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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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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가끔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분들이 와서 상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부부간의 문제로 상담할 때는 아내는 남편의, 남편은 아내의 섭섭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하고 살면 행복할 줄 알았더니 결혼 전 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결혼할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주변에서 하도 권하는 바람에 했는데 그 때 그만두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결혼 전 청년들에게 서로의 단점을 적어보라고 하면 다들 단점이 없는 게 단점이라고 합니다. 결혼하고 한 6개월 쯤 후에 단점을 적어보라 하면 ‘목사님 종이 한 장 더 주세요.’ 합니다. 상담 중에 한참 이야기하다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나쁘더라도 장점 하나는 없겠냐고 하면 가만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비난하던 목소리를 낮추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애들한테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월급은 꼬박꼬박 갖다 줘요.’ ‘아무리 화나도 밥은 꼭해줘요.’ ‘국 끓이는 솜씨 하나는 끝내줍니다.’ 어쨌든 한 가지라도 칭찬할 것을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대화가 조금씩 풀리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시고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교회를 칭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칭찬할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마도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소개하시면서 ‘나는 정말 이런 것은 싫다. 이런 교회는 있어서는 안 되는 교회다.’ 라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마음에 다 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습, 표현에 의하면 토하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하셨던 모습이 우리 속에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교회 모습도 한 번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과 더불어 교회의 모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의 행위를 하는 교회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14절에서 15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를 “아멘이시오” 라고 묘사한 것은 진실을 증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교회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교회의 본질을 잊고 있었던 교회가 아니었겠는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가장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모습은 우리 삶이, 언어와 생각이 “정말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 되십니다. 나의 구원자 되십니다.”를 말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나타내신 모든 일 중에서도 모든 창조의 근원되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기 원하십니다. 즉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이 누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시고 생과 사와 화와 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기 원하셨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늘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귀에 들릴 때에 “저 목사님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이다. 주님은 이 말씀대로 약속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이 약속을 지켜야지, 말씀 따라 순종해야지. 주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약속을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하는 행위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 속에는 믿음의 행위가 없었습니다. 찬송과 감사의 생활이 있었음에도 예수님께서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삶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하지만 여러분의 언어와 생활하는 곳에서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또 지금의 삶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인 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혹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아가면 회복되고, 지금 편하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 머리는 냉정해집니다. 복잡하던 머리가 단순해집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이고 상식적이 됩니다. ‘신앙’하면 초자연적인 것, 환상적인 것을 상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신앙인일수록 상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차가워진다면 우리 가슴에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감격과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생깁니다. “아, 내가 하나님 은혜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받았는데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정신 못 차립니다. 뭣부터 해야 할 지 흥분하고 난리입니다. 반면에 가슴은 싸늘해집니다. 은혜도 식고 사랑도 식고 열정도 식습니다. 굉장히 비판적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 나는 부요하다, 부요하다 이미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초신자들은 신앙생활에 변화가 참 많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말씀을 귀하게 듣습니다. ‘아, 저것 하나님 말씀이야.’ 말씀에 비춰 자신을 돌아봅니다. 은혜를 사모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만 믿고 살다가 말씀 앞에 된통 야단맞고 깨져 자기 신념과 관념을 포기합니다. 문제는 대강 믿던 사람들, 대강 예수 믿고 대강 믿음의 경륜이 있고 대강 축복 받고 대충대충 믿던 사람들입니다. ‘진짠가?’ ‘저렇게 믿어 봐도 별 소용없어.’ ‘그 때 부흥사 와서 헌금하라고 할 때에 헌금해도 돈만 손해 봤지. 이익 되는 것 하나도 없더라.’ ‘저렇게 믿으면 다 하나님 사촌동생 되지.’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의 결단이 없으니 신앙의 진보도 없습니다.

어느 중학교 선생님이 교장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승진이 늦어지니 불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말합니다. “교장선생님, 제가 이 자리에 몇 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아십니까? 무려 25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승진이 늦죠?” 그랬더니 교장선생님께서 재밌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계산을 잘 못하셨네요. 선생님께서는 그 자리에 1년 밖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1년을 스물다섯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네요.”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갈수록 그만큼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노트 하나로 버티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말씀 앞에 지식도, 삶의 스타일도, 인격도 바뀌는 등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변화는 없고 오히려 반발하며 회개할 줄 모릅니다. 삶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나름대로 어설픈 신앙으로 호칭도 집사다 뭐다 붙으니 스스로 꽤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연륜이 오래라고 자랑하십니까? 성경을 좀 안다고 자랑하십니까? 어쩌면 이 때문에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믿지 못하고 마음대로 해석해서 욕심만 채우며 원하는 것만 들으면 영적인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성찰하는 교회와 교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니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자기 자신만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것을 수학자가 이야기하면, “네 분수를 알아라.”, 지리학자가 이야기하면“네 위치를 알아라.”, 경제학자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 가치를 알아라.”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네 꼬락서니를 알아라.”이렇게 말했겠지요?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거울은 특히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 설 수 없듯이, 우리 내면을 날마다 성찰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칼릴 지브란이 지은 “예언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왕이 왕관을 쓰고 거울을 보고 있을 때 거울 속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네게 절하고 인사하고 존경하는 것은 네 인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아느냐? 그것은 네 머리에 있는 왕관 때문인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여러분의 인격 때문입니까 아니면 소유와 위치 때문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중심을 돌아볼 줄 알 때에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사랑받고 복된 인생이 될 것이라고.

라오디게아 지방에는 자랑할 것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은행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은행이 많지만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지방에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AD 61년에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되었을 때 로마 황제가 복구비를 주었는데도 거절할 정도로 돈이 많았습니다.

