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개혁과 어린아이 (갈 1:6-12)

  • 잡초 잡초
  • 187
  • 0

첨부 1


- 설교 : 이용호 목사

  성경에 거울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거울은 실제로 거울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울로 삼으라는 이 말은 교훈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절 이하에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절에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절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거울로 삼은 그 대상이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렇게 어린아이가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거울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순수한 거울입니다. 오늘 이 어린아이라는 큰 거울을 우리 앞에 놓고 말씀을 함께 나누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시대는 지금 개혁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정치개혁, 기업개혁, 심지어 교회개혁 등 사회 모든 분야가 개혁의 구호와 개혁의 방침을 가지고 개혁의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개혁의 거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세워놓고는 ‘어린아이와 같이’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도 어린아이에게서 개혁의 거울을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이’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교회개혁, 신앙개혁은 없습니다. 그 개혁의 얼굴이 바로 어린아이에게 있습니다. 요즘 개혁하자는 구호가 많은데도 개혁이 만족하게 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회도 그렇고, 교계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왜 개혁의 구호는 많은데 개혁이 되지 않은가? 이것은 자기 개혁이 없는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혁이 안 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개혁을 한다고 떠들어봤자 개혁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자기 개혁을 한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자기 개혁의 증거가 있을 때 개혁은 됩니다. 그런데 개혁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자기 개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개혁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를 거울로 삼아야 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게서 세 가지를 개혁의 거울로 발견했습니다.

  어린이에게 있는 것

  첫째, 어린아이들은 아주 안정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안정감이 있는 상태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 아무리 단잠을 자도 어린아이가 새록 새록 자고 있는 그런 잠은 잘 수가 없습니다. 왜 어린아이의 그 잠을 어른이 못 자는가? 어린아이들은 안정감이 있기 때문에 단잠을 자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복잡합니다. 어른들은 불안전합니다. 어른들은 안정감이 없습니다. 개혁한다는 사람들이 안정감이 없으니까 개혁하는 행동도 위태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무슨 고유가가 위기고, 저금리가 어떻고, 무슨 신용불량이 위기고, 불경기가 어떻고 온갖 소리를 하는데 최대의 위기는 안정감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현대인들은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모두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안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만 계시면 아이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안정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위기입니다. 어린아이의 안정감을 배워야 됩니다.

  두 번째, 어린아이에게서 배울 교훈은 집중력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거기 몰두하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길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은 차가 오는지, 오토바이가 오는지 의식을 못합니다. 공놀이에만 빠져 버립니다. 내가 좋아하는 거기만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좋다는 거기에 몰두할 때는 어른보다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을 지금 어른들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집중력이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집중하면서도 잡념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집중력이 놀랍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갖고 싶다고 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가지고 요구를 합니다.

  세 번째, 아이들은 순수한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애들은 분별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잘못된 거라도 그 잘못된 것을 행동할 때는 상당히 용기 있게 행동을 합니다. 간장을 보고 콜라로 여기면 여지없이 마십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어떤 결단을 했을 때 행동이 순수하게 일어납니다. 어린아이의 제일 큰 약점은 분별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 안에서 하는 것은 알지만 넓은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볼 때는 분별력이 약한 것이지 그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 나름대로는 굉장한 용기를 동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따지다가 견주다가 제다가 행동하지 못합니다. 행동하는 용기가 애들한테 있습니다. 애들의 안정감은 순수합니다. 애들의 집중력은 순수합니다. 애들의 용기를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용기는 육감적 용기이다.” 몸으로 느낄 때 바로 행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실천하는 용기를 빨리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우리는 행동을 안 합니다. 알면서도 실천을 안 합니다. 그게 어른의 노련함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불신앙입니다. 이런 세 가지를 잃어버린 어른 세대들은 자기 개혁을 못합니다.

