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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예물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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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제가 헌금이나 헌신에 관해 설교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권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제가 직전에 섬기던 교회의 이경순 권사님이십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딸 하나를 낳았을 때 남편은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가난한 시골살림에 남편도 없이 시 부모를 모시고 시집 식구들을 돌본다는 것이 보통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를 찾아나갔습니다. 열심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믿음이 자라갔고 찬송을 따라 부르다 보니 까막눈이 글씨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너무 생계가 막막하여 딸아이를 들쳐 업고 양평시내로 나왔습니다. 갈 집도 없었기에 교회에 남는 방을 얻어 월급도 없는 교회 사찰 일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교회에 늘 꽃꼿이 하는 것을 보다가 기도 중에 조금만 꽃집을 하나 열었습니다. 그런 데로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양평교회가 두 번째 예배당 건축을 하기위해 헌금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연륜도 없는 집사지만 나도 무언가 주님을 위해 작정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기도 중에 5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50만원은 큰 돈이었습니다. 그때 제일 많이 헌금을 작정하신 장로님이 80만원을 했으니 알만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집도 돈도 없이 교회 사찰일 하던 과부 집사가 그만한 액수를 작정하다니...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왔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꽃집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데 정말 놀랍게도 축복하셨습니다. 작정한 것 다 드리고 집도사고 땅도 많이 살수 있는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목회할 때도 40일 금식기도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권사님이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늘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교우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면 그 믿음을 대략 측정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우들은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물질을 사용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는 지극히 인색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교우들은 자신의 생활보다는 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즐거움과 헌신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말 존경스러운 성도들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렇게 드릴 형편이 아닌데 하나님 앞에는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3가지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다음은 인간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한 삶을 삽니다. 마지막이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물질을 잘 다스리고 이용해야지 결코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이 절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물질은 행복한 삶을 위한, 가치 있는 삶의 도구가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물질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이들에 대한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의 한 청년이 결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왕 결혼할 바에는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빨리 응답받고자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기도내용이 너무 긴 것 같아 간단하게 줄여서 반복하여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돈, 여자, 결혼” 이렇게 반복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결혼을 하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니 진짜 ‘돈 여자’(맛이 좀 간 여자)와 결혼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이들이 수단과 도구가 되어야할 물질을 주인삼아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는 비참한 모습을 경계하시며 물질에 관한 많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6:19-20절“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등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6:24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딤전6:8-9절“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딤전6:17-18절“...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을 다스리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물질에 의해 지배를 받는 분들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어느날 예수께서는 성전 입구에 설치된 연보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뜰은 제사장의 뜰, 남자들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인의 뜰에는 마치 나팔과 같은 모습을 띤 13개의 연보궤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중 9개는 성전세와 제물을 위한 연보궤였고, 나머지 4개는 각종 구제를 위한 연보궤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헌금하는 것을 보시려고 작정하고 연보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41-42절“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분의 예물에 대해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은 단지 외형을 보았다는 의미보다는 그들의 속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습니다. 당시의 헌금은 어느 정도 공개적이었기에 사제에게 헌금 액수를 밝히든가 아니면 통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난한 과부는 두렙돈을 넣었습니다. 두렙돈은 로마 화폐 한 고드란트에 해당되는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한 렙돈은 노동자 하루 임금인 1데나리온에 1/64에 해당됩니다. 1데나리온을 5만원으로 친다면 800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이 가난한 여인의 헌금에 마음에 감동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43-44절“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에는 어떤 조건이 요구됩니까?

1.신앙고백이 담겨져있는 예물입니다.
  비록 여인의 헌금은 극히 적은 액수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은 속이 꽉 찬 헌금입니다. 만두가 맛있는 이유는 속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김밥의 맛을 결정하는 것도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평가하는 우리 예수님의 기준은 거기에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에게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들 이삭이 누구의 아들이지?” “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바쳐봐.” 할 때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이삭은 내 아들이지 하는 생각이 있으면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아들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역대상29:11절에서 다윗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다윗은 소유권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고백이 있습니까? 여인이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두렙돈을 다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소유권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장날이면 시장을 갔다가 오시면서 눈깔사탕을 사오셔서 하나씩 나누어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그 사탕이 우리 입에는 컸기에 그것 먹으려면 사탕물을 줄줄 흘립니다. 어떤 가정에 시장을 다녀온 어머니가 하루는 사탕을 아이들 입에 하나씩 물려놓은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그 사탕 나도 한번 먹어보자.” 아이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싫다고 표시합니다. 그 때 엄마가 묻습니다. “그 사탕 누가 준거지?” 아이들은 사탕 뺏길까봐 다 도망갑니다. 그러나 막내만은 “엄마” 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면서 사탕을 억지로 꺼내 엄마 입에 넣어드립니다. 엄마는 몇 번 빨아보다가 다시 돌려주십니다. “참 고맙다. 여기 사탕 더 있으니 언제든지 꺼내 먹거라”

