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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열려면 (창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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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창세기 2: 4 ~ 9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서신서의 말씀: 베드로전서 5:7 ~ 11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마태 복음서 6:31 ~ 34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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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 첫째 주일인데, 교회절기로 따지면 창조절 첫째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절기를 준수하면서, 절기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실생활과 연계해서 살려고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창조절기는 12월 첫 주일 대림절이 시작되기 전인 11월 말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석 달 동안이 창조절기입니다.

창조주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절기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강단을 덮은 색깔도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습니다. 창조절의 상징은 초록색입니다.

12월부터 대림절이 시작되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절기입니다. 그분이 탄생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시다가 하나님께로 승천하는 때까지, 그러니까 12월 초부터 5월 말경까지가 성자의 계절입니다. 그 속에는 수난절, 부활절, 주현절 등 여러 가지 절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곧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6월 초부터 성령의 계절이 시작됩니다. 성령의 절기는 8월 말, 그러니까 지난 주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 성령의 역사를 우리 하나님의 역사로 믿고, 삼위 하나님이 돌아가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절기마다 맛보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창조의 은총 가운데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저께쯤에 어느 일간지 하나를 읽는 중에 비판조의 기사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느 대학의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데, 데모 피켓 가운데 하나를 딱 클로즈업 시켜놓고 기사를 썼습니다. 피켓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이것만 읽어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구절입니다. 어떻게 오늘만을 위해서 오늘을 사느냐,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살자, 그런 뜻이니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 가치 판단이 달라집니다. 그 문구 뒤에 괄호가 있는데, 그 안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정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을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창작해낸 것은 아닐 겁니다. 이런 말은 여러 사람들이 했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왜 하필 괄호 안에, 제 생각입니다만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남쪽의 발전과 북쪽의 실상이 드러난 이 21세기에 김정일의 이름을 써넣는 구태의연한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제가 과거에 평양을 방문했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평양이나 서울이나 세계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관심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내일이 자신들에게 보장되느냐는 것입니다. 담보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확실한 담보, 이것이 이념이나 체제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 집단들의 관심이었습니다.

평양을 갔더니 이런 저의 판단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고난의 행진!” 사실 어려웠지요. 먹을 것도 없고 홍수는 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퍼 주어도 아직도 배고프다고 하는 북쪽의 그 현장에서 고난의 행진이라는 말을 딱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왜 고난의 행진을 하자고 하는지. 그 말을 서울 종로바닥에 아니면 광화문 바닥에 붙여본들 누가 그 말에 공감을 하겠습니까?

고난의 행진이라는 글 밑에는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지금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행진하는 오늘이지만, 내일에는 이분이 살아계셔서 우리 역사를 이끌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념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 이후의 영원한 그분에게 고백하는 그런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하! 여기도 미래가 필요하구나.’ 싶었습니다.

