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베드로 (마 10:2-6)

  • 잡초 잡초
  • 250
  • 0

첨부 1


- 설교 : 김이봉 목사

□ 하나님이 쓰신 사람, 베드로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장 2절-6절)

1. 베드로는 가장 평범한 어촌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벳세다인 요나의 아들이요, 안드레의 형제인데 본명은 시몬 이었습니다.
수리아 어로 게바 라고 예수님이 개칭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업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주를 따라 12제자 중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① 그의 성격은 정열적이고, 충동적으로 많은 실패를 한 인물이었습니다.
② 바다 위를 걸어 주님에게 가다가 풍랑을 보고 무서워 빠졌고,
③ 타인보다 먼저 주님을 메시아라고 말하여,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④ 그는 언제나 자기가 예수님을 제일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⑤ 그래서 주를 버리고 다 달아날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⑥ 변화산에 올라가서 장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에게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주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그대로 살자고 하였습니다.
⑦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할 때 그러지 말라고 간하다가 책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⑧ 그는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검을 휘둘러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⑨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시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뿐 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한 것처럼 12제자 면면을 보면 모두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
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실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말입니다.
학식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고 그런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쓰시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떠하였기에 하나님이 쓰셨을까?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우리들에게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2.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졌으나 철저하게 통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 앞에서 세 번씩 주님을 부인했지만, 곧 통회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큰소리 치는 베드로를 보면서, '오늘 네가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것처럼 그가 세 번 부인하는 순간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럴때, 마태복음 26: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나이 흘리는 눈물은 그렇게 가벼운 눈물이 아닙니다.
더더욱 바닷가에서 뱃사람으로 성장한 사나이 베드로의 눈물이야말로 그렇게 값싼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마태의 기록대로 보면, 심히 통곡했다고 하였습니다.
통곡은 그냥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깊은 교훈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도록 하십니다.
그럴때 대부분의 경우 심한 통회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보면 모두 베드로와 같이 철저하게 자신의 약점을 통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이라고 칭하는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있으면서도 자신의 범죄 함을 침상이 썩어나가도록 통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통회자복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다시 주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 57:15절에,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사야서 66: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들어 쓰는 사람들은 통회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죄의 속성은 변명하기 쉽고 책임전가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온 왕들에게는 나라의 번영과 왕위에 견고함으로 나타났지만, 그 반대로 더욱 더 악한 길로 행한 왕들은 결국 멸망으로 끝났습니다.
대표적인 왕이 아합 왕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사람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여 옥에 검거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거짓 영으로 예언하는 어용 선지자들의 말만 들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에후의 혁명으로 모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이 또한 큽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면 그가 흠이 있어서도 들어 씁니다.
그러나 끝까지 교만하면 꺾어 버리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교훈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즘도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특히 잘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원로들과 주의 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잘못을 뉘우치고 시정하면 모르거니와, 끝내 무시하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릴 것입니다.
통회자복은 사람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는 주님 사랑 앞에 녹아진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법의 힘은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지만, 사랑은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을 희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법을 능가할 법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사랑에 녹아져 자기 몸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였습니다.

세 번씩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자기를 찾아와 한마디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반복하여 물으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는 녹아졌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주님이 그에게 세 번 확인한 것은 그의 세 번 부인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점점 로마황제의 박해와 핍박이 가해지면서 순교자들이 많이 생겨질 때, 베드로는 제자들의 권면에 못 이겨 살기 위하여 로마 성을 빠져나가던 중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알피안 대로에서 마주오는 주님과 만났을 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니) 라고 할때, '나는 너를 위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성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또 한번의 소리없는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로마로 들어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여기서 또 한번 깊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율법주의 적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이것도 죄, 저것도 죄, 죄, 죄, 죄 하면서 죄짓지 않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교회 봉사도 법적으로 하자만 없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주일 낮, 삼일기도회, 또는 새벽기도회, 등등...
사람 앞에서 흠 잡힐 것 없이 말씀을 법으로만 지키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모태 신앙으로부터 이어지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모태 신앙이지만, 때때로 그런 유혹에 많이 빠질 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시시하게 보일때가 있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 집사라 할 수 있을까?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의 장로 또는 목사가 되었을까?
늘 교회에 나와서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만 보여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늘 신앙생활에 기쁨보다는 타성화 되고 축 늘어진 생활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베드로의 주님과의 이 대화 장면에서 깊이 눈물을 흘린 후부터는 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교회 봉사도 이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난 의보다는 사랑의 녹아진 행위가 더 아름답습니다.
주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여인도 바로 이 사랑을 느낀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이 더 의롭게 보였던 제자들 눈보다는 자신을 구원해 준 주님의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 앞에 흠없는 신앙생활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 주님 사랑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녹아진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교회에서 왜들 시험에 듭니까?
모두 율법주의적 봉사생활 때문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찬송가 141장에 가사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도 먼 사람들임을 자인하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도 흘린 것이 없고,
베드로처럼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성도 없었고,
베드로처럼 주님께로부터 사랑의 음성도 들어 본적이 없었기에,
아직도 주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보다는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서 무슨 약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진정한 통회자복이 없기에 멀리서 보고만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철저하게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주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