  실종된 개혁의지

  386세대는 자기 개성이 강한 세대입니다. 목소리가 강합니다. 행동도 과감합니다. 이들이 공부했던 시기, 이들이 자라면서 겪었던 시기, 그 젊음, 이들이 공부했던 세대, 이들이 겪어왔던 암울한 시절, 이런 때 그들은 개성을 가졌고 목소리를 가졌고 행동을 해 보았습니다. 나이로 보나, 공부한 때로 보나, 살아온 시대로 보나 이들은 상당히 개성이 강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국회로 정부로 기업으로 여러 분야로 진출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자기 마인드를 다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목소리 강한 세대들이 목소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행동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시대에 용기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만용밖에 없습니다. 이 만용이 어디로 나타나느냐 하면 한탕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탕하고 끝내겠다는데 용기를 부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부터 그랬습니다. 한탕 하겠다는 용기는 말로 못합니다. 거기에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잘못된 것을 끊어버리는 용기, 잘못된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용기, 좋은 일을 지속하는 용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용기는 보여주지 않고 한탕하는 데만 모두 용기를 부리고 있습니다.

  개혁은 운동이 아닙니다. 개혁운동 한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개혁은 시위가 아닙니다. 시위한다고 개혁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개혁은 제도가 아닙니다. 개혁은 제도요 개혁은 운동이요 개혁은 시위하면 되는 줄로 압니다. 기독교의 개혁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개혁이라는 것은 자기 개혁입니다. 자기 개혁이 일어나서 남들이 나를 보고 본받아서 행동하는 거기서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본받을 게 없으면 나로 인하여 개혁은 없습니다. 

  SK그룹의 최종현 회장이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분의 그 유언과 화장 때문에 우리 사회에 화장장묘문화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58%가 화장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고 건 전 서울시장도 최종현 회장의 본을 받아서 나도 후에 내 시신을 화장하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 있습니다. 개혁은 모범입니다. 장묘문화의 개혁은 최종현 회장의 공로가 대단히 큽니다. 이 분이 화장문화를 주도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상류층은 화장하는데 망설이고 있지만 상당수는 화장을 선호합니다. 개혁은 모범입니다. 내 자신이 개혁이 되어 모범을 보여주고 남들이 본받는 거기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개혁을 교회가 버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제도를 고치고, 보이는 무엇을 하면 개혁이 될 줄로 아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개혁의 축은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1장 6절 이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비장한 투쟁선언입니다. 율법주의자와 영지주의자와 이단들을 향한 강력한 투쟁선언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개혁의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외쳤던 이 개혁의 원칙이 두 가지입니다.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이 외침 속에 개혁의 중요한 주체가 있습니다. 개혁은 복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이 복음 외에는 천사가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은 저주를 받는다, 우리가 전한 이 복음 외에 다른 것은 믿지 말라, 우리가 전한 이 복음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항상 신앙이 개혁되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해져 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에 복음이 붙잡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붙잡혀져야 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늘은 스스로 돕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돕습니다. 자기 방법으로 하겠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돕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붙잡는 자를 도와줍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고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너희들이 지금 다른 복음을 좇아가고 있다, 우리가 전한 이 순수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다르면 하나 될 수도 없고 개혁도 무너집니다.

  위대한 개혁자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은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 천주교 사제입니다. 요한 칼빈은 천주교와 거리가 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의 종교개혁의 일치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 개혁의 구호는 똑같았습니다. 그 개혁의 구호가 똑같은 것 중에 제일 첫 번째가 쏠라 스크립트, ‘오직 성경이다’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천주교요, 요한 칼빈이 장로교라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일치점을 찾을 수 있었고 개혁의 깃발을 올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변화를 시도하려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와야 됩니다. 이 말씀을 제외해놓고 내가 나를 개혁해보자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말씀에 복종을 해야 개혁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개혁의 주체입니다.

