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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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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조병우 목사

인생은 세 가지 중요한 만남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결정되어 집니다. 가장 먼저는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생명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생이 가장 먼저 만나는 대상이 부모입니다 이 만남은 내가 선택한 만남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진 만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자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분유 선전에 나오는 모델같은 아이를 키우고 싶을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은 부부의 만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인생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처복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게 배우자는 정말 중요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한 가정을 이루고 뿐만 아니라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녀를 주시고 기업을 주시고 삶의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부부관계는 인생의 삶에서 특별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만남을 통해서 이 땅 위에 생명역사를 보존하십니다.

세 번째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영원한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인생은 영적인 세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인생은 이 만남을 통해서 이생과 내생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생이 아무리 좋은 만남을 가졌다고 해도 이 만남이 없다면 그는 아직 만남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만남은 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청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부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많은 돈을 가진 것을 보면 그는 부모를 잘 만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장 쉽게 가장 빨리 부자가 되는 비결은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나서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관원들이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청년이었던 그가 관원이라고 한 것을 보면 권세가 많은 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인맥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고등고시나 특별히 관직을 위한 전형제도들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맥을 통해서 중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청년이 관원인 것은 그야말로 인맥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은 부자 부모를 만난 사람이었고 자라나면서 좋은 인맥으로 일찍 출세를 한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공허하고 외로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좋은 부모 만나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돈 걱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삭게오가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주님을 보고저 했던 것은 돈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에게 속는다는 말은 근본적이 아닌 것을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픈 사람이 진통제를 먹으면 잠깐은 나은 것처럼 보이지마는 병에 대한 아픔은 잠시 없어지지마는 병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부모 만나고 좋은 배우자 만나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내게 가장 소중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아내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지마는 그렇다고 아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은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만족이 없고 사람의 눈은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만족이 없고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만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갈급함과 그리움이 인생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 어떤 사회이든지 종교가 없는 민족이나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인간의 본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영생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청년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윤리적 고상함이 영적인 문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청년은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윤리적으로 고상하다고 그것이 영적 문제를 극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들을 보면 대개 한 때는 부모의 속을 썩이고 다른 사람에게 실망스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 철이 들 것인가 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납니다. 어릴 때부터 온전한 모습으로 자라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번도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기대를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실함과 신앙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 가운데는 그 사람의 의지가 신앙을 대신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성실히 살고 열심히 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이제 하나의 종교인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젊은 청년은 대낮에 길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청년은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여기에 영생이라는 말은 아이오니온이라는 단어와 조에라는 두 가지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 살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지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구원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청년에게서 세 가지 문제를 점검하셨습니다. 첫째는 청년이 예수님을 향해서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했을 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씀과 둘째는 네가 계명을 지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는데 너희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선하면 구원을 얻는다든가 아니면 내가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면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나이다 고 했을 때 이미 너의 마음 속에 영생이 있구나 고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신앙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에는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생에 관한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문제를 점검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에 대한 요구와 계명을 지키는 일은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에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청년이 종교인의 경계를 넘어서서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제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위치에 섰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청년이 영생의 문턱에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평생을 종교인으로 살다가 끝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종교인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청년에게 너에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구원에 대한 관심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착실하게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턱에서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청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넘어야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바로 그의 소유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에 족쇄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재산을 팔고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재산을 내어놓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 모든 재물을 다 내어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브라함에게는 100살에 얻은 아들을 내어놓으라고 했고 모세에게는 애굽의 권세를 내어놓도록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내어 놓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려놓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의 책상을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에서 그가 세상에서 자랑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의 특권에 대해서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라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와쯔라는 화가가 이 사람의 떠나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얼굴은 조금 보일 정도로 축 쳐지고 푹 수그려진 고개에 얼굴은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무 소중한 것을 잃었어 내가 참으로 가져야 할 것을 놓쳤는데 이것을 놓치면 내 생애가 영원히 고통스러울텐데 라는 표정으로 주님을 떠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사람을 보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요소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그에게 복이 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사람들도 보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는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떠나간 사람들을 보면 결국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로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결국 부자 청년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요소를 포기하지 못함으로 주님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가 되려면 같은 것으로 기뻐해야 하고 같은 것으로 슬퍼해야 합니다. 기뻐하는 것이 다르고 슬퍼하는 것이 다르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려면 주님과 기뻐하는 것이 같아야 하고 주님과 슬퍼하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문제까지는 주님과 동일한 기쁨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눔에 있어서 그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도, 아간도, 그들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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