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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6)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마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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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행복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었고 또 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들은 평생 “하님은 사랑이시라” “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중얼거리며 살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주적인 축복과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야말로 평생 그렇게 중얼거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는 하나님과 아내를 원망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무정하고 냉정하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불행한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진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살던 가나안의 이방 여자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더 심한 멸시를 받으며 살던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이방 여자였습니다. 가나안을 베니게라고도 하는데 그 여자는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 족속인 수리아 베니게 즉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가나안의 이방 여자였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사는 모슬렘 여자와 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해 주셨습니다. 귀신 들렸던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사랑이었고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평생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중얼거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개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이었고 신약 시대에도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와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두로에 관한 경고라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찌어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찌어다”(사23:1,4). “인자야 너는 낯을 시돈으로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라 내가 그에게 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 엎드러질 것이라”(겔28:21,23). 역사적으로 보면 두로와 시돈은 앗수르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바벨론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페루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희랍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로마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그들이 범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날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거기서 나가사” 라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은 “거기를 떠나” 라고 기록했습니다. 저는 “거기를 떠나사” 라는 기록을 읽으면서 혼자서 “어쩌면? 어쩌면?” 이라고 중얼거리며 잠시 감탄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신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멀고 먼 변방인 두로와 시돈을 가신 일은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이 대부분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행해졌지 두로아 시돈에서 행해진 일은 이번 밖에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복음사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버림 받은 땅이었고 저주 받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저주하신 땅으로 가셨을까?” 라고 저는 잠시 감탄과 놀라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래 저주 받은 땅인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니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모순되는 사랑이었고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숨어 있는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려고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포악한 이교도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려고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주와 멸시와 절망과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저주 받은 땅 이방의 땅으로 향하는 사랑의 발길을 정죄하는 소위 의인들의 정죄 소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인 유스티니안 벨츠가 저주의 땅 남미의 서리남을 향해 가려고 했을 때 독일 교회의 의인들은 이렇게 그를 비난했습니다. “유스티니안 형제여, 그대만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선교를 시작하겠다는 말이요? 도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요? 일본으로 갈 것이요? 이미 30년전에 일본은 기독교를 뿌리 뽑아 버렸고 지금은 기독교 상인조차 입국을 금하고 있지 않소. 중국으로 가겠다는 말이요? 최근에 중국에서 기독교인들과 설교자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모르시오? 아프리카에 가겠다는 말이요? 그렇다면 화란, 영국, 포르투갈, 불란서 보다 더 튼튼한 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배를 가지고 있지 않소? 그러면 미국으로 가겠다는 말이요? 그곳은 너무 멀고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야만스럽지 않소? 유스티니안 형제여, 제발 그 꿈을 버리시오. 그런 꿈을 꾸다가는 사탄의 꼬임에 빠질 것이요. 먼데 갈 생각말고 당신의 이웃이나 도울 생각을 하시오.” 그러나 유스티니안 벨츠는 1666년 독일을 떠나 남미 서리남으로 가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다가 1668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각성운동인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고 현대선교의 모체인 모라비안 선교 운동을 태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120여년 후인 1786년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케리가 (25살이었을 때) 미신과 저주의 땅 인도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영국교회는 그를 가리켜 “비참한 미치광이”라고 불렀습니다. You are a miserable enthusiast” 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그를 향해 “자리에 주저 앉으라” 고 명령했습니다. 케리의 아버지는 아들을 가리켜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며 반대를 했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도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캐리는 1793년 6월 13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국을 떠나 저주의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것이 현대선교의 출발 점이 되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의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인디언들 속에 들어가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했을 때 어느 백인 목사는 그를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아마 토마스와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조선 땅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영국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신과 무지와 저주의 땅인 조선에 가는 것을 반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가신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주와 멸시와 절망과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인종적 차별과 멸시, 문화적 차별과 멸시, 종교적 차별과 멸시를 당했을 뿐 아니라 가정적인 불행과 비극과 슬픔을 당하며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미친 생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저주 받은 불행한 개 한 마리에 불과 했습니다. 옛날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이 자기를 가리켜 “죽은 개”라고 불렀는데(삼하9:8)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도 자기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고 예수님도 그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저주 받은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일부러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모순되고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죽은 개 같은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마 오늘날 어느 미국 선교사가 이라크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주의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나도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기독교 적대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간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적대세력의 중심부인 평양으로 갈 수는 없을까?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 아주 가 버릴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반대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저주의 땅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저를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비판도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좀 지나치게 가나안 여자를 무시한 것 같습니다. 너무 무례한 말씀을 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가나안 여자에게 하신 세 마디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가나안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가나안 여자를 인종 차별하며 무시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아니하며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무례한 말씀들을 묵상하며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를 한 10분 동안 들은 일이 있는데 저는 은혜를 받으며 그 설교에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힌트 때문에 오늘 아침 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설교의 내용과 방향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살리는 길도, 가나안의 개를 살리는 길도 그들의 자존심과 체면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병자를 수술을 하기 위해서, 병자를 마취 시켜 죽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마취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 의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직 안 죽었네?”

  수 많은 사람들이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곤 합니다. 박종순 목사님이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자존심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에 붙잡혀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주셨습니다. 그를 개라고 부르면서까지 그의 자존심과 체면을 무너뜨려주셨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주님의 손에서 여지없이 자신을 낮추고 부인하고 죽이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나는 개 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치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여지없이 무시를 당하고 낮아지고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교만을 여지없이 내려 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교만하고 건방지고 자만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알량한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내려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이방의 개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도 올랐습니다. 우리 교회에 새로 열심히 나오시는 새 신자 한 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줄도 모르는 초보입니다. 가끔은 종교적으로 잡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기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고 아직도 가끔 미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린다고 하고도 아직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욕되게 한 것을 용서를 빌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를 않습니다. 뻔히 아는 것들도 핑계로 덮어버리고 마음을 위장하며 살아온 죄인이 요즈음 많은 변화를 느끼면서 주님께 간절히 간구합니다. 담배도 아주 끊었습니다. 가끔은 술도 먹지만 이제는 끊기로 했습니다.” 아주 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같지도 않은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그저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그 여자가 한 것은 나와서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복음서나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에 들어 누어서는 소리를 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가 부르짖은 세 마디는 단순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어디 한 번 저와 함께 소리를 질러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가나안 개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눅19:9).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 로마인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느니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마8:10,13). 분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21:3,4절을 읽습니다.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방의 개들이 살던 저주의 땅 두로에 사도 바울의 일행을 맞은 주님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물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베니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지역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는 가나안의 개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가 수가성의 개였던 것처럼 두로와 시돈 지역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전도자가 가나안의 개였습니다. 요사이 개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낫다고 들 하지만, 이방 개들의 인권을 인정하시고 신장하시고 축복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첫째 저주의 땅으로 가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둘째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 없이 무너뜨려 주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셋째 개인과 가정과 지역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구원의 사랑이십니다. 박종순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자존심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가나안의 개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소리를 지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1절을 다 함께 부르시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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