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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기쁨 (빌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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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몇 년 전, 비행기에서 아주 감동적으로 본 한국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목이 ‘선물’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어떤 젊은 부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아내가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은 무명 개그맨이었습니다. 오직 성공을 위해 남편은 열심히 노력해서 개그대회의 결선까지 갑니다. 이제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는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는데, 아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습니다.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기막힌 순간에 남편은 관객을 웃기기 위해 무대 위에 섭니다. 그리고 연기를 합니다. 분명 웃기기 위해 그가 보인 모습은 광대와 같았습니다. 관객은 그의 연기에 마냥 즐거워합니다. 그를 최고라고 인정하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는 웃기면서 실제는 울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우는,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의 연기가 깊은 여운을 남게 한 그런 영화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웃습니다. 코미디언도, 개그맨도, 연기자도, 그것을 보낸 관객도 깔깔거리며 모두 그렇게 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삶입니다. 웃고 웃겨서 즐겁고 기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속의 눈물을 숨기고 감추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희락,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인생을 향하여 진정한 기쁨이 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4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본문을 포함한 빌립보서는 기쁨이 주제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기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기쁨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 ‘사랑’에 이어 오늘은 ‘희락, 기쁨’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기쁨의 열매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웃지만 울고 사는 이 세상에서 참된 기쁨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선,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성경을 기록하는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하는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감옥에서 기록한 편지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외에도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상황입니다.

  보통 우리가 집에서 거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지금은 집이 아니고 감옥입니다. 요즘 감옥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고들 합니다. 몇 십 년 전의 감옥 같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감옥에 가도 견딜 만 하다는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감옥은 옛날 정도가 아니라 아주 먼 옛날입니다. 평범한 사람도 살기 힘든 때였고, 보통사람도 사람 대접받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감옥이었으니, 아마 감옥에 들어가는 그 순간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감옥이 지하에 있었는데, 습기가 가득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병균이 득실거리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살수 없는 곳입니다. 실제로 당시 죄수들이 감옥에 들어가면 나오기 전에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냥 감옥에 가만히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더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았습니다. 그가 태장으로, 채찍으로, 돌로 수없이 맞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를 범한 죄수의 경우, 40대 이상은 때리지 말라고 법을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40대 이상을 때리면 사람이 실신하여 죽기도 했겠지만, 이렇게 많이 때리면 그 사람을 천시하는 일이기에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라는 의미로 이런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말에 ‘개 패듯이 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매를 맞는 사람이 물론 죄인이지만 죄인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고백한 것처럼 감옥에서 이런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고백했으니, 바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마치 개처럼 취급하며 때리고 싶은 대로 때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감옥에서의 상황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당시 감옥에 들어가면 죄수를 ‘착고’에 채웠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착고에 채워졌습니다. 착고는 일종의 ‘족쇠’입니다. 죄수들의 발에 묶어 거동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자물쇠입니다. 비좁은 감옥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발을 착고에 채웠습니다. 그냥 착고가 아니라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자세로 만든 것입니다. 적당한 거리의 발을 벌려, 더 벌려도 덜 벌려도 안될 자세를 취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환경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정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고,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신음소리 대신에 기도를 했고, 원망이나 한탄이 아니라 찬송을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기쁨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에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은 착고에, 마음은 하늘에...’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참된 기쁨은 마음에서 옵니다. 환경은 열악하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떻습니까? 정말 살기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요즘은 ‘IMF’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직장을 구하기가 힘듭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육부가 발표한 '2004년도 취업 통계조사'에 따르면, 4년제 대학 졸업자 취업률은 56.4%로 최근 4~5년 사이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을 넘어 이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대학졸업자 두 사람가운데 한 사람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일을 해도, 일한 만큼의 대가를 얻기도 쉽지 않습니다. 직장이 어려워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합니다. 사업이 어려워 파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건강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다툼도 잦아집니다. 한가지가 어려우니까 줄줄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처한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라는 것입니다. 발은 착고에 채워졌더라도 하늘의 위로를 받고,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에서부터 기쁨이 오고, 또 거기에서부터 문제도 풀리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마음의 기쁨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까지 빼앗기면 우리는 정말 어려워집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발은 착고에 채워져 있더라도, 마음은 하늘에 두십시오.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하늘은 막지 못합니다. 거기에서 찬란한 영광의 빛줄기가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지금의 위기의 상황을 ‘장대 끝에 매달려 맛보는 진한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마음에서부터 원망대신에 감사를, 한숨대신에 찬송을, 신음소리대신에 기도를 해봅시다. 이런 때에 바울이 가르쳐준 기도를 우리가 간절히 해 봅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둘째, 현상 때문도 아닙니다. 바울에게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래도 마음으로 잘 견디어 나가고 있는데, 사실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언제 감옥에서 나갈 지 모르는 환경인데 이런 때 바울의 가장 큰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아시아를 돌면서 뿌린 복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힘있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사역자의 길을 걷는 순간부터, 그는 환경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 처한다해도, 그것을 감당하리라고 다짐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환경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은 성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녀들이 잘 성장한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아마 바울에게 가장 큰 위로요, 기쁨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렇지가 않았던 것을 봅니다. 그에게 들려오는 소식이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흐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2차 여행 때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빌립보교회 안에 아주 유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교회에 있었고, 이들의 역할이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들의 신실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섰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는 말할 수 없는 박해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성도들은 힘을 다하여 안으로의 결속을 다지며 환난과 역경을 이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두 사람이 잘 나가다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결국 갈등이 심한 다툼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이 교회를 넘어 지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바울이 두 사람을 향한 사랑의 권면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중의 하나였습니다. 싸우지 말고 이젠 화합하라는 것이고, 고집을 버리고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기쁨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이런 강력한 권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 성경적인 희락은 현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분명 나타난 현상은 다툼이요, 불화입니다. 현상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현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쁨의 조건일까요? 바로 ‘본질’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기쁨을 언급하며 믿는 자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이 ‘주안에서’입니다. 1절, 2절, 4절, 7절에 이 말이 반복됩니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툼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희락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툼의 현장에 주님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기쁨일까요? 그것은 용서와 해결의 기쁨을 말합니다. 용서와 화해로 기쁨의 현장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권면에 귀를 기울인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들은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좋은 일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환경이 어렵습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느끼는 어려움입니다. 환경도 어려운데, 마음까지 아픈 일이 있으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다투는 일까지 생기면 정말 맥이 빠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 종종 다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도 의견이 충돌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쓰리고, 아프고,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도 힘든데 이런 일이 생기면 더욱 견디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주안에서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다툼과 갈등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혹, 가정에서 다툼이 있지 않습니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형제와 자매 사이에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혹, 내 삶의 현장에서 다툼이 있지 않습니까? 혹, 교회에서도 종종 충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삶의 현장에 진정한 기쁨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관용을 베푸십시오.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안에서, 주님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있는 곳, 포옹과 사랑이 전달되는 곳, 해결과 눈물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가장 큰 기쁨을 보는 현장입니다. 정말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그 놀라운 기쁨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에서 ‘기쁨, 희락’하면 늘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이나 우리 삶에 나타나는 결과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고, 내 인생에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하늘에 두고 감사와 진실한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내 마음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보십시오.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버리고, 참된 기쁨의 열매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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