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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②> 사랑의 사도 요한 (요일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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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작년 이맘때쯤 제가 ‘제자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ABC급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A급은 제자 목록에서 늘 이름이 맨 앞에 나오고 언제 어디를 가나 주님과 동행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면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베드로는 왜 A급제자가 되었는가? 비록 실수도 많고 약점도 많았지만 결국 그의 반석 같은 성품으로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수제자 소리를 들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살펴볼 요한은 왜 A급제자가 되었을까요? 우선 그의 애칭을 살펴보면 그가 왜 A급제자에 속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애칭은 바로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도 ‘사랑의 사도 요한’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실제로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혹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등의 표현이 나오면 이 사람은 바로 요한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누가 쓴 것입니까? 요한이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면서 유독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착각일까요? 아닙니다. 실제로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각별하게 많이 받았던 제자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은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 중에서 부모의 사랑을 똑같이 받았건만 어떤 자녀는 “내가 부모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자녀는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며 원망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처럼 늘 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은 사람인지 느끼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셔”라는 착각성 발언도 서슴지 않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저만 사랑하시겠습니까만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이런 착각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거룩한 착각’입니다. 오히려 많은 성도들이 이 ‘거룩한 착각’을 못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못 느끼며 살아서 더 큰 문제지요. 여러분도 저처럼 한번 ‘거룩한 착각’을 해보세요. 참 기분이 괜찮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그토록 많이 받은 것일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요한만 가지고 있던 독특한 성격 때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은 ‘애교덩어리’였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아주 애교 많은 막내아들’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들이 많은 집 부모는 모든 아들이 다 귀하고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들마다 느낌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큰아들은 사랑스럽다기보다 믿음직스럽고 기대를 많이 받는 아들인 반면 막내아들은 왠지 사랑스럽고 귀엽고 안쓰럽고 그렇지요? 제가 4형제 중 막내아들이라서 잘 압니다. 베드로가 마치 이 큰 아들 같은 느낌을 주는 수제자라고 한다면 요한은 막내아들 같은 느낌을 줍니다. 특히 요 13:23에 보면 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요한)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누웠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조금 있다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천성적으로 아주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을 정도로 애교를 떤 제자입니다. 요한이 예수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닭살 돋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애교 떠는데 어찌 귀여움을 안 받겠습니까? 성격도 차분하고 말도 잘 듣는데다가 애교까지 떠는데 당연히 사랑 받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도 주님께 사랑을 받으려면 이렇게 애교를 떨어야 합니다. “점잖은 체면에 내 어찌 애교를 떨리요?”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영 무뚝뚝하게 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하면 사랑 받기 어렵습니다. 점잖은 사람이건 나이 든 사람이건 주님 앞에서는 다 어린아이입니다. 주님 앞에서 아이처럼 애교도 떨고 어리광도 부리며 매달리는 사람이 사랑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 차리고, 격식 갖추고 점잖게 굴면 안 됩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 받을 짓을 해야 사랑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요한이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았는지 우리는 요한만 누린 특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A급제자로 늘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만 같은 A급제자인 베드로와 형 야고보도 못 누린 특권까지 누렸습니다. 요한은 특히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 처형을 받으실 때 유일하게 그 십자가 앞에서 자리를 지킨 제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상태에서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못내 걱정 되어서 대신 어머니를 부탁할 정도로 요한을 사랑하고 신뢰한 것입니다. 에베소에 가면 지금도 이 요한이 마리아를 돌본 유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신뢰를 끝까지 지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를 비롯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순교를 당했는데 이 요한만 끝까지 순교를 안 당하고 밧모섬에 유배되어 수명을 다 할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예언하신 내용이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후 양들을 부탁하시는데 이 때 베드로에게 결국 순교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요 21:18). 그런데 이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 큰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양을 치다가 순교 당한다 치고 그럼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말을 하며 가리킨 사람이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 궁금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시샘이 섞인 질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려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저 친구가 순교를 당하든 말든 너와 무슨 상관이냐? 잔말 말고 너는 나를 따라라.” 하는 뜻입니다. 이 정도로 요한은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제자로 인정받았고 때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도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

둘째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 것은 요한이 그가 기록한 성경을 통해 유난히도 사랑에 대해 많이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일 4:7~13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중략...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뿐만 아닙니다. 요 3:16은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다 외우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은 이와 같이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끊임없이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 다섯 권의 책에서 그는 80회 이상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애칭이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이 이처럼 사랑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할 줄 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나중에 자기 자녀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어려서부터 늘 남에게 사랑 받고 관심 받아본 사람이 나중에 사랑도 베풀 줄 알고 관심도 가져줄 줄 압니다. 물론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르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랑 못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도 할 줄 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주님의 사랑을 정말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쏟아졌던 주님의 그 크신 애정과 사랑을 늘 기억하며 그가 기록한 성경 곳곳에 주님의 사랑 그토록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대” 하고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느낀 바를 그야말로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정말 많이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남들을,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들에게 증거하고 내가 체험한 주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에서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 그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참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까지 말씀한 것입니다.




