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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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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굣 : 오주철 목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뜨거운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그런 열망일 것입니다. 사람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과거의 영향을 극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성인 아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성인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아이가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에 세상과 사회를 향해 분노했든 그 분노가 내가 어른이 되었는데도 계속 분노를 하고 있습니다. 또 어린 시절에 버림받은 아이, 거절 받은 아이, 버림받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컸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버릴까봐 계속 두려워합니다. 내 속에 버림받은 아이, 거절당한 어린아이가 그대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다는 것은, 그리고 새로워진다는 것은 과거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6.25 전쟁 때에 자기가 다니든 중학교가 폭격을 맞아서 학교 전체가 불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가 불타는데 자기는 너무너무 신바람이 나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자기 성적표가 불에 탈 것을 생각하니까 그렇게 좋더랍니다. 자기의 과거라는 레코더, 그 과거가 부끄러운 과거,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일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내 과거라는 인생의 기록부를 찢어버리고 내 인생의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붙여진 별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얼마나 좋은 별명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들 주위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 사는 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에 미쳐 사는 명예의 사람도 있습니다. 쾌락에 미쳐 사는 쾌락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힘을 받아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해도 너무 좋은데 거기다가 다윗에게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에게도 자기 인생의 어느 날 결정적인 오점 하나를 남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보면,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과거의 실수를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이 참회한 유명한 시편이 51편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우슬초로 저를 씻겨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정하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요? 이 사건을 가리켜서 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듭난다." 오늘 저는 본문의 말씀 속에서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 질문은 이단인 구원파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에 사용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어쩌면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는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정말로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봉독한 본문 속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앞날에 대한 야망이 있는 사람이요, 자신의 성공을 착실하게 지켜 가고 있었던 니고데모라고 하는 신사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기에 웬만한 세상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자기를 찾아와서 인생 상담을 하는 후배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요령을 충고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이스라엘의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진 세상의 일과는 반대로 하늘 나라에 대하여는 점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2절에서 예수님을 향햐여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한 말을 들어보면 그는 상당히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칭찬하고 높이면서 말을 합니다. 처음 만난 예수님에게 좋은 소리는 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를 칭찬한다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찾아왔던 목적, 이 사람의 마음속에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어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 거듭나야 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 종교적인 경험, 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인 이야기, 인생에 대한 모든 자기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존경받는 자기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다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누가 거듭나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해서 던지지는 메시지입니다.

C. S. 루이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 지금 우리가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고, 과학이 발달된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구도의 열정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이 없습니다. 정말로 뜨겁게 믿어보고자 하는 노력과 헌신이 없습니다. 죽음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진지한 질문을 상실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이 사람은 구도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와 제도에도 불구하고 젊은 예수를 찾아와서 그에게 인생을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거듭나야 합니까? 오늘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짤막한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 3절을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더 강조해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거듭나셔야 합니다.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반복하신 이유는 특별히 강조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You must라는 조동사가 쓰여집니다. "You must be born again", 다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도 좋고 안 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옵션이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에게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돼!"

지나간 시대에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죠지 위필더'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마다 설교하실 때에 자기가 좋아하는 18번 설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죠지 위필더 목사님의 18번 설교가 거듭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듣고 한 청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목사님이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찾아와서, 죠지 위필더 목사님에게 "목사님의 자원 비서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죠지 위필더 목사님이 집회하는 데마다 같이 따라다닙니다. 가방을 들고 목사님을 따라다니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좋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가는 데마다 똑같은 설교만 합니다. 계속 거듭나야 한다! 그 설교만 자꾸 합니다. 그 설교를 한 70번 듣고 난 어느 날, 이 청년이 드디어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내려오는데 붙들었습니다. "목사님, 그 설교 몇 번이나 한 줄 아세요? 70번이나 하셨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때 죠지 위필더 목사님이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왠 줄 아느냐? 너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었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 앞에서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강한 자기 도전으로 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험에 들고, 넘어집니까? 그 중요한 해답을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청년 부자 관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 부자 관원에게 너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그 말씀 한 마디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외치면서 구도자적인 열정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도 강한 구도자적인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거듭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거듭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3절에 보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얼마든지 천국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영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정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아름답고 은혜로운 현상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함께 살펴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의 본질 가운데 세 가지 단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의요, 둘째는 평강, 그리고 세 번째는 희락입니다. 이 땅에,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공의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있습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환경이 불안해도 내 마음 속에서 잃어버려지지 않는 평화를 우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 슬픔 많은 세상에서 내 안에 넘치는 진정한 기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면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면 훗날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났을 때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에서 의도 평안도 기쁨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역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이 땅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고, 참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거듭났습니까?

