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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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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9장은 전반부로서 심판과 정죄의 메시지라면 40-66장까지 후반부는 회복과 구원의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후반부의 첫 장으로 사40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말하면서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어려운 때를 벗어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내일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존즈 홉킨즈 대학의 심리학자인 <컬트 리쳐> 박사는
두 마리의 들쥐를 이용해 다소 잔혹한 감이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쥐를 따뜻한 물이 가득 찬 탱크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쥐는 살기 위하여 헤엄을 계속 쳤는데 무려 60시간이나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진맥진하여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리쳐는 두 번째 실험쥐는 좀 다른 방법으로 실험했습니다.
몰 속에 떨어뜨리기 전에 그는 손으로 쥐를 꽉 잡았습니다.
그러자 쥐는 버둥거리기 시작했고
그는 쥐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조용해질 때까지 손에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그 쥐를 물탱크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쥐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헤엄칠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노력을 포기한 채 밑바닥으로 가라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쥐가 그렇게 일찍 살기를 포기했던 것은
그 쥐가 이미 마음속에 절망과 무기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체스터 의과대학의 심리학교수인 <로버트 애더>는
모든 병에 실제로 감정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병이란? 단순히 세균이나 상처로만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고 나면 암으로 사망하는 것보다
심리적 요인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바벨론에 붙들려 올 때는 그래도 곧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희망 속에 억압과 고통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10년 20년 30년 한 세대가 지나가고 <2>
70년이 거의 되어갈 무렵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동화되어 가고 이제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긍지도 상실하고
모든 희망을 포기한 상태에 빠져집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자기들이 자유함을 얻어서
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내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삶이 너무나 허망해 보이는 것입니다.

혹여나 여러 성도님들중에 이런 상황 속에 있는 분들 계십니까?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계신분 계십니까?
예수 믿고 교회는 출석하지만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그 마음 속에 이미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에 한번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40장 말씀을 분해해 보면
1) 1-11절까지는
구원받을 백성을 향해 오시는 하나님의 강림을 서술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7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지만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면
회복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임할 줄 믿습니다.
2) 12-17절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말씀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물을 헤아리며
누가 손뼘으로 하늘을 잴 수 있느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15절에 열방을 통의 한 방울 물 같이, 저울의 적은 티끌같이 여기시는 분으로
28절 말씀같이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
즉 수가 우리하고 차원이 다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3) 18-26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상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2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
[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그러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우리하고 차원이 다르신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크고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가족 여러분 !
삶이 어렵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고, 절망하는 내 마음을 보지 마시고
열방을 한 통의 물과 같이 여기시는 크고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도토리라고 합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를 보면 사족을 못씁니다.
그런데 멧돼지는 돼지가문 출신이라서 그런지 머리가 아주 나쁩니다.
도토리를 먹다가 도토리가 없어지면,
도토리가 땅에서 나는 줄 알고 자꾸 땅을 파헤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멧돼지같은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야! 이 어리석은 돼지야 땅만 판다고 도토리가 나오니
도토리는 위에서 떨어지는 거야. ]
멧돼지 같은 교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의 어려움 만나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늘을 바라볼 생각을 못하고
오직 땅만 바라보고, 아니면 다른 데 희망을 걸면서 신세 한탄하는 분들
이제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힘들수록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 백성들이 낙심하며 절망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몰라서 그렇습니다.
호4:6절에도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모르기 때문에 망한다고 합니다.

당시 바벨론 포로에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27절에 보니
[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
우리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일들을 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가 생겨 너무 너무 답답한데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그것도 기도의 응답이 없어 너무 너무 지칠 정도가 되니
불평 어린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해 <4>
하나님이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인 너희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조선일보에 보면 <광수생각>이라는 만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환자가 죽을상이 되어서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묻습니다. "어떤 증상 때문에 오셨습니까?"
"선생님, 제가 요즘 증상이 심각합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찔러도 아프고, 팔과 다리를 찔러봐도 아프고,
온 몸이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하면 무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은 아닐까요?"
의사가 심각하게 환자를 검진을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음.....심각하군요. 선생님은 손가락이 부러지신 것입니다."

