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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쉼을 얻으려면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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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 무거운 짐진 인생 >

우리 인생은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행인과 같습니다. 어려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인생을 살아보니 실감이 납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한 평생을 짐을 지고 살아가려니 얼마나 힘이 들고 수고스럽겠습니까?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수고스러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17) …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

고 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수고는 범죄한 인생에게 주어진 일종의 징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래 수고는 인간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운명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28)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소개로 바로를 만났을 때,

“네 연세가 얼마뇨”라고 묻는 바로에게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야곱은 에서의 낯을 피해 하란에 사는 외삼촌 집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고생했고, 모세는 동족을 구출하려다가 고생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 솔로몬의 탄식 >

그러면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솔로몬은 무어라고 했는가 알아봅시다. 전도서 2장 23절에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하는 솔로몬의 입에서 이 같은 탄식이 나왔다면 사정이 다릅니다.
신구약 성경에 수고라는 단어가 포함된 절수가 114개인데, 이 중 25개가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에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삶의 내용은 다릅니다.
솔로몬은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부왕 다윗에게서 약관 20세에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근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습니다. 사방에서 그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또 그는 탁월한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왕들과 귀인들이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으며, 열왕기상 10장에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다 해 보고 싶었고 실제로 다 해 보았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음악이나 연극을 즐겼으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무역선단을 만들어 멀리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무역을 하여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백향목으로 궁을 짓고 여러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었으며,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했습니다. 소떼와 양떼가 많았습니다. 은금과 보배가 넘쳐나서 여러 성에 나누어 보관했습니다. 노래하는 남녀와 처첩을 많이 두었으며, 후비가 칠백인이고 빈장이 삼백인이나 되었습니다(왕상 11:3). 그는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

고 했습니다(전 2:10). 이 세상에 솔로몬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솔로몬이 인생의 수고로움을 가장 절실히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 인생의 불행은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 >

솔로몬의 불행은 인간 욕망의 끝없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욕망이 시키는 대로 쉼 없이 성공을 추구하고 쾌락을 탐했습니다. 어찌 보면 솔로몬은 현대인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현대인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7)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

라고 했습니다. 이는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피곤하고 수고로울 수밖에 없음을 그가 경험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왜 인간들이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떠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신데, 하나님을 떠났으니 생명이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신데, 하나님을 떠났으니 속되고 불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을 떠났으니 저주로운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힘을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포로가 되었고, 욕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쉴 줄을 모르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애씁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달성하면 곧 바로 더 큰 욕망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이 피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 참 안식을 누리려면 >

그러면 욕망의 포로 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 안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죄는 불행의 원인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비유컨대 죄는 우리 몸을 병들게 하는 세균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방법으로 우리 죄를 해결해 주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용어로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란 남의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함으로 그 사람의 죄책을 면제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또 성경에는 속량(贖良)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속량이란 종의 신분을 면하고 양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

고 하셨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생들을 풀어 자유케 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인류의 위대한 성현들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 한 분만이 구세주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시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요 1:14)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자유 >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들을 죄에서 대속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져 주셨으므로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의 피를 지불하고 죄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놓여나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마귀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인습과 압제에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껏 우리 마음이 죄책에 짓눌려 평안을 누리지 못했는데,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나니 마음이 날아갈듯이 가볍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해 내리신 해방선언문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될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 삶의 무거운 짐을 맡겨야 합니다 >

그리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성도는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가장 무거운 죄짐을 맡아주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짐들을 맡아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할 일은 끝난 것이요, 그 다음은 주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슴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과연 계획대로 될 수 있을까 불안 해 합니다. 장년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힘쓰지만 나날이 거세 가는 세파에 하루하루 염려가 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불안해하지 말고 자신의 미래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 “너 가는 길을 다 맡기어라 / 크든지 작든지 모든 경영
만경의 창파 무서운 길도 / 주님이 인도하시도다“

성도님들, 여러분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삶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경제생활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방금 읽어드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육신의 질고도 맡겨야 합니다 >

그리고 우리는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이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옷에 손만 대어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에 몰래 손을 대었던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와 같이 주님께 믿음의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육체의 연약함을 해결해 주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을 고쳐 건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고쳐주셔서 활기찬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둘째는, 병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의 영적 상태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매우 고통스러운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성가시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그 가시가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역설적이게도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연약함이 능력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 마음의 미움과 분노의 짐도 맡겨야 합니다 >

그리고 우리는 미움과 열등감이 무거운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누명을 쓰거나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당하는 등 억울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고 미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누굴 미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잠 6:27)

라고 하신대로, 마음에 미움의 불을 품으면 상대방을 태워버리기 전에 먼저 내가 타 죽고 말 것입니다.
인간관계와 관련해서 한국인들에게만 있는 질병이 있는데, 화병 (火病)이 그것입니다. 화병을 그대로 두면 죽는 일이 생깁니다. 화병을 고치려면 속 시원하게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19절로 21절에 원수 갚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자신과 상대방을 죽이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면 원수의 눈앞에서 우리에게 잔칫상을 베풀어 주시는 방법으로 복수해 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만났거든 요셉을 생각하십시오. 그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해서 이스마엘 상인에게 은 이십 개를 받고 팔았습니다. 열일곱의 꿈 많은 나이에 요셉은 머나먼 이국인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형들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이가 갈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쾌활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나 거기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른 살 되던 해에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준 일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젊은 날을 보내던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바로 다음의 권세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가나안에 살던 형들이 기근을 만나 양식을 사러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복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했던 것의 열배, 아니 백배라도 갚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복수는커녕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과 그의 모든 가족을 애굽의 기름진 지역인 고센 땅으로 초청해서 살게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은 그 앞에 엎드려 사죄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나를 억울하게 하고 괴롭힌 사람에 대한 미움을 내어버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참 평안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음에 쉼을 누리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을 때 우리를 억누르고 수고스럽게 만들었던 욕심과 미움과 교만과 같은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지고 맑고 밝고 평화로운 마음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는 소나 나귀를 두 마리나 세 마리씩 연결시키는 기구를 말합니다. 밭을 갈거나 무거운 수레를 끌 때, 여러 마리의 소나 나귀의 등을 멍에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면 여러 마리가 보조를 맞추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과 함께 짐을 나누어지자는 뜻입니다. 아니, 짐을 맡기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다시 짐을 나누어지라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지자고 하신 짐은 우리가 맡긴 짐이 아니라 주님의 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0절에 보니,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주님께 맡겼으므로 더 이상 수고로운 인생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주님과 나란히 서서 주님의 멍에를 함께 져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무거운 짐을 두 사람이 함께 옮겨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둘이 옮기지만 사실은 힘센 사람이 더 많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인생길을 간다면 주님께서 그 짐을 책임지실 것이므로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수고스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멍에와 짐이 가벼운 이유는 그것이 사랑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고생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은 힘들지가 않은 법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해서 하려고 합니다. 자원해서 하는 일은 어려워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양들을 위한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능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시 기도하시기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 마지막 권면 >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의 무거운 짐, 생활의 무거운 짐, 질병의 무거운 짐, 인간관계의 무거운 짐을 다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심으로 참된 쉼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내 짐인데 내가 책임져야지 하면서 고집을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고집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기고, 그 대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의 짐을 함께 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목적지인 영원한 본향에 이르는 그 날까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하는 즐겁고 복된 하루하루를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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