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세의 불의한 행동 (민 20:7-13)

  • 잡초 잡초
  • 448
  • 0

첨부 1


- 설교 : 이용호 목사

  외과의사 장로님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의 수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취에서 깨어난 목사님을 보고 그 장로님이 위로 겸 농담을 한마디 했습니다. “목사님, 난 이제 목사님 뱃속을 다 압니다.” 그렇습니다. 신체구조상 뱃속은 알겠지만 목사님의 마음은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제가 성경을 보는 중에 계속 저의 마음속에 명백하게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그것은 명쾌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한번 질문을 해볼 만한 주제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를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했느냐? 그 죄목이 “네가 나를 믿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은 인간적인 상식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모세만은 가나안 땅에 꼭 들어가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불러 가시고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네가 이 백성을 가나안에 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따지고 나오는 죄는 도덕적인 죄도 아니고 법적인 죄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 안에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치리할 때 ‘당신 잘못 믿고 있다’ ‘당신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다’라고 해서 벌을 줄 수 있습니까? 못 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따지고 나오는 죄는 도덕적인 죄입니다. 교회가 따지는 죄는 도덕적인 죄입니다. 또 교회법을 어긴 법적인 죄입니다. 성도들이 매주 부도덕한 짓을 하고, 매주 교회법을 어기고 사는 그런 교인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법의 문제가 되고 도덕법에 문제가 되어 매월 교회 앞에서 치리를 받는 이런 모습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믿음의 법을 요구하십니다. 모세를 보고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를 믿음의 사람에서 제외하면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됩니까? 모세만한 믿음의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는 모세를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자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높였습니다. 그를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그런 모세를 보고 “너는 나를 믿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모세를 징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교회법을 안 어기고, 부도덕한 짓을 안했다 해서 태연히 예배드리고 태연히 나는 교인이요 목사요 장로요 집사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안 본다는 것입니다. ‘너 지금 믿지 않고 있어’ ‘넌 지금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는 아무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이 문제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이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았어” “네가 날 믿지 않고 있어” 그것을 가지고 지금 모세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차라리 ‘너 도덕적으로 잘못됐어. 너는 법적으로 죄인이야’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홀가분한데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원망의 도전과 모세의 실수

  그러면 모세가 왜 하나닢 앞에 이런 무서운 징벌을 받고 있는가? 그 과정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지도를 받아서 애굽을 나온 후에 모세에게 원망하며 대항하며 끌려오다시피 하면서 모세를 따라옵니다. 므리바 물가의 가데스바네아에서, 신 광야에서,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없이 모세를 반항하고 원망하면서 따라오는데 이제 신 광야 므리바 물가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그 도가 지나칩니다. 본문 20장 4절에서 “모세야 우리가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을 뻔 했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내어 이렇게 목마르게 하느냐, 왜 이 광야로 인도해 내었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5절에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여 파종도 할 수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앞에 원망을 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을 때에 이런 사태가 일어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길을 주셨습니다. 물이 없어 원망하는 이들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는데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항과 원망 앞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이제 모세가 여기서부터 실수를 하고 나옵니다. 이 ‘패역한 너희여’ 라는 말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저주의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패역한 너희여’ 라는 이 말을 하는 순간에는 모세가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했습니다. ‘우리가’라고 했는데 조금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나님이 모세를 보고 심부름만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우리가 어떻게 이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겠느냐? 자기들이 물을 낼 것처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만 했습니다. 모세는 심부름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11절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세 번의 실수가 일어납니다. ‘패역한 세대여’라는 모세의 말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이 저주해야 될 그 말을 지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권도 있고 축복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알고 저주를 했습니다. 우리가 물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내세웠습니다. 아론과 같이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것도 매우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지팡이 사용하는 것을 여러 번 지시했습니다. 홍해 바다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지팡이를 잡고 손을 내밀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라”고 했습니다. 지팡이를 하나님은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향하여 물을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로 반석을 ‘땅’ ‘땅’ 두 번 친 것입니다. 한번 치는 것도 안 되는데 두 번 쳤다는 것도 모세가 지금 분노를 삭히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러한 은둔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서론에 말한 대로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는 그 행동에는 믿음이라는게 전혀 드러나지 않고, 믿음이 스며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 순간만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할 때는 믿음의 감정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게 아니라 하나님은 죄목으로 따진다는 말입니다.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일과 내 일을 구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따지고 나옵니다. 하나님께 돌릴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고 그것을 내가 취하면 하나님의 거룩을 도적질한 것입니다.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이 따지고 나오는 죄목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따지고 나오는 문제입니다. 모세는 한 평생 하나님을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모세는 자기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법

  이제 우리가 다른 길로 생각을 합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믿음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법을 가지고 우리가 문제 삼는 사람이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가 믿음의 법을 가지고 교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정죄하지 못한다 해서 이 법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다, 이것은 무효다 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생활에 이 두 가지 법을 충족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는 믿지 않았다 라는 이 평가가 아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데로 될지어다’ 이 평가를 가지고 하나님께 충족을 시켜 드려야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모세가 실패하는 이 순간의 모습을 가지고 이것이 사람들 앞에 문제가 안 된다고 해서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는 이 일도 물질적 손상도 없고, 내 체면 깍일 일도 없고, 하나도 문제가 안 되는 일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우리 삶의 축복을 감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로 인해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 이상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관찰해 보면 하나님이 아주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이 사건과 연관해 가지고 다룹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모세와 아론을 여기와 연관해서 다루지 않지만 이 사건이 있은 이후에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여기에 준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를 느보산에서 불러 가십니다. 가나안 땅을 보여주고 “보라 약속의 땅이 네 눈앞에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모세를 느보산에서 불러갔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론도 불러갑니다. 민수기 20장 26절에 보면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니라” 이제 너희들은 이만해도 할 일 다 했다. 아론의 옷을 벗겨서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힙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자기의 거룩을 침해한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법대로 다루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큰 영적인 교훈입니다. 우리가 땅위에서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다고 자부한다면, 정말 예수를 바로 믿는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인식한다면 믿음의 법에서 충족이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일에 충족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안 하면서 나는 바로 믿는다 라고 우리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이 두 가지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겁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이름 부르고,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서도 복은 달라고 구합니다. 준 복을 통해서도 하나님 거룩을 안 드러내는데 그 위에다 또 복을 달라고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맞지 않는 기도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고 앞을 보자