원인은 머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팔에도, 다리에도 이상은 없었습니다.
원인은 부러진 손가락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벽에 막혀 있을 때
"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 왜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습니까?
이 고난스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합니까? "
그 원인 환경에 있고 하나님께 있는 것 같이 불평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환경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지 못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는 내게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의 사정과 원통함을
외면하거나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럼 어떻하면 이런 영혼의 사막에서 우리가 헤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리차드 포스트>의 '기도' 라는 책에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45:15절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다 ] 고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의 긴 절망적인 상태에서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 스스로 숨어 계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 으로 비춰집니다.
이런 표현들은 예수님에게도 있습니다. 마27:46절에 예수님 십자가 상에서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것은 이전에 다윗의 기도였지요 <5>
시22:1절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뿐만 아니라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 시13:1절처럼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탄식합니다.
이렇게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도 아무 응답이 없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지 버트릭>의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천국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
<리차드 포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사하라 사막과 같이 메마르게 되면
신학적인 지식들은 우리에게 거의 도움이 못된다 ]
이쯤되면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조차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붙들고 격려를 받아야 할 사실은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신앙의 인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가뭄을 당한 신앙의 선조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리차드 포스트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 나는 하나님이 왜 자신을 숨기시고 광야와 같은 곳에 우리를 두시는지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광야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이 결코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사막이 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계속 기도하고 구하며 계속 기다릴 것이다 주님 밖에는 달리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
저는 리차드 포스트의 기도라는 책을 다시 읽으면서
1장에 단순한 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도에 관한 글이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모든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있는 그대로 다 내오 놓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것을 따지는 사람은 기도 안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앞에 다윗처럼
불평어린 한 숨이 섞인 탄식의 기도를 드리라
나의 형편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다 펼쳐 보여 드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시고 회복케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형편을 돌아보고 절망하는 내 마음을 돌아보면 <6>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 같지만
그러나 영혼의 사막같은 상태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지 방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같이 보일지라도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28절에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 이라고 합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 라는 말은 롬11:33절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다 측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힘이 없거나 수가 모자라서
우리를 구원치 못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29절에
[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 ]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같이 여겨
내 사정은 내 원통한 것은 하나님이 모른다고 불평합니까?
한마디로 신앙생활에 지친거지요, 영적피곤에 지친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른 무궁무진한 수를 가지신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보통 닭이 달걀을 품고 있어면 21일이면 병아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달걀을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인내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210일 동안 달걀을 품고 있었는데
그래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품느냐보다 누가 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가 백 날 품고 있어도 성취되는 일은 없습니다.
일의 성취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분께 맡기면 성취할 수 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시 부화되어 깨어날 수 있는 비결은 <7>
하나님 품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은 멀고 험난한 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고 너무 힘든 일입니다.
이러한 귀환 길을 선지자 이사야가 뭐라고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30절에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이 그 만큼 어렵고 힘든다는 말입니다
한창 자라는 소년에게는 피곤하다 곤비하다 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에 장정이란 <바후림>이라 해서 임무수행을 위해 특별히 뽑힌 장정들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 뽑힌 열 두 정탐꾼같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장로 권사 순장 같은 직분자들을 말합니다.
소년도 장정도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피곤합니다.

문제는 내가 피곤하다는데 있습니다.
왜 피곤합니까? 저들은 왜 피곤해 있나요?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겪고 있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도 저들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끌려와 포로 생활을 막 시작할 때는 그들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 머지 않아 이 포로생활은 끝이 날 것이다.
그러면 고향으로 돌아가 갈 것이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사랑하는 성도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리라 ]
이 꿈 때문에 그들은 먼 이국 땅,
노예 생활 속에서도 처음엔 잘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들의 소원이 이루질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면 도저히 이럴 수 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다."
우리의 이 원통함, 이 사정을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신다 ]
그때부터 그들의 삶은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8>
일을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감격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감사와 기쁨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심은 저들의 잘못된 생각과 신앙 때문입니다.
사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길은
소년이라도 자빠지고 장정이라도 넘어지는 어려운 길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능히 완주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기 피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능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능력과 힘을 얻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30절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
31절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거지요.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앙망>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 비틀어서 하나로 묶는다 ]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 기다리고 소망하고 바라다보면
우리 몸이 비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38장14절에도 그 의미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 여호와여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
오죽 기다리고 바라보았으면 눈에 핏발이 서며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그만큼 사모하는 것이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은 생명 걸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앙망은 생명 걸고 오직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 암몬, 마온의 연합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전혀 이길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기도하기를
[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하시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십니다.
놀라운 능력이 임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 합니다. <9>
시42:5절에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그 낙망하며 탄식하던 입술에서 오히려 찬송이 나올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으면 어떻게 될까요?

