같은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로 그들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기 전에 먼저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과 같이 심한 경쟁사회에서는 더욱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두 번째 대상을 알려주셨습니다. 프로바티온, 바로 우리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늘 내 곁에 있고, 늘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부탁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들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역시 두가지의 귀한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버릴 것과 취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버릴 것은 ‘비교의식’입니다. 그리고 취할 것은 ‘목표의식’입니다.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직 목표의식을 갖는 것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의 대표적인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갈렙’이란 인물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동시대에 살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모세의 뒤를 잇는 후계자의 쌍두마차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광야 1세대인 것이 같고, 젊은 시절에 모세의 눈에 들어 함께 일한 것도 같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것이 같고, 돌아와서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도 동일합니다. 이런 비슷한 두 사람 중에 하나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시대의 주역이 되었고, 한 사람은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우리 같으면 뒤에서 두고두고 씹고, 기회만 있으면 약점을 잡아 끌어내리는 일에 몰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갈렙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갈렙은 여호수아보다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갈렙은 오히려 여호수아를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를 묵묵히 도와주었습니다. 갈렙의 이런 역할 때문에 여호수아가 힘을 얻어 가나안정복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갈렙이 이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야말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비교의식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의식만 가진 것입니다. 자기를 여호수아와 비교하지 않고 서로의 갈길이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없는 것이 상대방에게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역할은 이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 생애에 하나님을 향한 목표의식만을 뚜렷하게 세웠습니다. 바로 갈렙의 이런 믿음이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부터 정말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남이 갖지 않은 내가 있고, 내가 갖지 않는 것이 남에게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목표의식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향한, 성숙을 위한, 천국을 향한, 바르고 참된 삶을 향한 목표를 삼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자세와 삶의 태도가 우리와 비슷한 프로바티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늘 함께 웃고, 울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아르니온’입니다. 15절에 말씀하신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나온 양을 가리킵니다. 아르니온은 어린양, 이제 막 태어난 양입니다. 프로바톤이나 프로바티온에 비하면 가장 많은 손이 가는 양입니다. 주님은 여기 아르니온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관점에서 아르니온은 어떤 사람일까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자기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역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끊임없는 관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대할 때는 대부분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쟁상대도 아니고, 아부의 대상도 아니기에 더욱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우리의 시선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어떤 문제와 고민인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사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보통 세상 사람들이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마지막 대상은 바로 우리보다 낮은 사람, 즉 아르니온입니다. 아마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것을 무엇보다도 원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가장 먼저 이 양을 먹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 주변에는 늘 어렵게 사는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힘없는 자, 연약한 자가 예수님의 주변에 주로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들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주었습니다. 이들을 늘 불쌍히, 민망히,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넋두리도 받아주었습니다. 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가정에서 버림받고, 자신에게서 상처받아 정말 외로운 그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처럼 주님은 마치 이들의 친구와도 같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세상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보통 이하의 사람들입니다. 모두 가난한 어부로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람들입니다. 배경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학문도 없는 무식한 자들입니다. 성격도 거칠어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당시 유명한 랍비나 철학자의 제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만 일으키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부르셨습니다. 이들을 밤이 맣도록 기도하시며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깊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를 알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모르는 자에게 구원을, 천국을 모르는 자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진정한 사랑,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으신 주님이 스스로 종이 되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더러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것이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성경이 다른 면입니다. 세상은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큰 축복이 임합니다.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가 제자 됨을 압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보여주었던 진정한 사랑,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끊임없는 ‘하강이동’이었습니다. 낮은 사람이 높아질 수 없었기에, 높은 사람이 낮은 자리로 둥지를 틀고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베드로와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헨리 나우엔이 그랬고, 마더 테레사가 그랬고, 가가와 도요히꼬가 그랬습니다. 모두 낮은 곳에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위해 평생 헌신하며 살다가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을에 어떤 열매로 주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꼭 기억하십시오. 아르니온에서 프로바티온을 넘어 프로바톤까지, 프로바톤에서 프로바티온을 거쳐 아르니온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이번 한 주간도 힘차게 출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