둘째로 흑색 양모가 있었습니다. 18세기까지 이곳에서 생산 되었다고 하는데 고급스러운 양모가 생산되다보니 사람들이 유행을 찾고 멋을 부리게 되는 등 문화적으로 발달했습니다. 말하자면 마치 강북에 있다가 강남에 갔을 때 거리나 상점, 백화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라오디게아 지방도 그런 식으로 생활이나 문화의 질이 높았습니다.

그 지방에 또 유명한 것이 의약품이었습니다. 굉장히 발달한 의약분야 중에서도 ‘브리기안(phrygian)’이라는 안약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보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 했던 말씀도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좋다는 안약이 있다지만 진짜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안약을 바르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자랑할 것이 많고 사람들도 인정해주니 우쭐대며 ‘나는 부자다, 부자다.’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아느냐? 정말로 답답한 것은 네가 얼마나 곤고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것이다. 피부가 굳어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구나.’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짜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잘생긴 사람이더랍니다. 왜요?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못생긴 사람이 예뻐지기 위해서 이것저것 바르는 줄 알았는데, 잘생긴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잘생기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제가 설교를 좀 길게 하지 않습니까? 설교 짧게 하려고 얼마나 신경 쓰는지요, 저보다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달픕니다.

주님께서 불쌍하고 가련하다 말씀합니다. 보아야할 것은 안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그 피곤함과 지침, 좋은 옷 입었다고 하지만 진짜 가려야할 곳은 가리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 영혼을 보면서 말입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 정말 부요한 삶을 살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라. 믿음의 금을 사서 부요하게 만들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정말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어느 교수가 국가별로 행복지수를 조사했을 때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한 나라가 방글라데시입니다. GNP가 굉장히 낮은 나라입니다. 많이 가진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낮았습니다. 대신 자살률은 참 높았습니다.

주님이 말씀 ‘네가 정말 부요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 언제나 네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소망 가운데 붙드시는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진 자, 즉 믿음의 부요한 자만이 진정으로 인생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믿음의 금을 사라. 믿음의 금으로 풍요롭게 되라.’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아가 주님은 안약을 사서 바르라 하셨는데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네 속에 충만히 거하게 하여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는 병도 있고, 가난하고, 힘들고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까 고통스럽고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며 더 가까이 나갑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며 인생이 파멸에 빠지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아하, 내가 세상눈으로 보면 부족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니까 풍요로운 사람이구나.’ 이것이 영안이 열린 사람의 삶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또 흰 옷을 사서 입으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정결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진정으로 정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정결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다 괜찮은 사람 같지만 혼자 있을 때도 괜찮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인생이 없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덧입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은 바로 보혈의 피로 덧입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그리고 믿음의 풍요로움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하십니다. 오늘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며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셋째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의 중요성입니다.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도 많고, 해야 할 것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선으로 해야 할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되는 계명에도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음식은 아침이나 점심이 아니라 저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으로 빵을 포도주에 찍어서 간단하게 먹습니다. 점심은 정말 점찍듯이 간단하게 먹습니다. 저녁은 사랑, 친밀감, 신뢰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에게 베푸신 것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의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이 바로 마음문입니다. 열고 싶을 때 열리지 않습니다.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는 것이 마음의 문입니다. 주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고장이 났습니다. 열지 말아야 할 때는 잘 열립니다. 근심과 염려, 자존심 상하는 말이 들어오면 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들어와서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들어와야 할 말은 문 밖에서 사정을 해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들어오지 말아야 할 말은 들어와 나가려 해도 못 나가게 문을 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에는 늘 근심, 걱정, 자존심 상하는 마음만 가득 채워져 있어 부글부글 끓습니다. 온천물처럼 부글부글 끓고 마음속이 편안하지 않으니까 얼굴이 오만상 다 찡그려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 끝나고 안내를 해 보면 나갈 때도 무슨 야단맞고 나가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 지은 사람처럼 인사합니다. 은혜가 넘치면 “할렐루야”이렇게 나가면 되는데 참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밖에서 부르시는 주님, 문을 두드리는 주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리를 잡아 열거나 문을 부수기까지 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문을 잘 열어주지도 않고 열어줘도 아주 늦장을 부리는데도 열면 들어오신답니다. 가서 냉수라도 차려주면 같이 먹고 잔치를 베풀어주고, 그 집에 필요한 것으로 축복해 주시는 주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도해 주시는 주님, 축복해 주시는 주님, 공급해 주시는 주님, 주님은 그만큼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달 추천도서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달프게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자녀에게 고달픈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괜찮아, 엄마는 행복해. 너희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기뻐.’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혼자 울곤 했는데, 중학교 다니는 딸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딸은 ‘엄마 힘든 것 없어?’묻습니다. 엄마가 ‘응. 엄마 괜찮아!’ 하니까 딸아이가 엄마의 눈을 보며 다시 말합니다. ‘엄마, 힘들 때는 울어도 돼. 이미 엄마는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잖아. 엄마 힘들 때는 울어 괜찮아.’ 엄마의 눈에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집안의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가야하는줄 알았는데 철부지 같은 어린 딸이 어느 새 커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가정은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줄 줄 아는 이 딸의 말은 엄마의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아 용기를 더해줄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말은 어떻습니까? 아이의 말보다 힘이 없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귀한 딸이란다.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단다. 나는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단다. 결단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단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곧 들어오셔서 교제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으시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 됨을 너희가 믿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인 것을 너희들이 믿고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의 응답을 하는 모습이 너희들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외적인 것으로 괴로워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해하지 않고 내면을 살피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영의 눈을 뜨길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 주님보다 더 가까이 세상 것 두지 말고 주님과의 교제를 최우선으로 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 오늘 여러분 가슴에 닿기를 소원합니다. 부르심 앞에 응답하여 믿음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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