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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감과 승리의 성도 (왕상 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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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하루하루 평탄한 삶을 사는 것 같다가도 문득 어느 날 삶의 굴곡을 이루는 지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어떠한 종류건 결단을 요구하는 장면입니다. 아마 이러한 부분들은 대부분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아픔과 고뇌의 시간, 무엇인가 괴로움이 극에 달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단을 내려야할 시간에 훌륭한 결정과 결단을 내리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일보한 삶의 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이러한 위기와 갈등 속에 주어지게 된 결단과 결판을 이루는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합왕에게 가뭄이 있을 것을 예고한 엘리야의 경고 이후에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가뭄이 있게 됩니다. 엘리야는 그릿시넷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지냈고 사르밧 과부 여인의 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로 음식을 먹으며 지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아합에게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담대하게 아합에게 나아가 하나님을 배격하는 구도를 깨뜨릴 것을 제의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청빙하여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여부를 시험하는 결투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엘리야는 승리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새로운 하나님과 엘리야의 시대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두려움 앞에 담대히 서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 하십시다. “두려움 앞에 담대히 섭시다.” 18장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합왕과 엘리야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장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엘리야가 아합왕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니다. 이전 아합에게 나타나 이 땅에 우로가 사라질 것을 말했을 때 비록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긴 하였지만 역시 그 말을 하고 숨어들 때에 엘리야의 모습은 무엇인가 위축됨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오늘 모습은 너무나도 당당합니다. 완전히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엘리야는 이와 같이 아합에게 이스라엘에게 우로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이후에 가뭄이 연속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합왕은 가뭄의 원인이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만 하면 이스라엘에게 가뭄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어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합왕 앞에 엘리야가 자원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아니라 담대하게 아합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합의 잘못을 오히려 지적합니다. 아합왕에게 엘리야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앞에 아합왕이 위축 되는 것입니다.

아합왕이 묻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이 너냐?’감히 어떻게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아합왕은 엘리야에게 오히려 이렇게 위축되어 이렇게 물을 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입니다.’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섬기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오라고 하시오. 내가 그들과 결판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은 이 장면을 잘 알고 있고, 이 장면 속에서 매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결코 위축되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단의 세력들이 거세게 몰아쳐도 삶의 상황이 우리를 억누르고 휘몰아쳐도, 노력해도, 애써도, 우리의 모든 일이 잘 안될 때도 하나님의 능력이 뒷받침 된다면 이제까지의 상황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나오게 될 때 그는 비록 히브리 민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애굽 백성을 죽인 결과로 그것이 탈로나 자신의 목숨이 잃게 될까 두려워 목숨 하나 부재하기 위하여 광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납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는 오히려 바로의 궁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죽기 싫어 쫓겨 나왔던 바로의 궁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애굽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위치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도 근심하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제는 근심하지 않고 우리를 근심하게 했던 것이나 혹은 우리를 근심하게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근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한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그 위치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시편 30편 11절을 보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97편 11절은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안에 사는 의로운 사람일 때 우리 앞길에 빛을 뿌려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할 때 우리들에게 기쁨을 뿌려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와 삶의 구조와 설정을 근본적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면 지금의 내 자리는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얼마든지 위치가 바뀌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은 인간의 모든 두려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 있게 만듭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이나 먹고 있고, 사르밧 여인의 집에 식객으로 머물고 있던 이와 같은 엘리야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담대하게 아합왕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에게 있는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는 두려움의 상황 앞에 우뚝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역사의 장면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가장 자신이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무엇인가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내가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 어려움을 헤칠 근거가 나에게 분명히 주어졌다고 생각할 때가 아닙니까?
