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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만남 (눅 10: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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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대식 목사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운명은 만남이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좋은 만남 속에 행복이 꽃피고 나쁜 만남 속에 슬픔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만남이 잘 된 사람들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사람, 좋은 스승을 만나 잘 배운 사람, 좋은 인간관계 속에 성공한 사람들, 그 모두가 다 만남이 잘 된 이유입니다.

반대로 실패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은 거의 사람을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날마다 한숨과 원망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나 치명적인 손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정자들을 잘못 만나 고생하는 국민들도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보아도, 많은 사건들이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만남의 눈으로 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좋은 만남은 행복과 축복을 가져오지만, 나쁜 만남은 불행과 실패를 가져옵니다.

에덴은 행복의 동산이요, 축복의 동산입니다. 그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만나 살고 있었을 때에는 그 행복과 축복을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에덴에서 사탄을 만났을 때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엄청난 저주와 형벌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만남이 성공과 축복의 길로 인도 받을 수 있지만, 잘못된 만남은 실패와 저주의 길로 우리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난 한 사람이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꼭 만나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만나나 마나 한 사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입니다. 셋째는 꼭 만나야 할 사람입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가? 어떤 만남이 좋은 만남인가? 어떤 관계 속에서 좋은 만남을 이루어야 할 것이냐?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좋은 만남은 좋은 부모와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좋은 만남이란 우선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 만난다고 하는 것이 자식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만난다고 하면, 과연 나 같은 부모를 자식들이 선택하겠는가? 내 자녀가 선택의 여지없이 내 자식이 되었으니 내 자식이지, 내 자녀가 부모를 선택해서 만난다면 과연 나 같은 부모를 선택할 것인가? 한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어느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딸이 나 같은 사람을 사윗감이라고 데리고 와서 소개를 한다면, 과연, 참 좋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딸에게 꼭 적합하다 이렇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물어 보았더니, 3분 2는 안된다고 했고, 3분 1만 좋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또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할 때, 내 자녀가 나를 자기 부모로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도 역시 부정적인 대답이 더 많았습니다. 참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 자녀를 내 가정에 주셨기에 마련이지, 선택권이 자식에게 있다면, 자녀들 없이 살아야 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주리라 할 수는 있습니다. “나는 아빠 같은 분이 좋아요, 엄마 같은 분이 좋아요” 이런 사람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이 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 습관, 내 생활을 내가 바꾸기는 어렵지만, 자식을 위해 좀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집에만 들어오면 텔레비전 보는 아버지 밑에서 바라난 아이들은 텔레비전만 봅니다. 비디오만 보는 어머니 밑에서는 아이들 비디오만 보려고 합니다. 집에만 들어오면 싸우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결혼해서 싸우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하기 싫어도 집에 들어와 책을 보는 아버지, 일마치고 틈나면 성경 보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아이는 역시 공부 잘하고 신앙생활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기도가 익숙치 않아도 자식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가난해도 정말 성실하게 사는 아버지 모습 밖에 네게 보여줄 것이 없다, 정말 열심히 사는 네 어머니 모습을 남겨주겠다, 이렇게 자녀들 위해 내 삶을, 생활 자세를 바꾸어 나가시는 부모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진정 너와 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만남이 되기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하리라, 이렇게 자녀와 부모 간에 좋은 만남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둘째, 좋은 만남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나와 함께하는 친구, 진정 나의 위로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을 알려면 가장 친한 친구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 자녀를 평가하기 어려울 때 가장 친한 친구를 데려와 보라 하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이 10등 안에 들면 내 자녀도 대충 성적이 그렇습니다. 친구들이 40등 넘어가면 내 자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때문에 좋아질 수도 있고, 친구 때문에 나빠질 수도 있지만, 내가 나쁜 사람이기에 나쁜 친구와 어울리고, 내가 좋은 사람이기에 좋은 친구와도 어울리게 되는 법입니다. 친구를 잘 만난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믿음 좋은 친구를 만나면 틀림없이 그 사람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도를 받아도 누가 전도했는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 약한 사람이 전도하면 그 사람도 믿음이 약할 확률이 높습니다. 주일에 1번 교회 나오는 사람이 전도하면 그 사람도 거의 틀림없이 주일에 1번 나옵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이 전도하면 그 사람도 거의 틀림없이 새벽 기도회에 나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자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예배 마치고는, 오후에 준비하고 있어, 말합니다. 오후 예배에도 가는 거야? 그럼, 또 가는 거야. 또 오후예배 마치고는 말합니다. 오늘 저녁 일찍 쉬고 있어, 내일 새벽에 전화 걸께. 새벽에도 나가는 거야? 그럼, 한번 해봐, 괜챦아, 안 좋으면 내가 가겠어? 그럼 나도 자지. 괜챦아. 한번 나와 봐.