성격대로 믿는다

이제 요한의 성품과 특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성격을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할 테니 혹시 여러분 성격이 어디에 해당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혈질이란 쾌활하고 생기발랄한 성격으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며 불쾌함 등은 금방 잊어버리고 늘 인생을 즐기며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입니다. 물론 무질서하고 흥분을 잘 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할 일도 많이 합니다. 이런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유혹에 약하기 때문에 절제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매우 활동적입니다. 다혈질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혈질과는 달리 매우 조직적이고 한번 시도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고 마는 의지의 소유자입니다. 언제나 현실적인 면을 소중히 여기며 이성적인 부분보다 직감에 의해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도자적인 능력을 타고난 성격인데 비해 오만하고 화를 잘 내고 성급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 믿기가 참 힘듭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주에 살펴 본 베드로는 급하고 후회할 일을 많이 하면서 또 지도자 노릇도 잘 하는 것을 보니 이 다혈질 내지 담즙질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점액질은 늘 명랑하며 재미있는 일을 찾고 뛰어난 상상력과 유머로 다른 사람을 웃기곤 합니다. 느리고 태평한 성격이지만 책임감도 있고 시간계획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일을 잘 해냅니다. 하지만 늘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성격이 이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결단력도 약한 편입니다.

우울질은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감상적이며 예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납니다. 늘 심사숙고해서 행동하며 분석력이 뛰어나고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희생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우울질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 자칫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또 완전주의자인데다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나머지 걱정도 많고 결단력도 부족하며 너무 예민해서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예민남’ ‘예민녀’라고 부릅니다. 워낙 성격이 예민해서 대수롭지 않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상처를 잘 받기 때문에 이 예민남 예민녀를 대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꼭 이런 성격 가진 사람이 몇 명씩 있습니다. 또 이 우울질은 의외로 보복심이 강합니다. 이것이 우울질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우울질은 남에게 받은 모욕과 상처를 결코 잊지 않고 마음속에 쌓아둡니다. 물론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지만 간혹 죽을 때까지 증오심과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말은 안 해도 나를 평생 원수로 알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우울질은 그 특유의 성격 때문에 대범하게 큰일 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 중 이 우울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나 바울은 전형적인 우울질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대부분 전형적인 우울질입니다. 답답하면 늘 울어버려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된 것이고 늘 한탄하고 답답해하지만 나서서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우울질이 쓰임 받는 이유

그런데 이 우울질이 어떻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까요? 첫째로 이들은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성격입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지만 자기 맘대로 급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되는대로 일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남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잘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다혈질이나 점액질이 왕성하고 활발해서 하나님께 더 쓰임 받을 것 같지만 이 사람들은 남의 말 잘 안 듣습니다. 자기 멋대로 일부터 덜컥 저질러 놓고 나중에 후회합니다. 이렇게 성질 급한 사람보다 소심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께 더 쓰임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앞장서서 일하기보다 뒤에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희생적인 성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자기가 먼저 나서려고 한다면 큰일 아닙니까? 베드로는 늘 남들보다 자기가 먼저 말하고 먼저 행동해야 속이 편한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떨 때는 주님보다 더 앞서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울질은 절대 남들보다 먼저 나서지 않고 뒤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잘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나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다 사라지게 하시고 십자가 뒤에 감추어주세요.” 이런 사람들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요한은 늘 조심스럽고 남 앞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지요. 물론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요한의 성격이 남들에 비해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본 후에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에 있는 베드로보고 주님이라고 말해줍니다. 아주 조심스럽고 많이 생각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베드로의 리더십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남을 먼저 세워준 것이지요. 반면 베드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지요? 이런 요한의 조심스러운 성격과 남들을 앞에 세우는 성격이 그를 귀하게 쓰임 받게 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들은 기록의 귀재들입니다. 대개 훌륭한 저술가는 우울질이 많습니다. 다혈질이나 점액질은 받아 적는데 아주 약합니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해도 자기 맘대로 요약해서 간단하게 써버립니다. 수업시간에 필기할 때 졸고 있거나 딴 전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잘 필기할 테니 나는 나중에 그 사람 것 보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 필기 하더라도 몇 줄만 요약해서 써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다혈질이나 점액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울질은 완전주의자에다가 꼼꼼한 사람들이어서 그야말로 모든 말을 시시콜콜 받아 적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기할 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사말로부터 시작해서 여기서 물 한 모금 마셨다, 이 부분에서는 목소리가 커지고 큰 소리로 웃었다까지 다 씁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적게 하실 때 모세나 바울이 다혈질이나 점액질이었다면 모세오경이나 바울서신이 지금보다 몇 분의 일로 줄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나 모세, 바울이 다 우울질이라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열심히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는 남들보다 예수님과 더 많이 지내고 말씀도 제일 많이 듣고 기적도 제일 많이 봤는데 베드로전후서 합해봐야 8장(5장+3장)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얼마나 많이 기록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 요한 1,2,3서가 있고(7장),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엄청나게 많이,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라 무엇을 기록해서 남기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도 당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아주 예민하고 심사숙고하는 성격이라서 열 두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수명을 다하면서 많은 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 주님께서 베드로는 베드로 나름의 성격대로, 요한은 요한 나름의 성격대로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신 증거입니다.