다른 분들과 더불어 자동차 같이 타고 갈 때보면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길을 잘 아는 사람일 것 같아요. 이쪽 길로 가면 빠르고, 이쪽 길은 막히고…. 아마도 길을 잘 아는 사람이 그래도 상당히 영향력 있게 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음식점에 내려서 음식을 먹게 되면 또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음식점이 맛있고, 여기는 무엇을 잘하고…. 아마 세상에서 최고의 지식은 음식에 관한 지식인 것처럼 자신 있게 말씀 하시는 것을 봅니다. 운동장에 가면 어떻게 바뀌죠? 공 잘 차는 사람이 가장 자신 있는 것 같아요. 평상시 예배시간에 와서 눈 감고 팔짱끼고 계시던 분들도 운동장에만 가면 펄펄 나는 분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상황이 바뀌니 위치가 바뀌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음악회 가보셨죠. 음악회 하기 전에 사람들이 얘기 많이 하잖아요. 굉장히 떠드는 것 같아요. 떠드는 사람 얘길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본인이 알고 있는 음악적 지식을 총 동원해서 얘기하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뭐니 뭐니 해도 지갑에 돈이 가득해야 힘이야.’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자신 있어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신 있어야 하냐는 말이에요. 돈이 있을 때 입니까? 내가 일정한 위치에 있을 때 입니까? 아니면 연줄이 돼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될 때입니까? 만약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 가장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내 힘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현재의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 자체가 어려움을 더욱더 큰 기쁨으로 만들어가는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은 말씀합니다.‘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내게 있어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있거나 내 뜻과 배치되는 상황이 연출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 눈앞에서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그리고 사르밧 여인의 집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적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적에 본인이 직접 동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엘리야에게 있어서 도대체 두려운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오히려 담대하게 아합왕 앞에 나가서 아합왕이 위축할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영적인 권세로 그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아마도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의 일이 두렵습니까? 힘과 용기를 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은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대한 확신은 자신의 모든 삶의 일들, 그리고 생명을 걸어야할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을 담대하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결국 승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위축되어야 할 때 가장 외소해질 때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가장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사기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꼭 승리한다. 승리할 수 있어. 나는 승리할 것이야’라고 믿는 순간 전쟁은 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최종적인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바로 당사자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없고 자신의 직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우수한 병기가 주어졌다한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스위치를 누를 수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가 이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고, 나는 역사 속에 어떠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인가 자신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걸만한 중요한 순간에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외적인 여건보다 영적인 확신이 주는 내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성경을 읽는 중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가 여기인 것 같아요. 형벌을 받되 구차하게 면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구차하게 책임 면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구차하게 어려움을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구차하게 살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38절에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합왕 쯤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능력을 체험한 엘리야 앞에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갖고 계십니까? 그 누구라도 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저녁에 해지는 태양을 볼 때마다 그 노을 속에 느끼는 것이 슬픔이십니까? 그러나 눈을 돌리시고 담대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저녁 해 지는 노을 속에 슬픔을 느낄지라도 다시 아침에 돋는 태양 속에 소망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의 해는 져도 내일의 해는 또 다시 뜨는 법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결국 천국의 가능성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나를 기쁘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기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를 천국으로 이끌어 이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을 주시든지 입니다. 이쯤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살아도 주님 때문에 기쁘고 세상을 떠난다면 주님 때문에 더 기쁜데 우리는 용기 있고, 자신 있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두려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 그와 같은 성도야 말로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의 백성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두려움 앞에 당당히 섭시다.’

두 번째는 결단을 촉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결국 인생은 결판을 보아야 할 결단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언제든지 머뭇거림에 대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외칩니다. 오늘 본문 18장 21절에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안타깝게도 한사람도 응답하지 않고 묵묵부답입니다. 누구하나 담대하게 ‘나는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당시의 종교 혼합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조차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구별해도 선택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분명한 대답과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왜 믿음의 백성들에게 확신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까? 바로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결정은 순간인 것 같으나 결코 그것은 순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의 결정을 이루기 위해서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의 내력과 구조들이 결국 그 순간의 결정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 ‘아니오’ 둘 중에 답 하나 말했지만 ‘예’와 ‘아니오’라는 답을 말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그의 삶의 이력과 과거의 삶의 모습과 원칙과 그리고 그의 삶의 모든 견고함이 포함되어져 그와 같은 대답을 이룰 수 있게 했겠습니까? 