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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으로 (행 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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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현대의 심각한 이단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수 신앙에서 있음직한 이성주의이고,
둘째는, 그 반대되는 신앙에서 있음직한 신비주의입니다.

이 둘의 참 모습은
◦ 신앙의 양 극단적 모습이고,
◦ 성경을 제쳐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참모습은 어때야 되나요?
곧 성경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니”

예수님처럼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1) 성경

그렇다면 왜 성경적 이어야 합니까?
쉽게 변하는 풍조와 날마다 변하는 이 세대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마 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세계적 권위를 가져 지성인들의 참고서로 활용되는 브리태니커나 옥스퍼드 사전도 10년에 한번씩은 내용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성경만큼은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단 한번도 오류가 발견되거나 내용이 수정되거나 보완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물론 사도들조차 구약을 인용하였고, 초대 교회 교인들은 신약까지 믿어 믿음의 정절을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에 있어서 가장 권위 있는 반석은 성경 외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성경은
① 성령님으로 기록된 만큼 역동성이 있습니다.
곧 능력이 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예수님 돌아가신 후 낙심하며 고향으로 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행하셨으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 저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 부활의 증인 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때로는 깨트리는 방망이가 되고 혹은 태우는 불도 되어 완악하고 심지어는 죽어진 영혼과 내려가는 신앙도 올라가는 신앙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회개, 감동, 믿음, 치료 등 각종 기적의 사건과 사실을 이루어 냅니다.

② 이 성경은 오직 통일된 목적인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오늘날 예수님은 육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뵙고자 한다면 성경을 통해서 뵙고 음성 듣고자 한다면 성경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악을 일으켰던 흉악범들이 형무소에서 새롭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의 고백을 편지로 들어보면 그 안에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뉘우침 중 하나는,
「내가 사회에 있을 때 이런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하며,
지금에서라도 예수님 만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③ 이 성경 말씀은 계시된 하나님 말씀이기에 모든 것의 표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시 119: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그 의를 바탕으로 하여 자유민주국가의 헌법과 규례와 각 조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현대 상황

그러나 유감 되게 현대의 성도들은 성경을 잘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 성향이 짙습니다.

때론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중요하고 믿는 것보다는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변론을 합니다만,
실제는 변명이고 핑계입니다.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여름성경학교」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은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목적은 오직 성경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의 사회현상을 보십시오.
지금에 비해서 가난하고 무식했어도 기독교적 영성이 사회와 가정에서 빛을 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경학교, 사경회는 말조차 쓰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는 행사위주와 흥미 본위로 흘렀고 성경교사들은 놀아주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세상 변화에 맞추다보니 그만 본질에서 벗어나고 결국은 맛 잃어버린 소금되어 밟히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역사 실례를 소개합니다.
1960년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한 이래 모든 공립학교에서는 「성경」과목을 폐지했습니다.

곧 사회 문제 발생했는데 1970년대의 히피문화의 등장으로 마약, 폭력, 자살, 낙태의 증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 위기를 느낀 어느 주는 성경과목을 신설하고 어느 고등학교는 교장의 재량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말씀을 경험치 못한 어른들은,
가정에서 조차 입시공부, 영재교육은 시킬지언정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교육입니다.
그 자녀가 지식인은 될 수 있으나
      지혜는 가질 수 없으며,
혹 성공자는 될 수 있으나
오히려 그 성공이 바르게 발휘 못해 사회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정 사역의 대표 주자인 제임슨 톰슨 박사는
자녀 교육을 말하면서
① 하나님에 대한 경외
② 이웃 사랑
③ 권위에 대한 존경
④ 말씀에 대한 순종
⑤ 자기 절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훈은 성경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가정도, 교회도 성경으로 되돌아가고
성경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살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마구 붕괴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각종 해악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대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 119:93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언제나 경건하면 불의는 그쳐지게 되고 불경건하면 불의는 증가하게 마련입니다.


3) 성경에 관한 믿음

여러분은 성경에 관하여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졌다면 내 발의 등불이요
내 생활의 빛으로 여겨 사모했을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창문에 걸터앉아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설교가 좀 길어지니 졸다가 덜어져 죽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테반집사의 설교가 듣기 싫어 귀를 막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참 믿음은 말씀을 사모하고 기뻐함에 나타납니다.

  시 119:54 “나의 나그네 된 지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시 119: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할 수 있는 연구조사가 있습니다.
읽기 10%
듣기 20%
보기 30%
보고듣기 40%
큰 소리로 읽기 70%
행하기 90%
암기 100%

모든 성도가 성경박사나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도리는 최소한 「어디 어디서 근거한다」는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종종 여호와 증인들을 마주칩니다.
그네들이 우리와 똑같은 성경을 펼쳐놓고 「진리」에 대하여 논하자고 할 때 일반적으로 피합니다.
여기에 현대교회의 현 주소가 있습니다.
보이는 적도 이길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것인 마귀, 시험, 환난 등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아굴라는 성경을 배워서 유력하게 공중 앞에서 유대인의 말을 이겼습니다.
아굴라의 승리가 예수 승리요 성경 승리입니다.

본문에는 말씀을 「상고」 하는 무리가 나옵니다.
그중 「믿는 사람이」많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말씀에 나온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결 론)

우리에게는 우리말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소유하거나 보거나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유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이 은혜 외면해서야 됩니까?
이 성경 덮어두고 자기감정이나 전통에 따라 가서야 되겠습니까?
성경으로 되돌아갑시다.
영혼이 소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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