31절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새 힘의 상태를 독수리에 비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의미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날개치며 올라가는 독수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조류 연구가에 의하면 앉아 있을 때는 독수리나 매나 비둘기나
크기와 모양이 약간 다를 뿐이지 그 외 것은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날개를 펴서 날게 되면 상황이 다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날개를 편다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새 힘은 바로 땅위를 날아 하늘로 비상하는 엄청난 힘입니다.
바로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두 눈은 이중 렌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푸른 창공, 찬란한 태양을 직시하며 비상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눈은 믿음의 이중 렌즈로 되어 있기 때문에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 사람들이 감당치 못하는 힘과 능력이 주어집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고공 비행을 하여 가노라면
지상에서 올려다 보이던 구름들이 비행기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공중에 올라가면 우리를 가리웠던 구름조차도 아름답게 보인다고요.
우리가 새 힘을 얻어 영적 상공으로 드높이 올라갈 수만 있다면 <10>
나의 신앙의 삶에 그늘이 지게 하는 모든 근심과 걱정의 구름조차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너무 아름다워 찬송과 감사가 나온다는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믿음의 이중 랜즈란 말이 참 마음에 들어요.
기독 사이트에서 펴온글 입니다.
한 남자가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주말에 자기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부부 동반으로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친구와는 단짝 사이였습니다.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같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 친구 앞에만 서면 늘 뒤쳐진다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의과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하고 박사가 되어
모교 부속병원의 외과 과장이면서 교수였습니다.
그 부인은 대학 미인 대회에서 뽑힐 정도의 미인에다가
유명한 음악 연주가로서 같은 대학 음악과 교수였습니다.
반면에 자신은 고시에 몇 번 떨어진 한을 가지고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아내도 교사임용시험에도 여러 번 떨어져서 전업 주부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 내외를 생각하면 언제나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파티를 연다고 간곡하게 와 달라는 것입니다.
파티에 참석해 보니 잘 아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의사 친구가 아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첼로를 분위기 있게 연주했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저 친구 대학 다닐 때 첼로를 애인처럼 껴안고 캠퍼스를 걸어가면
여학생 모두가 가슴앓이를 했지!
저 크고 늘씬한 키에 미남에다가 못하는 게 없었거든!>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추켜세웠습니다.
그날 따라 그가 더 멋있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드디어 파티가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의사 부부와 네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 때 의사 친구가 말했습니다.
<오늘 나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없이 다 보았네.
이젠 떠나도 한이 없을 것 같애.>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놀라서 물으니 친구가 말하기를
<벌써 병원과 학교에 사표를 냈네.
이제 내 눈이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조만간 완전히 실명할거야. 벌써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네. 이젠 떠날 때가 됐지!>라고 했습니다.
찾아간 부부는 말문이 닫혔습니다.
<실명이라니!> 그렇게 부러워하고 행복해 보이던
사랑하는 친구의 행복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행복입니다. <11>
우리는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렵사리 행복이 손에 잡히는가 하는 순간,
그 행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행복한 사람들도 행복이 깨어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불안해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행복은 깨어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두 눈을 실명하게 될 그 의사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찾아간 친구는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의사친구 부부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난 행복해. 아내가 여전히 날 사랑할 것이고,
이 아름다운 아내가 늙어 쪼그랑 할머니가 되도
난 지금 이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할 테니 좋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잘 자라고, 난 조금도 떨지 않네.>라고 말했습니다.
찾아간 친구 부부는 더 화가 났습니다.
자신들 같으면 파티고 뭐고 아무 생각도 없어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통곡을 할텐데,
이 친구 부부는 왜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니까,
또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처럼 행복했던 것은
외과 과장이나 음악과 교수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 세계에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 내외가 행복한 것은 성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을 잃어도, 실명을 해도,
실패를 해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친구 부부는 오히려 크게 위로를 받고,
인생의 중요한 것을 터득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앙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행복이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풍요로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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