따라서 순간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순간적인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오랜 기간, 영원한 기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받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날마다 쉽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주변의 일 만으로 우리 삶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별력과 판단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바르게 결정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꾸 갈등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지고 그리고 초조해 질 때가 있습니다. 삶의 전반적인 길에 대해서 자꾸 생각해 볼 기회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어느 쪽이든지 결단을 내리시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넘어야할 고개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햄릿형의 인간적 형태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비교적 착해요. 착하다는 의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참 마음이 순하고 착해요. 그런데 의외로 이 착하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반작용이 있습니다. 의외로 결단력이 약하고 의외로 의지가 굳지 못한 경우도 있음을 봅니다. 의외로 햄릿형의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럴까? 저럴까?’하는 확신 없는 방황과 갈등으로 시간을 보내 기회를 잃고 후회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조금 어려워도 참아야 합니다. 약속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시작했으면 마쳐야 합니다. 갈등과 방황을 다만 어려움이라 생각하고 결국 극복하고 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상했던 어려움이나,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 생길 때 ‘이게 아닌데’하고 갈등하고 처음의 마음을 회의해서는 안됩니다. 또 다시 극복의 의지를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든든한 믿음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착하기는 한데 마음이 약해서 이와 같이 햄릿형의 사고를 가지고 빙빙 맴돌다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안의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결단하고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냐, 세상의 일이냐. 하나님의 편이냐, 세상의 편이냐.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말로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는 식의 갈등은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더욱이 주변의 여건이나 많은 숫자는 작은 일의 결정에 영항을 미치지만 삶의 구도 차체를 결정짓는 아주 중대한 결단은 주변 여건이나 상태나 숫자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내일 소풍을 가기로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비가와요.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비가 오는데 오늘 소풍가면 비 맞고 안 되지. 오늘 비 오는데 소풍가지 말고 영화나 한편 보러 갑시다. 아니면 음식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냅시다.’ 계획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일이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거나 결혼식 같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 있어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비가와요. 그런데 이런 사람 있습니까? ‘오늘 비가 오는데 입학시험 내일 치르러 갑시다.’ ‘결혼식 다음 주에 합시다.’ 이런 사람 있나요? 왜 그렇지요? 이것은 너무 큰 사건이라 날씨의 영향을 안 받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 영항을 안 받아요. 내게 주어진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 상황이 어려워서, 내 여건이 안되서. 내 사정이 안되서.’이것은 내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소소하다는 뜻이에요. 내가 마음에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고, 내 마음에 결단이 확고하고, 내 마음의 의지가 견고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주변 여건이 이래서, 사람들이 이래서, 생각이 바뀌어서, 상황이 이래서’전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내 마음의 각오와 결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내 상황, 여건, 환경 때문이라고 말 할 때는 내 상황과 여건과 환경의 지배를 받을 만큼 내 마음이 작다는 것입니다. 내가 견고하지 못하고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숫자나 상황 자체를 능가할 만한 어떤 큰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은 우리 안중에 없게 됩니다. 좀 더 냉정히 말하면 ‘여건이 안되요.’라는 것은 여건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건을 뒤집을 만큼 내 마음의 용기와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순간의 사람들은 상황을 능가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작은 결정은 주변을 바라보고 하지만 삶의 전체를 구획할 만한 중요한 결정은 오직 하나님 바라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자리 계신 분들 중에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가진 분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이런 경우 있지요. 자꾸 일이 어려울수록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또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일이 안되어도 자꾸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고 있고 안타까워 하나님을 찾게 되면 그 일은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회입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 들 때 있지요. 자꾸 일은 어려워지고 마음먹은 대로 안되고 하나님께 기도해보고 또 가서 확인해보면 상황은 전혀 아니에요. 그때 여러분 이런 마음 들 때 있지요.‘그래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 그래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거야.’확인하고 또 왔는데 또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 마음에 무슨 마음이 들지요? ‘아니야, 그래도 나는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 이런 마음 들 때 있지요. 그런 마음 들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삶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자꾸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마음이 들 때는 이미 믿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믿음이 우리 삶의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있지요. 일이 안될수록 낙심이 되요. 마음이 소심해져요. 자꾸 주변 상황에 눈이 돌아가요.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과 여건을 탓하게 됩니다. 상태에 집착하게 되니 너무나 마음이 상합니다. 이런 분들은 그 모습에서 빨리 헤어나오셔야 되요. 우리들에게 자꾸 주변 상황이 보여지고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황보다 내 마음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중대한 결정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지 주변과 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결국 마지막 결판의 순간, 결정의 순간은 혼자 남아 결정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이하에서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촉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제 결단하라. 백성들은 묵묵부답입니다. 엘리야가 뭐라고 얘기하지요? 