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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귀한 자녀(15) (엡 6:4, 잠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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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높은뜻 숭의교회)

우리 교회의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의 높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영어 표기는 God"s will soongeui church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교회의 mission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인이 먼저 건강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교인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건강한 교인이 되기 위하여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것과 같은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됨’과 ‘함’입니다. ‘됨’은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함’은 일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은 하나님의 젓가락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잔칫상을 차려드리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됨’은 어떤 일과 사역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은 ‘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설교를 하고 목표를 세우고 조직을 하여도 하나님을 위한 잔칫상을 차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사역을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설교는 ‘무엇보다 귀한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어떤 자녀가 되게 할 것인가를 통하여 ‘사람 됨’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 전에 하였던 설교는 ‘Buffet, just for God"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사역 즉 ‘함’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이 두 설교를 마음에 새기시고 기도하면서 노력하신다면 저는 저와 여러분이 건강한 교회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는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경주하는 삶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자녀를 위한 기도 중에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를 기도를 합니다.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빼놓지 말아야 할 기도 중에 하나가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잘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자녀를 양육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하였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기도하지 않고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성취한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만 기도하지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겸손한 척만 하지 실제로는 교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 교만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삶에 멸망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품으라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것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겸손과 낮추심을 말씀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1)

빌립보서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오늘 본문으로 읽은 잠언 18장 12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에게 꿇게 하셨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는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무릎을 꿇고 싶으리만큼 존경스러운 사람과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몇 사람과 일이 생각났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23년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목회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게 된 임택진 목사님께서 은퇴식에서 답사를 하셨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답사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답사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는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의 말씀을 암송한 후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동안 감사 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신 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강대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 김익명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참 사업을 하실 때 교회 재정의 1/3 정도를 혼자 하시리만큼 헌금을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유년부 교육전도사 시절 그 분이 유년부 부장이셨습니다. 얼마나 일을 잘 도와주시고 후원해 주시는지 제 목회생활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에 건의 할 일이 하나 있어서 그 장로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시는 분이시니까 당회에서도 당연히 발언권이 강하시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 장로님에게 말씀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제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셨습니다. 자기는 당회에 가서 가급적 발언을 안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었을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연보를 많이 하든지 말을 많이 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둘 다 다 하면 못 씁니다”

영락교회에 김광호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고 제주도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 같으리만큼 겸손하신 분입니다. 겸손을 생각할 때 늘 생각이 나는 장로님이십니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와 고생 끝에 집을 하나 사실만한 돈을 모으셨습니다. 집을 사려 하시다가 맨 손으로 피난을 내려와 굶어 죽지 않고 돈 까지 벌게 되었는데 내 집부터 사지 말고 하나님의 집부터 사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여주에 땅을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나중에 당신 집을 사시게 되었는데 여러분도 충분히 상상이 가시리라 믿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본래 사려고 하던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사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주에 건축하신 교회에 헌당예배 때 참석하신 이후로 한번도 찾아 가지를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행사에 여러 번 초청을 해도 정말 고집스럽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자기는 영락교회 장로지 그 교회 장로가 아니며,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자꾸 찾아가게 되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대 사역을 감당합니다. 믿음 없고 말 안 듣고 불평만 일삼는 백성들을 인도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고 외로웠었는가는 민수기 11장 11절에서 15절 사이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 같은 고생 끝에 모세는 드디어 자기의 사명을 완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으신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공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공을 아시기 때문에 그 공을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모세의 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겸손해 질래야 겸손해 질 수 없습니다. 가나안은 모세에게 교만의 위험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면 평생의 수고와 공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험에서 모세를 건져 영원토록 모세의 수고와 공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무 원망과 불평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느보산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외롭게 혼자 죽습니다. 마음껏 이스라엘 온 지파를 축복하고 죽습니다. 우리는 그 축복의 기도를 신명기 33장과 34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느보산에서 정말 외롭게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세의 겸손에 대하여 ‘존귀의 앞잡이’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맨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겸손은 자기와 자기가 한 일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겸손은 말로만 쉽지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 싶으리만큼 어렵습니다.

겸손은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자신을 대단치 않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 집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가 되려면 늘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면 우리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티끌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지렁이 같고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만 서면 누구나 다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와 같은 사실을 잊습니다. 즉시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됩니다. 훌륭한 존재가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또 사실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우리 인간 보다 대단한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려면 충성하여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충성한 후에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충성은 겸손의 필수 조건입니다. 충성이 없다면 느보산에서 죽어도 겸손이 아닙니다.

1분도 안되는 은퇴사가 겸손이 되는 까닭은 그가 23년 동안을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당회에서 말 안한다고 겸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교회 재정의 1/3을 혼자 감당하리만큼 충성하고 말을 안 하였기에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다고 겸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기 집을 사기 이전에 하나님의 집을 먼저 사드리는 충성이 있었기에 그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일이 되는 것이고 겸손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안에서 충성할 때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충성하지 못할 때 겸손할 수 없고, 충성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밖에서 충성하면 교만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멸망의 선봉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존귀의 앞장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존귀의 앞장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겸손을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 장군과 같이 자신과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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