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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했으나 실패한 자 (창 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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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문 :

1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중 헷 족속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 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하니라

(서론)

  창세기 36장은 창세기의 다른 장에 비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장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가 외울 필요도 없고, 큰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4천년 전에 살았던 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가진 한 왕국(에돔)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들은 왕들이 되었고 족장들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와 쾌락을 누렸고, 정치권력도 소유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사람, 통이 큰 사람, 사귀고 싶은 사람, 현대인의 우상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부분에서는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에도 성공하지 못한 아주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세에서 크게 성공했으나 지옥에 간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에돔’이라는 왕국을 이루어 번창을 했습니다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6장을 통해서 ‘가나안 밖을 벗어나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에서와 그 후손들의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은 가시적인 성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적인 성공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성공하는 것은 불가시적인 성공입니다마는 이것은 영원한 성공이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복된 성공인 줄로 믿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도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삶일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과 하나님께 대하여 성공하는 삶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에서는 언뜻 보면 네 가지 영역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존재입니다.

1. 세상적으로 번창한 가정도 하나님께 축복받은 가정과 비교할 수 없다.

첫째, 그는 가정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번창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축복받은 가정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에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때부터 계속 되어온 경고를 에서가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경고는 “너희들은 가나안 족속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아내를 취할 때는 반드시 본토 친척 아비 집에 가서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6장 2절을 보겠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3절에는 심지어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싫어한 여인들 중에서만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이렇듯 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육적인 사람이요, 영적인 분별력은 조금도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에서의 아내들 가운데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백성이라 해서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은 당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에서의 아내들은 아들 다섯을 낳았습니다. 딸들도 많지만 딸들의 이름은 열거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서는 가정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강하고 유능하고 다복하고 자녀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기 힘으로 가정을 세우고 일으켜 번창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자신의 나이 65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25년이 지난 후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들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겨우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이삭도 아내 리브가와 결혼을 한 후 2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이 쌍둥이는 어땠습니까? 복중에서부터 싸운 이 아들들은 후에 평생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또 야곱의 경우를 봅시다. 네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덜 사랑하는 레아는 아이를 얼마나 잘 낳습니까?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가까스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꺾으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반면, 에서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매력있는 가정입니다. 아내들은 아름답고, 자녀들도 출세를 해서 족장이 되고 왕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으로 성공해 보이는 명문가가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정의 일원이 되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에서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영원하고 중요한 일에서는 실패한 자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2. 물질의 성공은 영적인 성공과 비교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에서는 물질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히 실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재물을 많이 얻었습니다. 후에 에서는 동생 야곱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벗어나 세일산으로 갑니다. 세일산은 해발 1,500m 이상의 가나안 땅 남부, 시내 광야 동쪽에 있는 높은 땅입니다. 이곳은 에시온 게벨(Ezion-Geber, 현재 아카바)이라는 항구를 끼고 있고 왕의 대로(大路)가 있어서 통행료만 받아도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서가 야곱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36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세일산)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 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에서는 너무 부자가 되어서 야곱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일산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듭 말씀하신 것, “아브라함의 후손은 가나안 땅을 영영히 차지할 것이라, 가나안 땅에 거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물질을 ‘어디에 가면 더 번창시키고 잘 지킬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어디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에서가 물질 문제에 있어서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또 물질에 탐욕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분노를 두려워해서 물질을 주고 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 33장 9절에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도 야곱이 강권하니까 나중에 할 수 없이 받은 것입니다. 에서는 물질도 많고, 너그럽고, 인색하지도 않고, 탐욕스럽지도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하지만 에서의 영적인 상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같은 실패자가 누가복음 12장에도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창고를 많이 지었으나 그 날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농사꾼도 물질에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실패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부자’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질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성공하는 것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비교할 수 없다.

세 번째로 에서는 정치권력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의 체험이 없습니다. 알지도 못합니다.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꿈과 같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자들은 여러 가지 힘 중에 정치적인 힘을 좋아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대통령 4년 임기를 마친 후에 사형을 시키겠다고 해도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남자 아이들만 봐도 골목대장이 되기 위해서 늘 싸웁니다. 이렇듯 아이나 어른이나 정치적인 싸움의 규모만 달라지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여전합니다. 이처럼 에서도 큰 정치권력을 소유했습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그의 아들들은 ‘족장’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31절 이하에 보면 그의 아들들은 ‘왕’이라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더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울 왕이 있기 훨씬 이전에 에돔은 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에돔에 왕이 있었던 때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때였습니다. 에서의 자손들은 세일산에서 왕 노릇하면서 야곱의 후손들을 보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냐? 그런데 너희를 택한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너희 하나님은 너희를 노예로 만드는 하나님이냐?”

  세상은 이처럼 잠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패배하는 듯 합니다. 시편 2편 2절과 3절을 봅시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오늘날 전 세계가 기독교를 향해 얼마나 대적하고 있습니까? 온갖 역사에 대한 오해와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권력으로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
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은 그저 웃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세속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영원한 패배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해도 이 권력 위에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정치권력 위에 더 높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 21절에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은 왕을 세우는 것도 폐하는 것도 잠깐입니다. 잠깐 숨 한 번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에서의 왕국인 에돔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를 통해 오바댜서에 대한 공부를 얼마 전에 마쳤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돔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바벨론이 침략해서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에 바벨론과 한편이 되어야곱의 후손들을 침략하고 핍박합니다. 또 함께 제비 뽑아 그 땅을 빼앗고 도망치는 야곱의 후손들을 사거리에서 막아 죽이는 자에게 내어 줍니다. 이런 포악을 행하는 에돔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멸망하되 전멸하여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야곱은 내가 잠시 징계하여도 회복해서 왕국을 이룰 것이다!” 이 내용이 오바댜서입니다. 정치적인 힘도 좋지만 하나님이 위에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더 귀한 줄 믿습니다.

4. 세상의 일시적인 명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비교할 수 없다.

네 번째로 에서는 큰 명예를 얻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일시적인 명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족장이 되고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그 왕족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이때 에서의 후손들을 ‘이두메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이 로마의 정치권력과 결탁을 해서 이스라엘의 왕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롯 왕가가 바로 에서의 후손입니다. 헤롯 대왕이 동방박사가 와서 유대인의 왕이 새로 나서 경배하겠다고 하자 베들레헴 근처에 두 살 이하의 어린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끊으려고 하는 사단의 종이 된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왕은 침례 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 자기 딸에게 주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왕권을 누리는 에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AD 70년에 로마 장군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Titus Andronicus)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에돔도 멸망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강대국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독일에 ‘최후로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최후로 웃는 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바댜서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야곱의 후손은 불이 되고, 요셉의 후손은 불꽃이 되고, 에서의 후손은 초개(지푸라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습니다. 죽은 후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 종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또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를 떠나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가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전자의 말을 듣게 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후자의 말을 듣는 사람은 인생에 성공 했을지라도 영원한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최후로 웃는 자의 인생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털어 5년 동안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후에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진수식을 합니다. 드디어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 속에 이 배가 출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을 흔들며 출항한 배가 점점 가라앉더니 완전히 침몰해 버렸습니다. 엉터리 배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진수식에 침몰해 버리는 배의 신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제 영혼을 지옥에서 잃어버리면 온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성공, 세상의 성공보다 영원한 성공, 하나님께 성공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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