시골에 가서 차를 타고 논길을 가는데, 거기에 깜짝 놀랄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쌀이 공산주의입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러나 북과 완전히 다른 우리 상황에서 내일에 관한 슬로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판단은 각자 할 수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오늘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에 담긴, 오늘이 담보해줄 내일이 우리의 관심입니다. 오늘 주일이 지나면, 내일부터 시작되는 미래는 우리한테 보장되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있습니까? 그 미래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서 말씀인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동산에 두시고는 나무 두 그루를 심어 놓으셨는데, 한 그루는 하나님 것, 다른 한 그루는 사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것의 이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선악과이고, 사람에게 준 것의 이름은 생명나무였습니다. 두 나무는 조화롭게 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겼냐 하면, 사람에게 준 생명나무는 오늘의 생명만이 아니라 오고 올 자손들이 먹어야 할 생명 양식이었습니다. 이어질 미래까지 담보하는 나무입니다. 인간이 이 나무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실낙원의 사건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이 지금까지 지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실낙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낙원에 사는 인간들은 두 가지 운명에 처합니다. 하나는 죄를 지은 것 때문에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 값을 치르고 나면 생명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죄 값을 치루는 곳, 그곳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죄 값을 치루는 시간, 그게 오늘입니다. 내일은 뭡니까? 죄 값을 치른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영역입니다. 그걸 성서에서는 미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가 치러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인간이 치러야 할 모든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고서 십자가로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부활을,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오늘이라는 십자가, 거기로 오면 내일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내일은 여러분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창조할 수 있는 조각품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릴 수 있는 그림도 아닙니다. 고안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절대로 손을 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는 하나님만이 관여하시는 것이기에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는 나이라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바비 니치라는 사람이 세계 최초로 통나무를 타고 폭포에 떨어져서 캐나다 국경까지 떠내려 오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통나무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떨어지기 전에,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고서 폭포로 떨어졌는데, 다친 데 하나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일에 성공한 뒤에 이 사람이 명성도 얻고 기고만장한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로 산책을 나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오렌지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팖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말았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위험천만한 나이아가라 폭포에 떨어질 때에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노력해서 무사했는데, 오렌지 껍질 하나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서 이 사람이 고백했습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이 늘 같이 계시면 모든 것이 보장되지만, 그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으면 나는 늘 문제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돈을 주고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습니다. 온돌방도 잘 꾸밀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편안한 잠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책은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서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은 돈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만 있으며 약방에서 필요한 약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을 산다고 건강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우리에게는 기적 같은 것, 단지 선물로 얻을 수만 있는 것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성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흙으로 빚어서 만든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그냥 육신만이 아니라, 지성도 있고 생명도 있고 고독도 있고 신앙도 있고 영도 있는 그런 인간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없앨 수도 없고 창조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그것을 창세기는 하나님의 숨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은 오늘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미래를 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흙으로 만들었지만, 70~80밖에 살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걸 가리켜서 우리는 미래를 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가 진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오면 어제까지 범했던 모든 죄악을 용서받고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류가 미래를 말할 때 그것을 십자가에 비유하는 것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일은 고달플 것이다, 고달픈 십자가일 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일은 항상 즐거우리라고 기대합니다. 내일은 아름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하는 미래는 다릅니다.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보고픈 사람은 십자가에 오라고 합니다. 죽음 속으로 오라고 합니다. 피 흘리는 데로 오라고 합니다. 그 속에서 하늘나라가 움튼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현장을 외면한 기쁨은 감언이설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타고 태어난 인간이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현실을 피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오면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속에 부활의 주인, 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내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일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시간과 공간, 그분이 주관하시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가운데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내일입니다. 나중에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마시게 될 때, 하나님의 미래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마실 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숨이 불길처럼 뜨겁게 느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육십이 넘은 노부부에 관한 이야기 하나 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일본에 황혼이혼이 꽤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노부부가 육십이 넘어 이혼한 이유는 성격 차이입니다. 변호사를 만나서 이혼서류에 서로 서명을 한 뒤, 마지막 식사나 하고 헤어지기로 하고 식당에를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은 구운 통닭을 주문했습니다.

닭이 나오자 할아버지가 닭 날개 죽지를 떼어서 아내 그릇에 놓아주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대뜸 하는 말이 “삼십 년을 같이 살면서 내 의견이나 취향은 신경도 쓰지 않더니, 오늘까지도 당신 주고 싶은 데로 막 떼어주는 거요.” 하면서 화를 벌컥 냈습니다. 할아버지는 “날개가 제일 맛있으니까 준거요.”하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닭다리를 좋아했습니다. 할머니가 화가 나는 건 매사에 할아버지 생각대로 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가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묻지도 않고 닭 날개를 준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핸드폰에 남편의 전화번호가 찍히자 받지 않았습니다. 화가 풀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전화가 왔지만 안 받았습니다. 밤에도 전화가 와도 안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할머니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혼을 했지만 전화라도 받고 위로를 해줄 걸 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받지를 않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까, 그 할아버지 친구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서 할아버지 있던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심리적인 충격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손에는 핸드폰이 쥐여 있었습니다. 핸드폰에는 보내지 못한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조금만 참았더라면 이런 미래를 맞닥뜨릴 필요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할머니는 이런 미래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갈등 속에 지내면서도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면 하는 후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되어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이 우리가 미래를 먹고 사는 길입니다. 이 길이 오늘 여러분의 생명의 길, 미래의 길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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