22절에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니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너무나 외로운 절대 고독 속에 그는 절규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홀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절대 고독 속에 홀로 계신 감독자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고독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혼자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선택하여 그를 따라오게 했던 3명의 제자들조차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가야바의 뜰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순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그의 눈에 뜨였지만 베드로조차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절하게 혼자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도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지겠다는 제자하나 없었다는 말입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절규하며 혼자 그는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홀로되는 마지막 절대 고독의 순간을 극복하여 이긴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잘 가다가고 마지막 순간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마음이 무너지는 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혼자 남았어. 너 혼자 이 세상에서 믿음 지킨다고 누가 알아주나. 네가 믿음대로 살았다는 것이 결국 결과가 이것이냐. 네가 믿음대로 살아 덕본 것이 무엇이냐. 네가 믿음대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즐겁게 살지 않았느냐.’ 우리에게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불어 일으키고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지요. 저는 시편 1편을 볼 때 마음에 참 기쁨이 있어요. 바로 3절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라는 부분입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봄에 먹는 과일, 여름에 먹는 과일, 가을에 먹는 과일이 따로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거예요. 내게 아직 열매가 없다고 하면 아직까지 시절이 아닐 뿐이지 기다라면 그 은혜의 시절이 온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입니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안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주님 제가 다 이해하겠는데 다만 그 시간이 언제인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참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그럴것 같아요? 시간 알려주면 괜찮은가요? 아닌 것 같은데요?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시험 보셨지요. 학교 다닐 때 시험 볼 때 시험 시간도 예고하고, 과목도 예고하고, 범위도 예고하지 않습니까? 그럼 시험 시간도 가르쳐주고, 과목도 가르쳐주고, 범위도 가르쳐줘서 다 열심히 공부해서 언제든지 시험 잘 보셨습니까? 제가 보니까 아닌 것 같아요. 시간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공부 안한것도 아니고, 범위를 몰라서 공부 안한것도 아니고, 과목을 몰라서 공부 안한것도 아니에요. 우리에게 알려준다 해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바꾸지 못해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지 않아도 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 길을 인도하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를 진정으로 명확히 평가하시고 신실한 사람을 가리어 내어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가르쳐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늠해 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승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는 엘리야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승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는 엘리야.’우리 삶 가운데 모든 진의 여부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결판이 들어나게 됩니다. 허위의 가면은 마지막 순간에 벗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추리소설 같은 것을 읽다보면 대미를 장식하는 몇 페이지에서 이제까지 수 백 페이지 동안 이루어졌던 모든 내용을 능가할 만한 대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저 한 순간에 거짓의 정체가 밝혀지고 허위의 가면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정의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가려도 아무리 외곡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움을 모면할리는 없습니다. 속이고자 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속였을 뿐이라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오늘 엘리야는 결과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있어서 진실은 ‘내가 정직하다.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정도가 진실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의 진실은 그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진실하십니까?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한번 여쭤봅시다. “진실하세요?” 진실한 것은 ‘내가 거짓말 안한다. 정직하다.’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입니다.

이제까지 바알 선지자들은 거짓 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백성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아무리 외처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거짓이었으며 그들의 행동이 거짓이었음이 들어났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결판의 순간에는 거짓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결판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뚝 서있어야 합니다. 왜 지금까지 잘 지내오다 마지막 결판의 순간에 꼭 믿음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까? 늘 말씀 드리지요. 평상시에는 상식으로 살다가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평상시 순간엔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음을 버리고 상식으로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말이에요.
엘리야는 뭐라고 말합니까? 32절에 말씀합니다.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37절‘여호와여 응답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여호와께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온전한 승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으로 이루어짐을 봅니다. 40절에 보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바알의 선지자를 다 잡아서 기손 시냇가로 가서 다 죽여 버렸어요. 얼마나 끔찍해요.

역사상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이뤘던 칼빈이라는 사람도 너무 학정을 하는 독제자라는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평가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을 이루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그릇된 것은 다 정리했기 때문이에요. 너무 심한것 같았어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겪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 21절을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도 베풀지 말고 되는 대로 말씀대로 딱 잘라 모든 것을 처단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악의 근원되는 부분을 모두 깨끗이 도려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나안을 정복할 때 대표적인 여리고성을 정복했지요. 그런데 조그만 성 아이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패퇴하고 사람이 죽어요. 백성들 가운데 난리가 났지요. ‘왠일이냐’ 이유가 있지요.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자신이 쓰려고 물건을 훔쳤던 거예요. 하나님이 그 아간이라는 사람의 범죄 하나 때문에 전쟁에서 패퇴하게 해서 사람이 죽고 그 민족이 좌절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 한사람의 죄 때문에 왜 민족이 망하느냐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지요? 아간한 사람 뽑아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죄의 뿌리가 있는 한 너희는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순간 너희는 결단코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뿌리 뽑지 못한 죄의 뿌리가 있습니까? 죄의 근원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내가 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어 넘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 뿌리를 도려내야 합니다.
