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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에 참예할 자 (벧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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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윤형 목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6).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님말씀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권고하여 사람을 키우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자녀를 올바른 인격자가 되도록 말씀으로 가르쳐야하고, 학교에서는 지식과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가르쳐야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의 교양과 법도로서 가르쳐야합니다. 이렇게 양육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고, 귀한 사람이 되고,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쓰임 받는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장로라고 겸손히 말하는 것은 자신을 인생의 연장자로서 인생의 선험자로서 가르치고 양육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르칠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의 가장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겟세마네 기도의 현장에도, 예수님의 불법한 재판의 현장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쏟으시고 물을 쏟으시는 고난의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에 동참하여 복음을 위하여 수많은 핍박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고난의 증인으로서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영광 중에 임하시는 재림의 날에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하는가?


Ⅰ. 하나님의 일을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본문 2~3절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지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되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억지로 한다든지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서 해서는 않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자체가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그 자체가 축복인 것입니다. 큰일이었던지, 작은 일이었던지, 좋은 일이었던지 궂은일이었던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헌신의 사역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생색내는 일은 그나마 받은 은혜도, 축복도 다 쏟아 버리는 행동입니다. 특히 교회의 일을 하면서,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무슨 칭찬이 있는가? 무슨 상급이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일은 이미 헌신의 사역이 아니고 삯을 받는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은, 믿음이 앞서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일을 하는데 주장하는 자세로 해서는 않됩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제일 잘하고,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해서는 않됩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겨야합니다. 내 생각이 옳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고, 내 생각보다 네 생각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성도는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지체들은 서로 상합하여 몸을 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지체된 성도는 지체된 성도의 부족함을 서로 채워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하고 힘을 합해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성도는 목사를 서로 세워 주고 서로 품어 주고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Ⅱ. 겸손해야합니다.

본문 5절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귀히 여기고, 남을 존경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16:18). 멸망의 앞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은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존경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모든 일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을 버리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히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융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내가 제일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 개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순한 동물은 무리를 지어 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혼자 삽니다. 양들은 언제나 떼를 지어 풀을 뜯어도 맹수들은 함께 먹질 않습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성경은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전4:12).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고 했습니다(전4:1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 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전4:9).

앞이 보이지 않는 소경은 앉은뱅이를 업고 가면 외나무다리도 건널 수 있습니다. 성도는 모든 덕으로 옷을 입은 후에 그것들을 겸손이라는 허리띠로 매어야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도, 목회자의 권위도, 충성과 봉사와 열심도 겸손 안에서 행해져야 기독교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Ⅲ.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합니다.

본문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염려거리가 많은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 염려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부터, 주택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가정문제 등등 한 순간도 염려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는 신경성 질병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염려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고 조화롭게 창조하셔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염려거리가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 함으로 염려라는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고, 벗었으니 입을 걱정꺼리가 생기고, 그리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렸습니다. 인간의 죄로 염려거리가 생겼으니 이것은 제거하는 길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사망의 형벌과 염려에서 해방되고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예수 십자가 앞에서 수고와 염려의 짐을 다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에 참예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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