그런데 1주일에 1번 나오는 사람이 전도하면, 이따 오후에 교회 안 나가는거야? 물으면, 그럼, 안 나가는거야. 안가도 되는거야,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안 나가지만 당신이라도 가봐, 이렇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전도를 받아도 누구에게 전도를 받았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친구와 만났는가가 그 사람의 삶과 생활과 믿음을 결정합니다.

내가 화투 할 줄 몰라도 주변에 화투 잘하는 친구 몇 명 있으면 몇 달 안가 화투에 도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믿음이 전혀 없고, 신앙생활이 시원챦아도,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몇 달 지나게 되면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리라 다짐을 해야 합니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만남을 갖게 해 주리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절에 보면, 한 사람이 중풍에 걸려, 꼼짝 못하고 방에 누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소문을 들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좋은 친구 네명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돕기 위해 들것에 싣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계신 곳에 이르렀더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쯤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는 친구를 가졌기 때문에, 물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물러가지 않는 친구를 가졌기 때문에 만나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그 위에서 병자를 끌어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서 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들 주변에 이런 좋은 친구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런 좋은 친구가 있으면 비록 인생 살다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 친구가 나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내가 살다가 병들어 지칠 때에도 그 친구가 나를 주님에게로 인도하여 이끌어 줄 것이니, 참으로 그런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편 삼손 같은 이는 참으로 힘이 세었으나,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주변에 좋은 친구가 없어서 실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좋은 만남,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며, 억지로라도 좋은 사람이 내 친구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 주리라, 좋은 만남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리라, 힘쓰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좋은 만남은 참 좋으신 우리 주님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좋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식구가 우리 가정에 들어와야 합니다. 창세기 30장에 보면, 라반이라는 사람은 그저 근근히 생활하는 사람이었으나, 그가 사위 야곱을 잘 만나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라반의 가정에 복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또 구약 룻기에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은 과부 3대의 집안에 살았지만, 며느리 룻을 잘 만나서 가문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은 종을 하나 샀는데, 이 종 요셉을 둔 후부터 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 가정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좋은 직원과의 만남이 그 사업의 승패를 좌우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러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좋은 부모를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와 사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만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없으나, 우리 예수님은 나의 죄와 허물의 값으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장 귀한 동행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사랑해도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내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훌훌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 주님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동행 하시며 나에게 세상을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다 뺏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길로 지나갔지만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간호해 살려 놓았습니다.

이 사건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아니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습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 좋은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 여리고로 내려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이 험한 인생 길에는 도처 도처마나 마귀떼가 들끓어, 우리의 행복과 기쁨과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 영혼까지 빼앗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나의 참 좋은 친구요, 영원한 구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갈보리 언덕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기만 하면, 그래서 내 영혼의 가슴을 활짝 열고 주님 흘리신 보혈을 내 심령 속에 담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영혼을 치유하여 주실 뿐더러 구원의 확신과 내일에 대한 소망을 덧입혀 주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좋은 부모와의 만남, 좋은 부부와의 만남, 좋은 친구와의 만남, 좋은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덧입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좋은 만남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리라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좋은 만남 속에, 구원의 은혜와 행복의 은총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고 사시는 복된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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