여러분, 성지순례하면서 엘리야 동상을 봤는데 엘리야 동상이 어떠한 동상이냐 하면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에요.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에요. 엘리야도 대 선지자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이 묻잖아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그때 뭐라고 얘기가 나오지요? ‘모세, 엘리야, 또 다른 선지자’ 엘리야는 이러한 반열에 들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력하게 각인된 사람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구약의 인물 중에 모세 다음에 누가 등장해요? 엘리야가 등장하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선지자. 그만큼 엘리야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대단히 각인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엘리야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이 동상으로 있더라고요. 엘리야가 사람을 처참하게 처단했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근원을 도려낸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인간적이라는 말을 쓰지요. ‘아주 인간적이다. 아주 인간적으로 훌륭해.’ 인간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휴머니즘입니다. 인본주의에요. 우리가 너무나 인간적으로 생각이 치우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그르치는 결과가 되요. 엘리야는 인간적인 동정심과 인간적인 연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에 치우치다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그들을 살려 두었다면, 동정과 연민 때문에 그들을 놔두었다면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은 또 다시 백성들을 준동하여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하고 유혹하여 결국 하나님 앞에 그 백성들이 징계로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엘리야는 그들을 처단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랐던 것을 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늘 말씀 드리지만 따라서 합시다. ‘마침표 잘 찍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마침표 잘 찍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이 참 착하잖아요. 그리고 때로는 은혜 받으면 의욕도 있고요. 그런데 부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그런 면이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뭐 좀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슬슬 빠지고 흐지부지 없어져요. 그 일에 대한 평가나 어떤 일에 대한 결산조차 못하고 흐지부지 없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교회일 하다보면 말로만 끝나는 경우도 흔히 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마침표 잘 찍어야 해요. 의외로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 마침표 잘 찍지 못해서 분명한 매듭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 성령 충만해서 시작했다가 나중엔 흐지부지 되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정말 내 생명 걸 것 같이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하고 싫어진다는 말입니다. 시작했으면 마쳐야 합니다. 헌신했으면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각오했으면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해요. 약속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오늘 엘리야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마침표를 찍는 승리입니다.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 ‘여러분 믿으십니까?’ 마지막까지 그 일을 완결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 마무리까지 끝을 보고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산하고 평가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흐트러뜨린 결과까지도 수습해서 맞춰줄 수 있는 이와 같은 폭넓고 마음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 계획한 것,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 하나님 앞에 결정한 것,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한 것, 내 삶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로 한 것 모두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승리의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엘리야가 승리로 마지막을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지막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에요. 엘리야가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로 가서 다 죽여 시냇가가 피로 물들었는데 엘리야가 그것이 좋아서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는 결국 악의 세력을 제거해 내기 위함 이예요. 성경을 보면 의외로 ‘진멸하라’는 말이 나와요. ‘남녀 노인을 막론하고 다 진멸하라’는 말이 나와요. 얼마나 처참한 말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의 뿌리 자체를 언제든 염려했던 것입니다. 뿌리 뽑지 못하면
그 뿌리에서 또 다시 싹이 나서 결과적으로 무성하여 우리의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뒤덮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코자 합니다.
저는 언제든지 많은 성도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도님들이 목사에게 하는 말씀은 그저 평범한 얘기는 아니에요. 우리 성도님들이 인생에서 여러 가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마지막으로 목사의 기도를 받고 결정을 내리고 싶어하는 것을 봅니다.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지, 더 다녀야 할지. 운영하던 사업을 접어야 할지, 아니면 유지를 해야 하는지. 가계를 정돈해야 하는지, 계속 해야 할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 유지해야 할지, 교회 봉사를 해야 될지, 아니면 돈을 벌어야 될지 수많은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서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 느끼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 삶에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저렇게 해야 합니다.’이렇게 해야 하거나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원칙과 기준이 있어 그 기준과 원칙에 따라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준에 맞고 원칙에 맞으면 해야 하고, 기준과 원칙에 어긋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어떤 것이 더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주고, 교회 덕을 끼치고,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고, 내 가족의 믿음에 큰 유익을 끼치며, 내 믿음에 더욱더 큰 은혜를 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일률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이 있으니 과연 그것이 협력하여 주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단 결정되면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그 일을 추진하고 완결해야 합니다.
이때 인생은 누구든지 혼자입니다. 누구든지 혼자입니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순간의 결정은 혼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홀로서는 외로운 고독의 순간 속에 우리 삶은 위대한 결정을 이루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결단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라내면 새순이 돋습니다. 베어내면 그 자리에 새 살이 돋습니다. 주님 위해서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지금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가중되고 누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무엇인가 내 생에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이 결단이라는 것은 삶의 주변 정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태도와 내 마음과 내 습관과 내 기질까지도 송두리째 바꾸는 이와 같은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결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 그의 세계는 무안히 넓어지며 온 세상을 발아래 두고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세계 속에 주의 나라를 이루게 되면 온 세계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이끌어 들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한 결단의 순간 속에서도 의연하고 떳떳하며 그 순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 앞에 자신 있는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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