  한국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이 입양아들을 태워가는 비행기에 같이 탄 것입니다. 우리 입양아들을 데리고 가는 그 미국인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너무 가책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을 이렇게 외국인 손에 넘기고 있는 이 나라, 백성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 목사님 자신이 너무 부끄럽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대단히 필요한 원리라고 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 모세와 아론도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와 아론의 이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배우고자 하는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모세의 실패를 우리가 본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세의 불의한 행동은 우리가 본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행동이 일어나는 그 현상이 어째서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가데스바네아 신 광야에 와서 그토록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에게 반항하고 달려들느냐?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난 날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힘 드는 대목이 올 때, 지난 날 하나님이 네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고통만 보고 지난 날 하나님이 내게 베푼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데스바네아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베푼 은혜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푼 지난 날의 은혜는 무효가 안 됩니다. 우리가 힘들 때마다 지난 날 하나님이 베푼 은혜를 기억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얼마 후에 들어갈 가나안 땅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물이 없고 먹을 게 없고 과실이 없는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한 여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영구히 살라는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될 여정인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실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하나님 은혜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도 그만 백성들과 함께 이 두 가지를 깜박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살다가도 지금까지 하나님이 베푼 은혜를 하루아침에 내 나름대로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언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었나 마치 미래가 없는 것처럼 앞을 너무 볼 줄 모르는 불신앙을 우리가 가지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가 극복하면 됩니다. 힘들 때 하나님이 지금까지 내게 베푼 은혜를 새기고, 앞을 멀리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가 있습니다.

  항해사나 비행기 조종사들이, 차를 운전하는 운전사들이 제일 겁내는 게 안개입니다. 앞이 안 보이는 안개, 10m 앞이 안 보이는 안개가 흔히 있습니다. 여러분, 10m 앞이 안 보인다 하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심지어 5m도 안 보이는 안개가 있습니다. 전혀 앞이 안 보이는 안개가 있습니다. 그 안개를 이길 운전사가 없고, 비행기 조종사가 없고, 항해사가 없습니다. 폭풍보다, 파도보다, 해적보다 더 무서운 게 안개라고 합니다. 앞을 못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런 영적인 안개를 헤맬 때 우리가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실수는 우리들에게 표상으로 주어준 하나의 예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엄격히 다루는 이것이 모세에게만 있는 가혹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이 원리를 가지고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대로 다루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서도 하나님이 이 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믿음의 법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법 안에서는 하나님의 세계가 잔인한 것입니다. 거기는 도덕적인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법적인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믿음의 법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믿음의 법이 걸리면 앞의 것을 다 통과해도 안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너희는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역사적인 거울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는데 아주 기억하기 좋은 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서는 겸손하라, 젊어서는 부드러워라, 온유해라, 장년 때는 공정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훗날에 하늘나라 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첫 질문을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 돈 거래 할 때 공정하게 했느냐?”라는 것입니다. 한창 일하는 장년 때는 공정하게 해라, 즉 훗날에 문제가 될 것을 감추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년 때는 신중하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만 후반에 와서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와 아론은 경거망동을 했습니다. 모세처럼 바위를 치는 이 행위를 한다, 안 한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이 물을 내는 이 사건을 통해서 그들이 실수했듯이 우리는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속에서 이 모세와 아론처럼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범사에 모세가 저지른 이 불신, 이 불의함이 얼마든지 일어날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고, 아론의 제사장 직무의 옷을 벗겨서 불러 가시는 하나님의 이 준엄한 심판은 교회는 어떤 것보다도 믿음의 법이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법은 당회가 행사하는 법이 아닙니다. 당회장이 행사하는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담판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적용하는 법입니다. 그 법을 두려워하십시오. 당회치리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이 벌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는 믿음의 법 앞에 우리가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경고를 우리에게 던져주는게 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닙니다.

  맺는 말

  여러분이 교회에 오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이런 말을 어디에 가서 들을 것입니까? 연극볼 때 그런 말 합디까? 영화관에서 그런 말을 합디까? 어느 파티 가니까 그런 말을 합디까? 오직 하나님의 교회에 올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성이 바로 믿음의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지 않고는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말이 믿음의 법입니다. 모세를 다루는 이 믿음의 법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 믿는 자들을 다루는 법입니다. 그 법은 조용합니다. 그 법은 지금 문제를 삼지 않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법에 있는 사람과 공의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 법 앞에 우리가 자유로워야 되고, 그 법 앞에 우리가 당당해야 됩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는 이 말이 우리의 생애 속에 너무 많이 해당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가나안 입성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하나님의 심오한 그 분의 믿음의 법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불의요 불신앙이었습니다. 모세의 불신앙, 이것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의 이정표가 됩니다. 모세의 불신앙을 보고 그 모세가 저질렀던 불신앙을 극복해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런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