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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이 있는 삶 (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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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는 것이라”

양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면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명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생명이 있으니까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생명이라는 말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바로 영생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는 영생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생명 곧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영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음 몇 가지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랍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알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생(永生; eternal life)을 글자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이비 종교 가운데 영생교라는 것이 있다. 이 영생교는 그야말로 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 몸이 죽지 않는 비결]이라는 책에서 생명과일이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주 조희성이 지난 6월 19일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영생에 관한 그 모든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히 9:27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지요.

둘째, 사람이 죽어도 그 정신이나 영혼이 이 땅에 남아서 계속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 것이랍니다. 이렇게 답하는 부류들도 의외로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저 북한에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죽었지만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주체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은 세계를 움직이는 정신이시고 승리의 영원한 상징이십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수령영생력사라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들 김정일의 지도력을 지탱해 주기 위해 조작한 유훈통치의 정치적 술수일 뿐입니다.

셋째, 죽은 뒤에 천국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충분한 답은 아닙니다.

계 21:1-4를 보면 천국에서의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특히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물을 씻기시매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않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천국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떻습니까? 지옥에도 죽음은 없습니다.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면 지옥에 다시 죽음이 없다면 지옥에도 영생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 25: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지옥에서 죽음도 없이 영원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을 영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죽은 뒤에 다시 죽음이 없는 사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요 17:3이 이 물음에 답을 해 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영생이 단순히 영원히 사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삶 곧 질적인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생을 뜻하는 아주 다른 질적인 삶은 무엇이냐는 말씀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대중 연예 스타나 운동선수들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의 신상을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 관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스타들이 자기들의 신상을 줄줄 외우는 이 청소년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안다는 것은 상호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서로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오랜 세월 살아가면서 서로를 알아가게 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지 지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적 앎이요 체험적 앎을 말합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꿰뚫고 있습니다. 신학공부도 해서 하나님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도 많습니다. 이것만 보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마치 부부가 함께 살듯이 그분과 함께 더불어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생명이란, 영생이란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를 말합니다.

이런 삶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갔을 때 온전하게 실현될 것입니다. 지옥에는 물론 이런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죽음이 없더라도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국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이 땅에서도 예수 믿으면서 이미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요 5:2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그래서 주님을 알아가고 동행하는 삶을 시작하면 이미 그 안에 영생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저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벌써 여기서도 영생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있는 삶은 어떠한가?

이 세상에는 생명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러면 생명 곧 영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삶이 어떻게 다를까요? 생명이 있는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1. 하나님과의 화해

생명 곧 영생이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우선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습니다.

롬 5: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나면 하나님과의 화평 즉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황수관 박사의 건강강좌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워낙 재미있게 강의를 하셔서 웃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자기 몸의 건강을 체크하는 법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자기 몸 전체 그러니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으면 건강한 것이고, 여기 저기 느껴지면 거기가 문제가 있는 것이랍니다.

발끝을 가만히 느껴보면 무좀이 있는 사람은 발끝이 가렵게 느껴집니다. 동상이 있는 분은 뭔가가 불편합니다. 아랫배를 느껴보면 궤양이나 염증이나 암이 있는 분들은 뭔가 묵직하고 시큰거리고 어쨌든 설명하기 힘들지만 불편합니다. 머리도 뒷골이 당기고 평상시도 어지럽고 하면 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심령 전체를 느껴보면 압니다. 거짓말 한 일이 있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양심이 꺼림직 합니다. 주일 예배드리지 않고 범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무척 불편합니다. 누구와 대판 싸우고 저주를 퍼붓고 심지어 멱살잡이까지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좌불안석입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답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평이 깨진 사람입니다. 생명을 영생을 풍성히 누리지 못합니다. 이런 죄를 회개해야 화평이 회복됩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온전히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의 실천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나아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요 1서 3:1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형제를 죽이는 것과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12절을 보면 가인의 경우를 예를 들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했기 때문에 결국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은 곧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행위보다 그 이전 마음의 문제에 주목하셨습니다. 살인보다 살인 동기에 더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마 5:22를 보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우리 안의 생명 곧 영생이 위축되고, 나아가 구체적으로 형제를 해친다면 그 영생이 점점 소멸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있는 사람들 곧 영생이 있는 사람들은 왜 형제를 사랑하게 될까요? 요 1서 3:16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서 또 한번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요단 골짜기에 두개의 큰 호수 그들은 바다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갈릴리 바다와 아래에 있는 사해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저 헬몬산에서 계속해서 물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단강으로 계속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해는 요단강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지만 어디에도 물을 주지 않습니다. 사해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데 물은 점점 줄어만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홍해에서 물을 끌어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처럼 주면 받고 그래서 계속 풍성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해바다처럼 주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기고 오히려 궁핍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습니다. 물 속에 풍성한 고기 떼, 하늘에 새들, 아름다운 경치, 활기넘치는 사람들의 놀이... 그야말로 풍성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사해 바다는 죽은 바다였습니다. 물고기는 한 마디로 살지 못하고, 새들도 없고, 삭막한 경치...

사랑하는 여러분! 영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베풉니다. 그 사람의 생명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3. 씨앗의 파종

생명이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영생의 열매를 얻기 위해 씨앗을 뿌립니다.

갈 6: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미 생명을 가진 영생이 있는 사람들은 성령으로부터 또 다른 영생을 거두기 위해 성령으로 씨앗을 심는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체들을 보면 번식에 최우선적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식물들은 후세를 위해 씨앗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널리 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때론 맛있는 과일 속에 씨앗을 담아 동물들의 도움으로 씨앗을 널리 퍼뜨립니다. 때론 바람결에 깃털을 달아 씨앗을 퍼뜨립니다.

동물들도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연어는 목숨을 걸고 태어난 고향 땅의 물 냄새를 맡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때론 경쟁하며 수컷끼리 죽기로 싸웁니다. 암컷을 차지하고 유전자를 퍼뜨립니다.

모든 생명체가 다 재생산에 몰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생산을 활발하게 하는 생명체가 건강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생산에 몰두해야 합니다. 재생산을 활발하게 할 때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찬송 260장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열매 차차 익어 곡식 거두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이 곡을 작사한 분은 미국의 노울스 쇼(Rev. Knowles Shaw)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의 아버지는 믿음이 좋은 농부였습니다. 이 분에 세상 떠날 때 아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유언을 하고 가장 아끼던 바이올린을 주었습니다.
이 바이올린을 열심히 연습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유명해 지고 또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늘 아버지가 마음속에 던져놓은 그 유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서 연주를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유명한 설교자가 되어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아버지가 뿌려놓은 그 씨앗 때문에 결국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씨를 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가사를 썼습니다.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며 영생의 열매를 거두며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생명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영생은 이미 우리에게 시작되어 저 천국에 가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가 더 잘 믿으면 그 생명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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