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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직한 교회 (벧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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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대식 목사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21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합니다. 불과 몇 사람의 작은 모임으로 시작한 우리 교회가, 이제 31살의 나이를 먹은 청년이 되어서, 이렇게 성장, 성숙한 평화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지켜 오신 분들은 오늘이 있기까지 역사의 비바람을 속에서도 힘차게 서 나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시며 감회가 크시리라 생각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장케 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오늘이 있기까지 신앙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모든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를 세워 나가기로 다짐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평화 교회의 한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화 교회, 믿음의 한 식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다. 내가 평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며 긍지를 가지고 사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체험하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이루도록 기도하십시다.

우리는 바람직한 교회의 모델을 성경을 통해 다섯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노아의 방주입니다.
온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생명 줄을 내려 주셨습니다. “네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살아남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하시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 방주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 집니다.
 
저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가,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읽는가, 얼마나 선한 행위를 많이 하는가, 이것 참 중요합니다만, 사실 이는 별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대수로운 일이 못 됩니다.

문제는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나오느냐 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나오는 사람은 턱걸이 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은 그 정도의 사람입니다. 한 주일에 세 번 이상, 또는 매일 아침 나오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에 나올 때마다 깨닫고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왔다가 그냥 의미를 찾지 못하고 가는 날도 있습니다. 졸다 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온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꾸준하면 언젠가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노아의 방주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주에 들어감으로, 단지 들어감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본이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첫 번째 순종입니다.

2. 광야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동안을 광야에 머무릅니다.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애굽적인 성향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옛 모습, 옛 생활, 옛 풍속, 옛 종교, 옛 타락성 등을 깨끗이 털어 버리게 하기 위하여 40년 동안을 광야를 헤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 교회입니다. 수련장입니다. 여기에서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개는 예배드릴 때는 천사 같은데 집에서 혈기 부릴 때는 참 악마 같아.” 그렇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즉 많은 시련과 문제를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다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 중심은 하나님께 있지만 생활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인 중에는 꾸중 듣는 재미로 교회에 나온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죄를 책망 받는 재미가 괜챦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꾸중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훈련하는 곳이 광야교회입니다.

3.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을 지으라. 그 성전에서 회개하고, 거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칠 때, 내가 그 죄를 사하리라. 거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응답하리라’하고 장소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의식이 있고 행사가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로 죄 사함을 받는 것, 사죄의 은총을 힘입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재확인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4. 회당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다음에 바벨론 포로가 된 사람들로 시작하여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여 마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회당을 세웠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입니다.

5.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함께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서로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선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모이고 기도하고 친교하고 전도하고 구제하며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니 귀챦고 안나가자니 꺼림직 하고, 그래서 억지로 나오다 보니 항상 지각입니다. 교회 생활이 썩 재미가 없습니다. 변두리 교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 다잡고 그일 깊숙이 들어가서 씨름해야지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세월을 다 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낭비입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에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만 12살이 되는 해에 성인식을 하고, 신앙적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갈 때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토론하고 제사 드리고 찬송하는 것이 좋아서 그만 배고픈 것도 잊고 부모도 잊고 고향 돌아갈 생각도 다 잊었습니다.

부모님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 사흘 후에 다시 만날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근심해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꾸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안지 못하셨나이까?”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참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한, 마음이 평안합니다. 영혼에 만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낍니까? 이 아버지 집에 들어설 때마다 감격이 있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행복의 극치감을 경험합니까? 바로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영원과 이어지는 시간임을 체험합니까?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을 지금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느낌이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신 분이나 연로하셔서 댁에서 투병하고 계신 어른들은 이런 말씀 종종하십니다. 이제 내가 한 번만이라도 교회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죽을 수 있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입니다. 이토록 간절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교회 생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요, 이것이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 신령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신령한 젖이 있는 교회입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말씀합니다.

어머니의 젖은 태어난 어린 아이가 먹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젖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의 양식입니다. 아이들은 젖을 먹으므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령한 젖은 순수한 말씀의 젖입니다. 그 신령한 말씀의 젖으로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라나기를 꾀하며 살아갑니다. 어린이의 출생만이 가정의 기쁨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또 우리는 직장에서 나의 위치가 자라나고, 경제적으로 사업이 자라나고, 재산도 자라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물어야 될 질문은, 신령한 것도 자라나기를 갈망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되 무엇보다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어린이들은 젖을 무척 사모합니다. 엄마의 젖을 시도 때도 없이 찾습니다. 만약 어린이들이 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식욕이 없다면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전혀 자랄 수 없습니다. 만약 아이에게 식욕이 없다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병들면 식욕을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입에서 당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병들어 있으면 우리는 말씀에 대한 식욕을 상실합니다. 과연 나는 말씀을 정말 신령한 젖으로 사모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식욕이 없다면 나는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가치한 대용품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것질을 하면 정상적인 식사가 잘 안됩니다. 무가치한 대용품, 별로 좋지도 못하고 나에게 유익하지도 못한 무가치한 대용품으로 나를 채웠을 때 우리는 참으로 취해야 할 것을 사모하지 않게 됩니다. 내 영혼이 악독,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로 가득 차 있을 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동반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싫어지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은 열망이 사라지는 것 입니다.그 러나 내가 영적으로 건장한 자리에 있을 때는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말씀을 찾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평화 교회 모든 성도님들,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가운데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2.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4-5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건물이 아니고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령한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그 성전은 돌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오셨고 이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젖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말씀이라면 신령한 집은 그리스도의 성숙된 인격을 나타내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아계신 주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신령한 집을 세우는 산돌이 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산에 있는 반석으로서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반석에서 깨어져 나와야 집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땅에 붙은 반석은 집을 지을 수 있는 돌이 아닙니다. 반석은 깨어지고 운반되어야 집을 짓는 주춧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 땅에 속하고 땅에 뿌리박고 있던 우리의 인간성에서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으로 향하던 애정과 욕심을 십자가의 정으로 잘라버려야 합니다. 심령의 반석을 깨고 산돌로 지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젖을 먹는 신령한 몸으로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성전을 세우려 이 땅에 오셔서 땅에 속한 집을 십자가에 못 박아 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몸으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벗어 버리고 지난날을 잘라버리고 세상이라는 반석을 깨뜨려 산돌로서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고대국가 중 하나인 스파르타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파르타 왕이 그를 찾아온 외국의 왕에게 성을 굉장히 자랑했습니다. 손님은 아무리 보아도 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으니, 스파르타 왕은 자기의 군대, 호위대를 가리키며 “이것이 스파르타의 성이요, 군인 한사람 한사람이 벽돌입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 교회도 벽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임이 교회요, 각자가 신령한 산돌이 될 때 참된 신령한 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제사가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절)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말씀합니다.

거룩한 산제사, 즉 신령한 제사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몸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술로 드리는 찬양의 제사입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눈물의 제사입니다. 선행과 나누어 줌으로 드리는 행위의 제사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평화 교회가 오늘까지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신령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떠나지 않는 권사님들이 계십니다. 하루는 밤늦게 기도실에 들르니 권사님들이 계십니다.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목사님, 죄송해요, 이제 늙어 바칠 것 없어 몸이라도 바치고자 앉아 있는 거예요”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제단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는 종들의 산제사를 기뻐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최후 목표는 신령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여 자라게 해서 신령한 집이 되게 하고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회는 신령한 젖이 있는 곳이요, 신령한 집으로 신령한 제물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바람직한 교회, 우리는 교회 창립 주일을 맞으면서 이런 신령한 교회를 세워 나가기로 다짐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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