우리를 성격대로 쓰시는 하나님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이 이런 우울질이라면 자연 아주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야 할 텐데 이런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나오는 것입니다. 막 3:17에 보면 주님께서 요한과 형 야고보에게 친히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는데 이는 우리말로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 형제에게 왜 이런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요? 아마도 눅 9:54에 나오는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엄청나게 흥분하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놈들을 멸망시키라고 명할까요?” 이렇게 흥분 잘 하는 형제를 보고 주님은 ‘우뢰의 아들’ 즉 우뢰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전형적인 우울질 요한이 왜 이렇게 성격에 맞지 않게 흥분한 것일까요? 제가 앞에서 우울질은 ‘보복심’이 강하다고 했지요? 한번 상처 받으면 평생 안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요?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막 10:35에서는 이 요한이 형 야고보와 더불어 주님께 하나는 주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다 제치고 우리 두 형제만 주님 옆에서 우의정 좌의정 하겠다고 청탁한 이 일은 요한의 이기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우울질의 가장 큰 단점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우울하고 예민하며 엄청나게 이기적이고 난데없이 화도 잘 내고 남에게 상처 잘 받고 그 상처를 마음속에 평생 간직하는 그런 사람을 도대체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 요한을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에 대해 대단히 좌절합니다. “나의 예민한 성격, 우울한 성격을 도대체 어디다 써 먹을까?” 자칫하면 참 남들을 어렵게 하는 성격입니다. 상처도 잘 받고 삐치기도 많이 삐칩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베드로 같은 다혈질이나 담즙질의 사람을 만나면 큰 일이 벌어집니다. 큰 충돌이 일어납니다. 또 자신에게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런 성격 가진 예민남 예민녀를 보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저런 성격 가진 사람을 뭐에다 쓴담? 하나님도 진저리 치고 도망가시겠구먼.”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요한을 보셨지 않습니까?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어떻게 되던가요? 이런 성격이 주님을 모르거나, 또 교회를 다니더라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남에게 상처도 많이 받고 갈등도 많이 일으키는 성격입니다만 이런 우울질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특유의 성격이 주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그의 장점들이 주님을 통해 살아나게 됩니다. 감성적이고 신중하고 완벽주의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이 쓰임 받습니다. 그의 가장 큰 단점인 이기주의와 가끔 불일 듯 일어나는 분노와 그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두는 버릇은 정화되고 장점이 부각되며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요한 같이 크게 쓰임 받게 됩니다. 베드로도 모세도 바울도 그 어떤 다른 사람도 감히 못할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90세까지 살다가 자연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90년 생애는 결코 평탄한 일생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주후 98년 경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온 후 약 2년 만에 죽었다고 합니다. 어디 장수하고 자연사 한 것이 편하기만 한 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90년의 생애를 살며 다른 제자들이 못한 큰일들을 감당하며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순교도 귀하고 주를 위해 죽는 것도 소중하지만 예수님을 위해 사는 일도 정말 귀한 일입니다. 요한이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성품과 성격이 주님을 만나게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 14:8에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귀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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