  여러분의 예물이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는 예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물은 자원하여 즐겁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이 여인은 억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즐거움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억지로 드리는 예물이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헌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고후9:7절“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헌금할 때 백성과 함께 어떤 마음으로 드렸습니까?
역대상29:9절“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또 모세가 성막을 만들기위해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헌금할 것을 권면했을 때 백성들은 한결같이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출35:29절“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도다”

여러분, 예물을 드리는 성도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기쁨이 있습니다. 돈은 모으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누고 드리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건축을 마치고 헌당하는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성도들의 얼굴에 감격과 기쁨이 넘쳐흐릅니다. 어떤 성도는 예배 내내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기쁨과 감격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서인도에서 선교 센타를 건립하는데 몇 가지 헌금을 드리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모든 교우들이 반드시 참여합니다. 둘째는 각각 자기의 형편에 따라 바칩니다. 셋째는 기쁨으로 바칩니다.
  한 부자 교우가 은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접수하던 회계부원은 돌려주었습니다. 1번의 조건은 충족시켰지만 2번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부자교우는 돌아가서 금전을 가지고 와서 다시 드렸습니다. 회계부원은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예물은 2번 조건에는 부합하지만 3번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부자교우는 돌아가서 냉랭한 자신의 심령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가지고 왔을 때 접수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정성어린 연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후8:2“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러분도 기쁨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물은 희생이 담겨져 있는 예물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희생이 있는 예물을 기뻐하십니다. 제물이라는 말은 영어로 sacrifice 라고 합니다. 이것은 희생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에서는 소나 양이나 희생되어져야 했습니다. 헌금에도 희생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온 땅에 온역이 임하였습니다.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아리우나 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을 방문했을 때 아리우나는 너무나 기뻐서 왕이 드릴 제사의 제물을 자신이 무료로 공급하겠다고 제의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값을 치루었습니다.
삼하24:24“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시돈 땅 사르밧 과부는 오랜 기근으로 식량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방문한 엘리야 선지자는 그녀에게 떡을 만들어오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여인은 사실상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와 그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분량의 기름과 밀가루 밖에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을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떡을 먹고 난 엘리야는 이 여인의 가정을 축복했고 기근이 끝날 때까지 병의 기름과 통의 가루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왕상17:8-16)
  현재의 예배당 건축할 때도 많은 성도들의 희생위에 세워졌습니다.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으면서 건축헌금을 드렸을 것입니다. 희생의 자세입니다. 넉넉하거나 물질이 남아돌아가서 헌금을 드리는 분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희생을 감수하는 마음이 있기에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죤 와나메이커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가난한 소년 죤은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건축을 위해 벽돌 한 리어카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죤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는 성장하여 세계 백화점의 왕이 되었습니다. 미국 10대 재벌 중에 한 사람이 된 죤 와나메이커는 후에 100만불을 드려서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하면서 “어렸을 때는 구차한 중에 적은 것을 드렸는데, 지금은 이렇게 큰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축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죤은 그가 바친 선교비가 어떻게 쓰이고 있나 보려고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방문한 그 마을에 아름다운 성전이 우뚝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마침 밭가는 철이었는데 한 노인이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쟁기를 두 마리의 소가 끄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소와 한 청년이 멍에를 같이 쓰고 쟁기를 끌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죤은 이상히 생각하여 그 연유를 물었더니 노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하던 때 내 아들과 나는 헌금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우리는 소 한 마리를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제 아들이 그 소의 멍에를 대신 메고 끌고 있습니다.”

  죤 와나메이커는 그 이야기에 너무나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이시여, 저로 하여금 멍에를 메게하사 저렇듯 희생적인 헌신의 즐거움을 알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예물에는 분명한 고백과 기쁨, 희생이 담겨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고백과 자발적인 기쁨, 그리고 희생이 담긴 예물이 하늘나라 창고에 풍성히 쌓여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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