예수님과 니고데와의 대화가 15절에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15절의 말씀이 끝나면서 16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16절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눈 것은 15절까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16절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진짜 믿게 됩니다. 거듭난 결과가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거듭나서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그러면 거듭나지 못하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거듭나야 하느냐?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절실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듭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해보십시오.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면 두 번 죽어요."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몇 번 죽습니까? 한 번만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두 번 죽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둘째 사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같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한번 찾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에 보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이라는 것은 범죄한 결과로서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입니까?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교인들도 다 죽습니다. 저도 틀림없이 죽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보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입니다. 내가 죽어서 내가 살아왔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번 태어나면 몇 번 죽습니까? 한번만 죽습니다. 인간으로 한 번 태어나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두 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지옥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듭나지 아니하면 멸망합니다. 왜 거듭나야 하느냐?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셔야합니다. 꼭 거듭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거듭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듭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거듭나는 것입니까? 이 해답은 4절부터 6절 사이에 있습니다. 읽어보면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을 자연적 출생과 영적 출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된 것처럼 영적인 출생에 의한 새로운 창조, 내가 영적으로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형편없이 살던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선되는 것입니다. 내가 개선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개선보다도 더 깊은 곳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수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예 새롭게 만들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창조를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영어 성경에서는 새로운 창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창조가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종교의식에 참여한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만 나왔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창조물이 되고 새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느냐? 어떻게 거듭날 수가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본문 14절과 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지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서 갑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광막한 광야를 지나면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힘든 광야 생활 때문에 그들은 원망합니다.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절망하고 원망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 주시는 만나, 성경에 보면 이 만나가 하얀 색깔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했던지 그 맛이 마치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입니다. 꿀송이 같다고 하던 만나를 먹고 또 먹으면서 나중에는 만나를 주시는 것도 불평을 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사람은 자기가 받아 누리는 축복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축복을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박힌 식물을 싫어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때 제일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세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라고 하십니다.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불뱀에게 물린 사람은 뱀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한데 그 뱀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신앙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신앙은 아주 단순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저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마음 자리가 바로 단순한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구원의 방법이라면 하나님을 한번 신뢰해봐야지, 그러면서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단순한 믿음으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과 판단으로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다 죽어갔습니다. 내가 놋뱀을 쳐다보았더니 이렇게 살았노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쳐다본 또 다른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인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막대기를 들고 그 위에다가 놋뱀을 매달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대 끝에 놋뱀을 매다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나 대신에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님도 들려야 하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좌절과 갈등과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았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결심도 해 보고, 참선도 해 보고 별의별 노력을 다해도 내 인생이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어 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 이니라" 죄 때문에 죽어 가는 인생,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는 자마다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노력과 방법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철학과 자기의 모든 방법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분의 방법과 여러분의 철학과 여러분의 노력이 여러분을 구할 수 있었나요? 여러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었습니까? 언제까지 희망 없는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철학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예수를 믿고 거듭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방법과 내 철학의 절망을 느꼈다면 이제 십자가 앞에 오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짊어지시고, 나대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때에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지. 아닙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는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뜨겁게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질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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