  우리 집에 빵굽는 기계가 있는데 언젠가 한번은 빵을 구웠는데 부풀지가 않았습니다. 왜 안 부풀었는지 보니까 부풀게 하는 이스트를 넣어야 되는데 그것을 안 넣은 것입니다. 이스트를 안 넣고 부풀거라고 3시간이나 기다려보았지만 부풀지 않았습니다. 이스트를 안 넣으면 밀가루는 부풀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사람은 개혁이 안됩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한다

  바울이 두 번째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사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일치점이 이것입니다. 그들의 종교개혁의 기치가 솔라 그라치아 더 데우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주의 영광’, 한 손에 오직 성경, 한 손에 오직 주의 영광 이것을 붙잡고 그들은 함께 개혁의 기치에 일치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주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왜 순수한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면 결정적인 대목에 가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하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능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가 여름수련회를 가지는데 특별히 규칙을 정했다고 합니다. 교회 중직자들은 여름계획을 다 조정하고 그 수련회에 한 시간도 결석하지 말고 다 참석해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자 하고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중에 한 분이 CEO로서 상당히 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 자리에 있는 분인데 수련회 참석도중에 갑자기 회사에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자기가 가서 회의를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헬기를 대절해서 서울에 갔다가 집회에 참석하는 계획을 세워서 회의에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기 대절료가 60만원인데 수련회 회비가 6만원입니다. 그것을 감수하면서 수련회를 끝까지 참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게 어떤 의미입니까? 그게 낭비입니까? 과소비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얼마나 회사에 할 일이 많겠습니까? 하나님 교회의 수련회 분위기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유력한 중직자가 회사일로 조퇴했다 그 소리면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를 여러분이 잘 파악해야 됩니다. 아끼고 손해 안 보는 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과감하게 육신의 것을 손해 보는 거기에 영광이 드러나지 내 육신을 치장하는 거기서 주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하는 말, “사람들에게 좋게 하라,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울이 어떻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중심의 불신앙을 우리가 과감히 떨쳐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올 때 거기서 개혁이 일어납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면 저절로 개혁의 역사가 일어날 줄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있는 실화를 소개합니다. 루이 14세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의 족적은 실로 화려하기도 하면서 잔인하기도 한 왕입니다. 그런데 이 왕과 왕족이 크넬론이라는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에 주일예배를 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왕과 왕족이 예배를 드리러 나오니 예배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소문이 자꾸 퍼져서 사람들이 그 교회에 몰려오는데 예배당에 수용을 다 못할 정도입니다. 그것도 일명 교회부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크넬론 주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인가? 왕을 보러 오는 사람들인가? 한번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어느 주일날 왕이 왕족들을 거느리고 예배에 왔는데 교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왕이 하도 이상해서 대주교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대주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용서하십시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지 왕을 뵈러 오는지 제가 한번 시험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지난 주일에 교인들 앞에 다음 주일에는 왕이 오지 않는다고 광고했습니다.”

  여러분, 이 일화는 우리 교회에 어떤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거기서 개혁이 일어납니다. 개혁은 개혁 자체가 구호가 되고 주체가 되면 안됩니다. 개혁의 주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치고 이 말씀을 양보하고 이 말씀을 세상과 타협하면서 개혁하는게 아니라 이 말씀을 살리면서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내세웠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개혁의 메시지입니다. 모든 서신은 처음부터 인사와 축복이 나갑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1절에서는 전투적인 선언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내가 사람의 힘으로 사도된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갈라디아 교회가 사람중심으로 율법중심으로 유대주의자들 중심으로 잘못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살아야 되고, 그리스도가 살아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를 차지해야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바울이 선언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아이들의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동작 속에 안정감이 있고 순수함이 있고 남을 의식하지 않는 순수한 용기를 발휘해주는 그 아이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아이를 가운데 세워놓고 “어린아이와 같이 하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우리의 거울로 삼으신 예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안정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너무 머뭇거리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에 집중력을 발휘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용기 있게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